1996년, 57세의 김기춘은 국회의원(신한국당)으로 변신했다. 이때부터 60대의 끝자락까지 12년간 금배지를 달고 살아간다. 김기춘이 처음으로 배속된 상임위원회는 농림해양수산위원회였다.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 경력과는 거리가 있지만 지역구가 거제이고 초선이라는 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해 7월 국회의원 재산 등록 현황이 공개됐다. 김기춘은 17억 9,900만 원의 재산을 신고했는데, 의사 부부인 아들 쪽 재산 신고는 거부했다. 재산을 신규 등록한 의원 184명 중 부모 또는 자녀의 재산 신고를 거부한 사람은 김기춘 등 28명(15퍼센트)이었다.
불법은 아니었다. 부모나 자녀에게 별도의 소득이 있음을 증빙하는 서류가 있으면 그들의 재산은 신고하지 않아도 된다는 규정이 있었다. 그러나 규정이 모호해 상당 규모의 재산이 분산·은닉됐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았다. 신고를 거부한 의원들은 “법망 피해 가기”라는 비판을 받았다.
정보기관 바로 세우기와 안기부법 문제
1996년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한 사안 중 하나는 안기부법 문제였는데, 오늘날 개혁 과제와 직결된다는 점에서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문제의 근원은 5·16 쿠데타(1961년) 직후 박정희 세력이 중앙정보부를 만들면서 어마어마한 권한을 부여한 것이었다. 중앙정보부는 정보 수집 권한만이 아니라 범죄 수사권까지 갖고 있었다. 그에 더해 다른 기관의 정보·수사 활동을 통제한 것은 물론 보안 업무를 감독한다는 명분으로 각 기관 위에 군림했다.
그렇게 해서 중앙정보부는 최고 권력자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무소불위의 권력 기관이 됐다. 정치 공작의 중핵으로서 수많은 사건을 고문으로 조작해 터트리며 독재 정권 유지에 앞장섰다. 1980년대에 이름이 안기부로 바뀐 후에도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따라서 정보기관을 바로 세우는 문제가 6월 항쟁(1987년) 이후 주요 개혁 과제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었다. 1988년 말 안기부법 개정 문제가 공론화됐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야권의 공세에 밀린 노태우 정권은 안기부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개정 내용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안기부의 수사 대상 범죄에서 국가보안법 7조(찬양·고무죄) 위반을 제외한 정도였다.
그러나 이마저 얼마 후 자취를 감췄다. 1989년 연이은 방북 사건을 계기로 극우 반공 세력이 공안 정국을 조성하고(검찰총장 김기춘이 이것에 앞장섰다), 1990년 3당 합당이 이뤄지면서 그렇게 됐다.
이 문제는 1993년 김영삼 정권 출범 후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야당은 안기부의 수사권을 폐지하거나 적어도 대폭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당은 반대했다. 극한 대치 끝에 여야는 국가보안법 7조와 10조(불고지죄)에 대해서만 안기부의 수사권을 삭제하는 것으로 합의하고, 안기부법을 개정했다.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개혁 입법의 하나라는 평가를 받았다.
김기춘, 안기부법 ‘개악’에 적극적
극우 반공 세력은 안기부의 수사권 제한을 없던 일로 만들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1996년 8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연세대 사태 등을 계기로 공안 바람이 불자 신한국당은 안기부법 재개정을 추진했다. 재개정안의 핵심은 국가보안법 7조와 10조에 대한 수사권을 안기부에 다시 준다는 것이었다. 공안 바람과 안기부법 재개정 추진은 1년 앞으로 다가온 대선을 염두에 둔 조치이기도 했다.
신한국당에서 안기부법 ‘개악’, 즉 재개정을 주도한 인사는 정형근이었다. 정형근은 1992년 총선에서 안기부 대공수사국 요원들의 흑색선전물 살포 사건이 일어났을 때 대공수사국장이었으나,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았다. 그런 정형근이 안기부법 재개정에 앞장선 것은 기괴한 풍경이었다.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출신 김기춘도 안기부법 재개정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공작 정치의 망령이 다시 활개 칠 것이라는 우려가 곳곳에서 나왔다.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인권 탄압에 악용돼온 국가보안법 7조를 폐지해도 모자랄 판에 그것에 대한 수사권을 안기부에 다시 안겨주는 건 말이 안 된다는 지적도 나왔다.
신한국당은 이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1996년 12월 26일 새벽 신한국당은 노동 관계법 개정안과 함께 안기부법 재개정안 등을 7분 만에 날치기 통과시켰다. 노동 관계법 개정안은 정리 해고제 등과 관련해 일방적으로 재계의 손을 들어주는 내용이었다.
