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입법 발목 잡은 김기춘의 법사위

노무현 정권 출범 후인 2003 4, 김기춘은 함석재의 뒤를 이어 드디어 국회 법사위원장이 됐다. 이것은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나는 법사위가 법안 처리의 길목이라는 점과 관련돼 있다. 길목을 막아버리면 개혁 입법은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김기춘 법사위원장 시절 바로 그런 모습이 나타났다. 과거사 진상 규명을 위한 입법 문제를 통해 부분을 짚어보자.

2003 12 16, 4 과거사(동학농민전쟁, 일제 강점기 친일·반민족 행위, 강제 동원,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 특별법이 국회 과거사 진상 규명 특위를 통과해 법사위에 회부됐다.

그러나 법사위는 법안을 처리하지 않고 해를 넘겼다. 그렇게 시간을 끄는 동안 한나라당은 친일 진상 규명법 등을 누더기로 만들기 위한 공세를 펼쳤다.

우여곡절 끝에 2004 3 2, 친일 진상 규명법은 국회를 통과했다. 그러나 이미 법안은 원안에서 대폭 후퇴해 누더기가 상태였다. 제대로 과거사 정리는 기대할 없고 오히려 면죄부를 있다는 지적까지 받았다. 아울러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에 관한 법안은 이날 부결됐다.

법사위라는 길목을 막아 개혁 입법을 저지하는 행태는 김기춘 후임인 최연희(기자 성추행으로 물의를 빚는 최연희다) 법사위원장 시절에도 똑같이 나타난다.

특히 2004 하반기 이후 4 개혁 입법(국가보안법, 사학법, 과거사 진상 규명법, 언론 관계법) 문제에서 그러했다.

노무현 탄핵 소추위원, 기각 사과 거부

다른 하나는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탄핵에서 김기춘이 법사위원장으로서 전면에 나서게 된다는 것이다. 2004 3 12 한나라당은 새천년민주당(민주당), 자민련과 손잡고 노무현 탄핵안을 우격다짐으로 통과시켰다. 김기춘은 법사위원장 자격으로 검사 격인 탄핵 소추위원을 맡았다. 변호사 역할을 대통령 대리인단에는 김기춘의 고교 후배 문재인 등이 있었다.

탄핵은 거센 역풍을 불러왔다. 탄핵안이 강행 통과되자 수많은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탄핵에 분노하는 목소리가 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졌다. 그것에 힘입어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치러진 4·15총선에서 압승했다. 탄핵을 강행한 정당들의 의석수는 대폭 줄었다.

김기춘도 전보다 훨씬 힘든 선거를 치러야 했다. 탄핵 역풍으로 3 25 KBS 여론 조사에서 열린우리당 후보에게 7퍼센트포인트 뒤처지는 고전했다.

3 30 김기춘은 탄핵 심판 변론 기일을 미뤄달라고 요청했다. 지역구에 가서 선거 운동을 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국회를 대표하는 탄핵 소추위원답지 못한 모습이자, 탄핵 심판정에 노무현이 출석하지 않자헌법상 성실한 직무 수행 의무에 어긋나는 이라고 비난한 것과도 어긋난다는 비판을 받았다.

김기춘은 탄핵 소추위원 일을 잠시 접고 지역구에 내려가 선거 운동에 주력했다. 비판을 감수하고 그렇게 해야 만큼 상황이 만만치 않았다. 당선 확정 김기춘은 탄핵 심판정에 복귀했다.

그러나 탄핵 심판은 김기춘 뜻대로 되지 않았다. 5 14 헌법재판소는 탄핵 기각 결정을 내렸다.

2004년 5월 탄핵 기각 직후 김기춘은 “사과는 잘못한 사람이 하는 것”이라며 사과를 거부했다. ⓒMBC 화면 갈무리

기각 직후 김기춘은사과 필요성을 느끼느냐 질문에사과는 잘못한 사람이 하는 이라며 사과를 거부했다.대통령이 잘못하면 탄핵하는 것은 국회의 권능이고국회는 국회의 직분을 다했다 주장이었다.

소추위원 김기춘과 탄핵, 어떻게 것인가

1 (2005)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김기춘은 탄핵 소추안 가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주도했다고 하지만 운명적인 것이었다.”

법사위원장이었기 때문에 당연직으로 탄핵 소추위원이 수밖에 없었다는 뜻으로 얘기였다. 소추위원으로서 당연한 절차를 따른 것이고 지금도 후회는 없다 얘기도 했다.

2013 김기춘이 청와대 비서실장이 직후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 주간도 김기춘에 대한 칼럼에서 그와 맞닿는 주장을 했다.

