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김기춘은 국회의원 생활을 마무리했다. 서울 세종로에 사무실을 낸 변호사 김기춘은 농심 법률 고문을 맡았다. 2009년에는 대한통운 사외 이사로 이름을 올렸다. 이 무렵 장관, 검찰총장 같은 고위직 출신 또는 전직 국회의원들이 여러 기업의 사외 이사로 대거 선임되는데 김기춘도 그중 한 명이었다. 같은 해 김기춘은 한국에너지재단 이사장도 맡았다.
2010년 김기춘은 다시 중앙 정치 쪽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나라당 상임 고문(3월), 전당 대회 선관위원장(6월)으로 연이어 위촉됐다. 11월에는 국회의장 자문 기구인 의정 활동 강화 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위촉된 데 이어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에 임명됐다.
“다른 당직은 몰라도 윤리위원장을 (초원복집 사건의 주역 김기춘이) 맡는 것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왔지만, 임명은 철회되지 않았다.
2010년에 이미 김기춘은 김용환(유신 독재 시기 재무부 장관), 김용갑(육사, 3선 의원 출신), 최병렬(<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 전 한나라당 대표) 등과 함께 박근혜 “고문 그룹”의 일원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7인회로 알려지게 되는 이 그룹의 나머지 3명은 안병훈, 현경대, 강창희다.
안병훈은 <조선일보>에서 편집국장을 거쳐 부사장을 지냈다. 현경대는 5선 의원 출신으로 상청회(정수장학회 장학금 수혜자 모임) 회장을 지냈다. 강창희는 하나회 출신으로 2012년 총선 후 6선 의원으로서 국회의장을 맡게 된다.
이들의 바람대로 2012년 대선을 거쳐 박근혜가 대권을 잡았다. 이명박 정권과 마찬가지로 박근혜 정권도 민주주의를 짓밟았다. 그러한 박근혜 정권의 중심부에 김기춘이 있었다.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화려하게 복귀, 3차 전성시대 개막
박근혜 정권 출범 직후인 2013년 3월 초 <부산일보>에 실린 인터뷰에서 김기춘은 “우리(필자 : 7인회)의 역할은 박근혜 대통령을 만든 것으로 끝났다”고 말했다. 더 이상 공직을 맡는 일은 없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이 말의 유효 기간은 5개월에 불과했다.
그해 8월, 74세의 김기춘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권력 중핵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 유신 독재 시기,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으로서 ‘검찰 공화국’ 구축의 주역이었던 노태우 집권기에 이은 3차 전성시대의 개막이었다.
김기춘은 7인회 구성원 중 유일하게 대통령 박근혜를 근접 보좌했다. ‘왕실장’, ‘기춘대원군’으로 불릴 만큼 그 영향력은 막강했다. “인사·정책·정무 등 국정 곳곳에 그의 손길이 안 미치는 곳이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김기춘 비서실장 취임 직후 박근혜 정권은 검찰총장 채동욱을 찍어내는 데 성공했다. 채동욱이 정권의 눈엣가시가 된 건 국정원의 2012년 대선 불법 개입 사건에 대한 수사 때문이었다. 사건의 핵심 관계자인 원세훈 전 국정원장,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에 대해 원칙대로 법을 적용하려다 단단히 찍혔다.
채동욱 찍어내기 공작은 김기춘 비서실장 취임 전에 시작됐다. 채동욱이 원세훈, 김용판 처리 문제로 법무부 장관 황교안과 갈등을 겪은 후 검찰총장 교체론이 나왔다. 2013년 7월 국정원은 채동욱과 관련, “외부의 힘에 의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박근혜에게 보고했다.
그러한 가운데 김기춘이 비서실장에 취임했다. 얼마 후부터 대검찰청 앞에서 “종북 좌파 총장 물러나라”는 시위가 전개됐다. 2017년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채동욱은 이렇게 밝혔다.