이는 곧바로 1996~1997년 총파업을 불러왔다. 김영삼 정권의 폭거를 규탄하는 파업과 시위 물결이 전국을 뒤덮었다. 두 달여에 걸친 총파업 끝에, 날치기 통과된 노동 관계법은 사실상 시행되지 못하고 폐기 수순을 밟았다. 1997년 3월 여야는 정리 해고제 시행 2년 유예 등의 내용을 담은 노동 관계법 단일안을 새롭게 통과시켰다. 그러나 그해 말 IMF(국제통화기금) 구제 금융 위기를 맞으면서 다시 상황이 악화됐고, 결국 1998년 정리 해고제와 파견제가 법제화되며 노동자의 삶은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런 가운데, 날치기 결과 수사권이 모두 회복된 안기부는 국정원으로 이름을 바꾼 후에도 정치 공작의 본산이라는 체질을 바꾸지 않았다. 특히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기에 그 점을 확실히 입증했다. 국정원 예산을 청와대에서 멋대로 갖다 쓴 것도 그 시기였다.
그러한 국정원을 개혁하기 위해 대공 수사권 폐지가 필요하다는 얘기가 그간 여러 차례 나왔다. 그때마다 국정원과 수구 정당의 반발에 막혔다. 예나 지금이나 반대 논리의 핵심은 ‘그러면 간첩은 누가 잡느냐’, 이것이다. 국정원의 대공 수사권 폐지가 국가 차원에서 간첩 수사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 전혀 아닌데도, 그 논리를 반복한다. 대공 수사권 폐지 등을 규정한 국정원법 개정안이 2017년 11월 발표되자 공안 검사 출신 황교안도 똑같은 주장을 했다.
그런 논리를 펴는 세력의 특징 중 하나는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조작 간첩을 양산해온 사실은 쏙 빼놓는다는 것이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황교안 역시 대공 수사권 폐지에 반대할 때 그 사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이러한 세력의 주장에 혹해 정보기관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등한시한다면 국민들은 언제든 정보기관에 의해 또다시 짓밟힐 수 있음을 역사는 말해준다.
대선과 정권 교체 그리고 김기춘
대선을 앞둔 1997년 10월 29일, 김기춘은 이회창 총재 법률 특보로 임명됐다. 그에 앞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 총재의 약점을 캐기 위해 그해 8월 이회창 쪽에서 구성했다는 ‘1차 특수팀’에 김영일, 정형근, 황우여, 김충근과 함께 김기춘이 포함됐다는 얘기가 정치권에서 돌았다. 이 팀은 그해 10월 7일 신한국당 사무총장 강삼재가 터트린 김대중 비자금 의혹과 관련해 주목을 받았다. 이 팀에서 강삼재에게 자료를 제공한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 대선 1년 후인 1998년 12월 <동아일보>는 “신한국당 핵심 관계자”의 증언을 보도했다. 이 관계자는 대선 당시 이회창 아들의 병역 논란 등에 대한 국민회의 측의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DJ 대책팀’이 구성돼 있었다”라고 말했다. 김기춘을 비롯해 앞에서 말한 5명 등으로 이뤄진 팀이었는데, 김기춘은 거의 참여하지 않았고 황우여는 판사 출신이어서 별 도움이 안 되었다고 이 관계자는 밝혔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팀에서 주로 움직인 사람은 김영일과 정형근이었고 그중 정형근이 김대중 비자금 의혹 자료를 구해왔다고 한다. <동아일보>는 이른바 ‘사직동팀’(경찰청 조사과)이 1995년 말부터 추적한 자료가 청와대 사정비서관을 통해 정형근에게 넘어갔다고 보도했다.
1997년 12월 김대중 당선으로 대선은 마무리됐다. 한나라당(신한국당의 후신) 소속 김기춘은 이제 야당 의원이 됐다. 그전에는 한 번도 야당 쪽에 서본 적이 없는 김기춘이었다.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까지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한나라당 의원들 중에는 예전에 야당 소속이었거나 재야인사였던 이들도 있었지만, 김기춘은 그것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만큼 야당 생활이 더 낯설고 어색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세풍·총풍 강경 대응 주도한 김기춘의 한나라당 인권위
해방 후 한나라당까지 이어져온 세력이 정권을 내놓은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한나라당 내에서 향후 진로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그 밑바탕에는 당권 경쟁이 놓여 있었다). 1998년 6월 17일 한나라당 의원 연찬회에서도 그런 모습이 나타났는데, 이날 분임 토의 과정에서 김기춘은 세대교체론을 주창해 눈길을 끌었다. 이회창과 대립각을 세우는 주장으로 비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을 계속 보이지는 않았다. 얼마 후부터는 이회창 쪽에 서서 김대중 정권을 강하게 공격했다. 특히 그해 10월 13일 한나라당 인권위원장으로 임명된 후 그러했다. ‘인권’은 김기춘의 삶과 엇박자이지만, 유신 헌법 제작에 관여한 이듬해(1973년, 법무부 인권옹호과장)에 이어 이때도 인권이라는 말이 들어간 직위를 맡았다.