황호택은 대통령 탄핵 소추는 국회 재적 3분의 2 넘는 의원들의 찬성으로 발의됐고김기춘 법제사법위원장이 탄핵 소추 청구인을 것은 절차에 따른 권한 행사라고 주장했다. “탄핵 소추위원을 지낸 것을 문제 삼아 야당이 그를 공격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얘기였다.

과연 그럴까? 탄핵 자체가 불법은 아닌 만큼 형식 논리만 놓고 보면 위와 같은 주장을 수도 있다. 그러나 2004 탄핵의 적절성, 탄핵 주축 세력의 실체, 탄핵에 이르기까지 김기춘이 역할 등을 고려하면 얘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번째, 탄핵안 가결 다수의 시민이 보인 모습에서도 드러나듯이 2004 탄핵은 무리했다. 국회의 정당한 권한 행사라고 보기에는 정도가 지나쳤다. 국회는 미쳤다 수많은 시민이 외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탄핵의 주요 사유로 제시된 정치적 중립성 문제와 관련해 대응의 형평성 면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노무현이 탄핵되자사필귀정이라고 김영삼이 대통령이던 때와 한번 비교해보자.

1996 총선을 앞두고 대통령 김영삼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총선 우리 (신한국당) 지원하기 위해 나는 직접 지원에 나설 것이다. 반드시 우리 당이 승리하리라 자신한다.”

선거법 위반이라고 야당에서 반발했지만 신한국당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김영삼에 대한 탄핵 같은 것은 있지 않았다.

번째, 탄핵을 강행한 세력에서 민주당도 축을 이뤘지만 다수는 한나라당이었다. 한나라당에서 탄핵 심판과 관련해 비중 있는 역할을 사람은 김기춘과 김용균이다. 김기춘의 경우 유신 독재 수호, 공안 정국 조성, 초원복집 사건(1992) 등을 빼놓고는 삶을 설명할 없다.

김기춘의 서울대 법대 후배인 김용균은 1980 국보위에 참여했고, 후에는 박철언이 이끈 사조직 월계수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김기춘 법사위원장 시절에는 친일 진상 규명법을 누더기로 만드는 앞장섰다. 김용균의 부친은 일제 강점기에 면장, 금융조합장을 지냈다.

김기춘과 김용균은 한나라당에서 이질적인 존재가 결코 아니었다. 6월항쟁(1987) 이후 친일, 분단, 독재로 얼룩진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 상태에서 제한적이고 부분적으로 민주화로 나아가다가 바로 청산되지 않은 세력에게 탄핵이라는 형태로 반격을 당한 셈이다.

2004년 4월 11일 특별기자회견을 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 ⓒ사람사는세상노무현재단

번째, 탄핵안 가결 전에 김기춘이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다가 가결 법사위원장으로서 어쩔 없이 소추위원을 것이 전혀 아니다. 탄핵까지 가는 과정에서 김기춘도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예컨대 측근 비리, 대통령 재신임 문제 등을 놓고 논란이 벌어졌던 2003 10 김기춘은 탄핵을 거론하며 대통령 하야를 요구했다. 그러면서 탄생 과정부터쿠데타와 마찬가지로 국민적 정통성에 하자가 있는 정권이라고 몰아세웠다.

유신 헌법 제작에 관여하며 유신 쿠데타(1972) 법적으로 뒷받침한 김기춘이 선거를 거쳐 탄생한 정권에 대해쿠데타‘ ‘정통성에 하자 운운한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김기춘이 2004 탄핵 소추위원이었던 뭐가 문제냐 논리는 수긍하기 어렵다.

쓴웃음 자아내는탄핵 그날 대통령 배려주장

2005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김기춘은 탄핵안이 가결된 자신이 대통령 노무현을배려했다 주장도 했다. 대통령이 오후 3시로 예정된 해군 사관 학교 연설을 있도록, 탄핵안 가결 시간 기다렸다가 오후 4 이후에 탄핵 소추 의결서를 헌법재판소에 접수했다는 것이다. 쓴웃음을 짓게 만드는 김기춘식 배려다.

2007 3 김기춘은 총리실 산하 기구의 개헌 시안 공론화 활동과 관련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압박하는 과정에서 탄핵 얘기를 다시 꺼냈다.

김기춘은대통령 탄핵 선관위가 우물쭈물하다가 탄핵 해도 일을 탄핵으로 이끌었다 주장했다. “탄핵 해도 이라는 말과 함께, 그런 사안을 탄핵으로 끌고 책임을 선관위에 미룬 점이 눈에 띈다.

김기춘은 노무현 탄핵 사건에 대한 (‘대통령 탄핵 소추의 의미’) 썼다. 글은 서울대 법학과 16 동창회가 2008년에 엮은 <낙산의 둥지 떠나 반백 > 실렸다. 김기춘은 이렇게 썼다.

“검사, 검사장, 검찰총장, 법무장관, 국회의원을 거치면서 경험하고 느낀 바가 많지만 2004년 대통령 노무현 탄핵 소추위원으로 헌정 사상 최초로, 아마도 최후로 탄핵 심판에 관여한 일이 법률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가장 인상에 남는다.”

노무현을 겨냥한 김기춘의 탄핵 논리는 박근혜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있었다. 이미지는 2004년 노무현 탄핵 당시 박근혜 의원. ⓒ연합뉴스 TV 화면 갈무리

글은 박근혜 탄핵 심판이 진행 중인 시기에 <신동아>(2017 3월호) 내용이 소개되며 세간의 눈길을 끌었다. 글에서 김기춘이 전개한 논리는 탄핵 기각을 강변한 박근혜 주장과 상반되는 면이 많았다.

예컨대 김기춘은공직자 지휘·감독을 잘못하거나 부정·비리를 예방 해도 탄핵 사유”, “직무를 태만히 하거나 성실히 수행하지 않은 경우에도 탄핵 사유라고 주장했는데, 모두 박근혜에게 그대로 적용될 있는 논리였다. 노무현을 겨냥한 김기춘의 탄핵 논리가 노무현 탄핵 사건에서는 통하지 않고, 박근혜 파면의 정당성을 더하는 격이었다.

과거사 진상 규명이국가 파괴 행위‘?

노무현 탄핵을 강행한 정당들 민주당은 2004 4·15총선에서 10석도 확보하지 못했다.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민주당과 달리 한나라당은 121석을 차지하며 살아났다. 18석이 줄긴 했지만, 기사회생이라고 보기에 충분했다.

중심에 한나라당의 대표 박근혜가 있었다. 4·15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을 위기에 몰아넣은 탄핵 역풍만이 아니었다. 한국 정치를 좀먹은 검은돈의 역사에서 새로운 장을 차떼기 사건 한나라당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박근혜 대표 취임 한나라당은차떼기 드러난 본모습을 천막 당사라는 정치 쇼로 분식했다.

총선에서 기사회생하면서 한나라당에서 박근혜의 위상은 매우 높아졌다. 김기춘은 그러한 박근혜와 밀착했다. 유신 독재 시절 박정희 눈에 들고, 초원복집 사건을 전후해서는 박정희와 극한 대립했던 김영삼과 밀착했던 김기춘이다.

이제 김기춘은 박정희 박근혜, 훗날 김영삼이칠푼이‘(2012) 규정하는 박근혜와 본격적으로 함께하게 된다.

‘차떼기 사건’에 대한 한나라당의 사과 광고. 한나라당은 ‘차떼기’로 드러난 본모습을 천막 당사라는 정치 쇼로 분식했다.

2004 총선 열린우리당은 친일 진상 규명법 개정을 추진했다. 김기춘이 법사위원장일 한나라당의 저지 공작으로 누더기가 돼버린 법을 손질해 제대로 과거사 정리 작업을 진행하자는 취지였다.

한나라당은야당 탄압‘ ‘정치 보복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친일·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작업에 기본적으로 부정적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만주군 장교 출신 박정희가 조사 대상에 포함되는 일만은 어떻게든 막으려 점도 크게 작용했다. 친일 진상 규명 작업에야당 탄압등의 이상한 잣대를 들이대며 거품을 것도 부분과 무관치 않았다.

김기춘은나라 전체가 남의 족보를 뒤지고, 자기 족보도 뒤지고, 일본까지 가서 일제 헌병과 부역자 명단을 챙기는 참담한 국가 파괴 행위가 불길처럼 대한민국을 휩쓸 ”(9 20 친일 진상 규명법 개정안 공청회)이라며 개정에 강하게 제동을 걸었다.

그에 앞서 7 15 비공개로 진행된 의원 총회에서는살인죄도 공소 시효가 15년인데, 50년도 지난 가지고 모든 뒤엎어 얻겠다는 것이냐 목소리를 높인 것으로 보도됐다.

과거사 문제가 현안으로 부각되면서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박정희의 유신 독재에 대해 박근혜가 사과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극우 반공 색채를 덜어내는 방향으로 한나라당의 정체성을 재확립해야 한다는 주장과 연결된 목소리였다.