그러나 한나라당 인권위원회의 활동은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인권 옹호 활동과는 거리가 있었다. 한나라당에서 인권위원회는 대여 강경 투쟁을 이끌며 “이(회창) 총재의 핵심 보위 부대”로 불렸다. 구성원은 위원장 김기춘을 필두로 이신범, 정형근, 안상수, 황우여, 홍준표 등이었다.
1997년 대선과 관련해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세풍(한나라당 인사들과 국세청 간부가 23개 대기업에서 이회창 캠프의 대선 자금을 불법 모금), 총풍(이회창 쪽 인사가 지지율을 높이고자 북한에 무력시위를 요청한 혐의로 피소) 사건에서 강경 대응을 주도한 것도 인권위원회였다. 서상목(한나라당 의원), 이석희(국세청 차장)와 함께 세풍 3인방으로 꼽힌 이회성(이회창 동생)이 구속되자 인권위원회는 법률안 심의 태업 등의 대응 전략을 제시하는 한편 이회성을 위한 매머드급 변호인단을 꾸렸다.
김대중 정권의 햇볕 정책도 김기춘의 주요 공격 대상이었다. 김기춘은 햇볕 정책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이 과정에서 금강산 관광 유람선 첫 출항(1998년 11월 18일) 20일 전, 유람선에 “최소한의 무장을 갖추어야 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대북 화해 협력 정책에 대한 김기춘의 적대감은 노무현 집권기에도 나타난다.
특검에 구속되기 18년 전, “집권하면 특검제 불편” 예견
김기춘을 비롯한 한나라당 내 검찰 출신 의원들은 검찰 개혁 조짐(제대로 추진되지는 않았다)에 강한 경계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아울러 1999년 특검제가 처음으로 실시되는데, 이와 관련해 김기춘은 인상적인 얘기를 남겼다.
이때까지 특검제는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제도가 아니었다. 미국 대통령이 특검 수사를 받은 사실(1970년대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리처드 닉슨, 1990년대 이른바 ‘지퍼 게이트’로 빌 클린턴 등)이 한국에도 알려지긴 했지만, 한국에서는 시행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사한 사례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1988년 조영황(노무현 집권기에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역임) 변호사가 최초의 특별 검사 격인 ‘공소 유지 담당 변호사’로 임명돼 부천서 성고문 사건(1986년) 당시 검찰 기록을 조사한 적이 있다. 이를 통해 사건 당시 검찰이 수사 과정에서 성고문 진상을 모두 밝혀내고도 수사 내용을 대부분 숨긴 채 수사 결과를 수정, 시나리오에 따라 거짓 발표를 하고 가해자 문귀동에게 기소 유예 처분을 내렸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이것은 정식 특검과는 거리가 있었다.
특검제 도입의 길을 연 것은 대검 공안부장 진형구의 입이었다. 1999년 6월 7일 진형구는 “조폐공사 파업(1998년 11월)은 사실 우리가 만든 거다”, “우리가 유도를 한 거야”라는 폭탄 발언을 했다. 전날(6일) 대전고검장 승진 발령을 받고, 7일 다른 대검 부장들과 반주를 곁들인 점심 회식을 한 후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한 얘기였다.
진형구는 “공기업 구조 조정의 전범으로 삼기 위해” 파업을 유도했고, 고교 후배인 조폐공사 사장 강희복과 사전 논의 후 진행했다고 말했다. “우리(검찰)가 구조 조정을 앞당긴 셈”이라는 말에서도 드러나듯이 일종의 ‘실적’ 자랑을 한 셈이다. 진형구는 “공기업체에 파업이 일어나면 우리(검찰)가 이렇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그쪽(노조)이 쉽게 무너져버려 싱겁게 끝났다”는 얘기도 했다.
진형구의 얘기는 파업 전후 상황과 부합했다. 이미 700명을 감축한 사측이 예정보다 2년 앞당겨 옥천 조폐창을 폐쇄하기로 하는 등 노동자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결정이 나오면서 조폐공사 파업이 촉발됐다는 점에서도 그러했다. 이 파업으로 7명이 구속됐다.