김기춘은정체성 논조는 분명해야지,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서는 된다 공박하며 극우 반공 색채 고수를 강조했다. 또한(정희) 대통령과 (근혜) 대표는 전혀 별개”, “유신 때의 공과를 대표에게 덮어씌우는 것은 된다 박근혜의 방패막이로 나섰다.

김기춘의 주장과 달리, 최태민 문제에서 단적으로 드러난 것처럼 박근혜가 유신 독재의 어둠을 짙게 하는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부정할 없는 사실이다.

X파일 사건에서사이코비난까지

2004 하반기 이후 박근혜의 한나라당은 4 개혁 입법 저지에 주력했다. 김기춘은 그러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005 7 박근혜는 김기춘을 한나라당 부설 여의도연구소 소장에 앉혔다. 부적절한 코드 인사라는 지적에도 박근혜는 김기춘 임명을 밀어붙였다.

김기춘이 여의도연구소장이 그달 삼성·안기부 X파일 사건이 터졌다. 김기춘으로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건과 초원복집 사건을 비교하는 얘기가 곳곳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사건이 터진 직후인 7 22 주요 당직자 회의에서 김기춘은 다른 참석자들과 달리 삼성·안기부 X파일 사건에 대해서는 발언을 삼가는 모습을 보였다.

사건과 관련해 한나라당, 민주노동당 야당은 특검제 실시에 합의하고 8 9 법안을 제출했다. 한나라당에서 야권 공조를 추진한 원내 대표 강재섭 쪽이었는데, 뒤늦게 박근혜가 법안 수정을 요구하며 판을 흔들었다.

김기춘은 역시 박근혜와 함께했다.특검법 공개 부분은 독수독과(毒樹毒果, 위법한 방식으로 수집한 증거는 증거 능력이 인정되지 않는다) 원칙을 어겨, 불법 도청을 수사 자료로 쓰게 된다면 도청을 독려하고 불법 도청에 면죄부를 주는 결과를 낳을 있다 주장했다.

초원복집 사건의 주역다운 모습이었다. 대선 자금을 불법 지원한 삼성 재벌을 비호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주장이기도 했다. 검찰도 독수독과 이론을 내세워 도청을 주로 문제 삼았다.

2006 1 김기춘의 여의도연구소는 ·· 교과서가 좌편향돼 있다는 보고서를 내고, 토론회도 열었다. 뉴라이트 쪽의 왜곡된 주장을 그대로 반영한 내용이었다. 2월에는 색깔론을 앞세워 전교조를 헐뜯는 고발 대회를 열었다. 박근혜는 행사장을 모두 찾아 자리를 지켰다.

이러한 움직임의 연장선 위에서 훗날 박근혜 집권기에 전교조가 법외 노조 처분을 당하고 시대착오적인 역사 교과서 국정화가 강행된다. 4월혁명(1960) 탄생한 교원노조를 5·16쿠데타(1961) 박정희 세력이 짓밟고, 유신 독재 시기에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한 어두운 지난날을 이어받은 행태이기도 하다.

2006 7 여의도연구소장에서 물러난 김기춘은 그해 12 한나라당 의원 총회에서 대통령 노무현을사이코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노무현이 예비역 장성들을 강도 높게 비판한 열린 이날 의원 총회에서는정신병자”(김용갑), “궁예의 말로를 보는 같아 처연한 심정”(김형오) 같은 비난도 나왔다.

2007 대선과 김기춘

2007 1 김기춘은 지역구인 거제의 언론과 인터뷰에서 “4선을 준비하고 있다 밝혔다. 이듬해 총선에도 출마하겠다는 얘기였다. 2004 3선에 성공한 <월간 거제> 인터뷰에서 “3 의원을 끝으로 고향 정치를 마감할 계획이라고 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4 도전에 앞서 김기춘은 대선부터 치러야 했다. ‘한나라당 경선이 본선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한나라당의 집권 가능성이 높은 대선이었다. 그러한 한나라당 후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이명박과 박근혜가 맞붙었다.

김기춘은 박근혜 캠프에서 중책을 맡았다. 우선 5·16장학회(정수장학회의 전신) 장학생 출신답게 상청회(정수장학회 장학금 수혜자 모임) 회원 3만여 명을 관리했다. 그에 더해 박근혜 캠프 법률자문위원장을 맡았다.

박근혜 캠프 법률 지원 특보단장은 대법관 강신욱이었다. 김기춘도, 강신욱도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1991) 관련 있는 사람이다. 사건 당시 김기춘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 라인 상층에 있었고, 강신욱은 서울지검 강력부장으로서 수사에 직접 관여했다. 박근혜 캠프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 하나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경쟁은 치열했다. 양측은 상대의 약점을 물고 늘어졌다. 과정에서 나온 얘기 하나가전과 14이다. 2007 6 박근혜 쪽에서 후보가 10 국회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전과 14이라고 밝혔다이명박 쪽은 이를 부인했지만, ‘전과 14얘기는 오늘날까지도 이명박과 관련해 심심찮게 거론된다.

2007년 대선의 승자는 “전과 14범”으로 지목된 이명박이었다. 사진은 2008년 2월 18일 비공개 회동한 당선인 이명박과 대통령 노무현. ⓒe영상역사관

한나라당 경선의 분수령은 후보 검증 청문회였다. 박근혜 쪽에서는 최태민 문제, 정수장학회 문제 등을 방어하고 이명박의 약점을 부각해야 했다. 그러한 검증 청문회 준비를 김기춘, 강신욱, 김재원(모두 검사 출신이다) 주로 맡은 것으로 보도됐다.

8, 이명박이 경선에서 승리하며 한나라당 후보가 됐다. 이명박 쪽에서 보면, 대선에서 승리할 때까지는 친박계를 일정하게 끌어안는 것이 필요했다. 경선이 끝난 김기춘은 한나라당 경남도당 위원장으로 추대됐고, 경남 지역 선거대책위원장으로서 대선을 치르게 된다.

그해 12, 대선은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싱겁게 막을 내렸다. 10년에 걸친 야당 생활을 끝맺게 됐지만, 김기춘은 좋아할 수만은 없는 처지였다. 대권을 잡은 사람이 박근혜가 아닌 이명박이기 때문이었다.

4 계획 좌절, 국회의원 12 만에 재산은 2.3배로

아니나 다를까, 김기춘의 4 도전 계획은 장애물을 만났다. 총선(2008 4) 공천을 앞두고 65·3 이상을 겨냥한 이른바 영남 물갈이론이 제기됐다(김기춘은 69, 3).

또한 김영삼 아들 김현철이 2004 총선 때와 마찬가지로 거제 출마를 선언했다. 김영삼 집권기에소통령으로 통한 실세였으나 결국 구속됐던 김현철을 이명박 쪽에서 밀어주는 아니냐는 얘기가 돌았다.

김기춘 쪽에서 보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으나, 김현철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해소됐다. 2004년에 그랬던 것처럼 김현철은 이번에도 출마 의사를 접었다. 하지만 안심할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한나라당을 ‘MB으로 재편하려 이명박 구상에서 김기춘은 여전히 걸림돌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김기춘은 2008 2 공천 신청 기자 회견을 자청했다. 김기춘은경선 박근혜 후보를 지원했다고 해서 옹졸하게 보복성 낙천을 하지는 않을 이라며 이명박 쪽에 견제구를 던졌다. MB 출마 희망자 가운데 이상득(이명박의 )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인사들이 있다는 점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이번에 당선되면국회의장단에 출마하겠다 밝혔다.

국회의장단 출마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해 3 김기춘을 비롯한 친박계 다수가 공천에서 탈락했다. 김기춘은 무소속 출마, 친박연대 합류 가능성 등을 저울질하다가 결국 불출마를 선언했다. 불출마 선언문에서이유도 없고 납득할 수도 없는 탈락이라는 불만도 토로했다.

2009 발간된 회고록에서도 2008 공천 탈락에 대한 불만을 빠뜨리지 않았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10 동안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도 올바른 자유 민주주의 정부를 세우려고 열심히 투쟁하여 드디어 목표를 이루어놓았는데, 상을 주기는커녕 공천 탈락이라는 불명예를 안겨줬다.”

2013년 11월 14일 당시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이 국회운영위원회에서 열린 청와대 비서실 국정감사에서 여야 의원들의 의사진행 발언을 들으며 여유있는 표정을 짓고 있다. ©오마이뉴스

그러나 야당 생활 10 동안 김기춘이 정권의온갖 핍박 받았다고 인정할 만한 증거를 찾기는 어렵다. 그와 달리 김기춘의투쟁 민주주의 진전, 한반도 긴장 완화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길과는 반대 방향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많다.

2008 3월말 17 국회의원들의 재산 총액이 공개됐다. 공개된 김기춘의 재산은 41 5,800여만 원이었다(전체 25). 1996 처음으로 금배지를 신고한 재산(17 9,900 ) 2.3배였다. 김기춘의 국회의원 생활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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