무엇보다 국가 기관, 그것도 검찰이 나서서 파업을 유도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진형구의 발언은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특검제를 도입해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고, 그렇게 해서 특검제가 처음으로 실시된다.
이 과정에서 특검제 도입 방식(한시적 도입인가 전면 실시인가), 수사 대상 등을 놓고 여야 간 힘겨루기가 벌어졌다. 여야를 떠나 검찰 출신 의원들은 대체로 특검제 도입에 부정적이었다. ‘검찰 공화국’ 구축의 주역 김기춘도 마찬가지였다.
7월 9일 한나라당 의원 총회에서 김기춘은 “특검제에 지나친 환상을 갖지 말자”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상적인 얘기를 했다. 김기춘은 “우리가 언제까지 야당만 하겠는가”라며“우리가 집권하면 특검제라는 괴물은 우리에게도 불편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18년 후인 2017년 1월, 김기춘은 박영수 특검에 의해 구속된다. 특검의 손에 구속돼 신문을 받는 동안, 18년 전 특검에 대해 자신이 한 얘기가 김기춘 머릿속에 떠올랐을까?
지역주의에 맞서겠다? ‘초원복집’ 김기춘의 이색 선언
1999년 9월 15일 김기춘, 정형근, 김형오, 김무성 등 한나라당 부산·경남 지역 초·재선 의원 8명은 낡은 정치와 단절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지역감정을 배경으로 하는 1인 지배 정당 체제의 그늘 아래 안주”한 과거를 반성하고, 앞으로는 “지역주의 책동에도 과감히 맞서 싸우고 권위주의 정치 행태와 비민주적 정당 체제를 혁파하는 데 앞장”서겠다는 내용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3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정치로 대표되는 과거와 단절하겠다는 뜻인데, 갑자기 이런 성명을 낸 것은 김영삼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었다. IMF 구제 금융 위기로 인기가 바닥 수준이던 퇴임 대통령 김영삼은 1999년 민주산악회 재건을 통한 정치 재개 가능성을 타진했으나 좌절됐다. 그러자 8명이 때맞춘 듯 그러한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주변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 김영삼이 민주산악회 재건을 활발히 추진할 때에는 침묵하다가 이제 와서 그런 성명을 내는 것은 기회주의라는 지적을 받았다. 초원복집 사건(1992년)의 주역 김기춘이 “지역주의 책동”에 맞서 싸우겠다고 선언한 것도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2000년 총선에서 김기춘은 재선에 성공했다. 그해 6월 역사적인 남북 정상 회담이 열렸다. 그 영향으로 한나라당의 극우 반공 색채를 덜어내려는 움직임이 당내에서 일었다. 김원웅 의원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했다. 안영근 의원은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면서 국가보안법은 사실상 사문화됐다”며 힘을 보탰다.
김기춘은 한나라당 내 몇몇 젊은 의원들의 이러한 움직임에 강하게 제동을 걸었다(노무현 집권기에도 같은 모습을 보인다). 김용갑도 김기춘과 마찬가지였다. 김기춘과 김용갑은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의 핵심 자문 그룹으로 불리는 7인회도 함께하게 된다.
2001년 6월 김기춘은 전·현직 국회의원, 전직 장관 등과 함께 지역구인 거제를 찾아 전세 낸 유람선으로 낚시와 한려수도 관광을 했다가 물의를 빚었다. 이들이 김기춘의 지역구에 있는 대우조선에서 제공한 헬기 2대를 타고 김해공항에서 거제까지 이동했기 때문이다. 이때 대우조선은 워크아웃으로 힘든 상태였다. 일반인은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외도 관광농원에서 식사한 사실도 드러났다.
2002년, 재선 의원 김기춘은 한나라당 몫으로 분배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 위원장 자리를 노렸다. 경쟁 상대는 3선 의원 함석재였다. 한나라당 지도부는 ‘재선보다는 3선’이라며 함석재를 낙점했다. 함석재가 자민련에서 한나라당으로 넘어온 것에 대한 보상이라는 얘기가 돌았다.
김기춘은 “나도 다른 당에 가면 국회 부의장도 할 수 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고시 기수도 이회창 후보를 제외하곤 내가 가장 높다. 공직 경험도 밀리지 않는다”는 얘기도 했다. 나이는 함석재가 한 살 위지만, 김기춘이 법무부 장관일 때 함석재는 지청장이었다.
반발도 소용없었다. 한나라당 지도부가 낙점한 대로 함석재가 법사위원장이 됐다. 그리고 그해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가 또 패하면서 김기춘의 야당 생활은 5년 연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