“대충 감이 왔다. ‘김기춘 카드’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곧 검찰총장이 교체됐다. 채동욱 찍어내기는 박근혜 정권이 2012년 대선 불법 개입 진상이 드러나는 것을 얼마나 꺼렸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는 대선 불법 개입의 최대 수혜자가 박근혜였다는 점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원세훈 등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도 그런 면이 나타나는데, 그중에는 김기춘과 관련된 의혹도 있다. 김동진 부장 판사 징계 문제다. 2014년 9월 12일 김 판사는 원세훈에게 선거법 무죄 판결이 선고된 것을 비판하는 글을 법원 내부 통신망에 올렸다. 국정원이 2012년 대선에 불법 개입한 사실이 객관적으로 드러났는데도 “담당 재판부만 ‘선거 개입이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린 것은 지록위마”라고 지적한 글이었다.
2주 후 수원지법이 김 판사에 대한 징계를 대법원에 청구했다. 법관의 품위를 손상했다는 등의 이유가 제시됐다. 2014년 12월 대법원은 김 판사에게 2개월 정직 처분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김기춘이 김 판사에 대한 조치 필요성을 언급한 것으로 풀이되는 내용이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던 김영한의 업무 수첩에 적혀 있다. 이 수첩의 그해 9월 22일 부분에는 “長(장)”이라는 표시 옆에 “비위 법관의 직무 배제 방안 강구 필요(김동진 부장)”라고 돼 있다. “長(장)”은 김기춘 비서실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로부터 4일 후 징계가 청구됐다. 이 징계가 “長(장)”의 언급과 관련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대법원은 이를 부인했다.
박근혜 정권의 폭주와 비서실장 김기춘
거짓, 조작, 공안 통치로 점철된 박근혜 정권의 민낯은 김기춘 비서실장 취임 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 김기춘 비서실장 재임기에 전교조는 법외 노조 통보를 받았고, 통합진보당은 해산됐다. 블랙리스트가 광범위하게 작성·실행됐고, ‘세월호 죽이기’ 공작이 자행됐다.
또한 <세계일보>의 ‘정윤회 문건’ 보도(2014년 11월)를 통해 비선 실세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지만, 곧 덮였다. ‘문건 유출은 국기 문란’이라는 왜곡된 지침을 박근혜가 내리고, 검찰이 그것을 충실히 따르면서 그렇게 됐다.
이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것으로 꼽히는 사람이 청와대 민정비서관이었던 우병우다. 최고 권력자가 원하는 대로 사건을 덮는 “정치 감각이 부족”했던 민정수석 김영한과 달리 그 휘하의 우병우는 그런 쪽으로 역량을 발휘한 것으로 얘기된다.
그런 우병우를 김기춘이 눈여겨보고 지원한 것으로 보도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영한이 민정수석에서 물러나고 우병우가 후임으로 전격 발탁된다. 우병우는 박근혜의 신임을 바탕으로 국정 전반에 깊숙이 관여하며 국정 농단의 주역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김기춘 비서실장 재임기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인사 문제다. 청와대 인사위원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기춘 비서실장 시절 박근혜 정권은 총리 후보자의 연이은 낙마와 장관 후보자의 사퇴 등으로 ‘인사 참사’라는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황호택은 김기춘 비서실장 취임 직후 쓴 칼럼에서 김기춘이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연산군 밑에는 채홍사들이 들끓고 세종대왕 옆에는 집현전 학자들이 모였다.”
왕정 시대의 통치와 민주공화국의 정치를 단순 비교할 경우 무리가 있을 수 있지만, 이런 물음은 가능하다. 박근혜 집권기의 인사는 ‘연산군–채홍사’ 조합과 ‘세종대왕–집현전 학사’ 조합 중 어느 쪽에 가까울까? 그 답은 ‘인사 참사’라는 여론의 질타에서 찾을 수 있다.
몰락으로 귀결된 3차 전성시대
2015년 2월, 김기춘은 이병기에게 비서실장 자리를 넘기고 물러났다. 두 달 후 성완종 리스트가 세상에 나왔다. 김기춘에게 건넸다는 검은돈과 관련해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은 시점(“2006년 9월 …… VIP(박근혜)를 모시고 벨기에와 독일에 갈 때”), 액수(“10만 달러를 바꿔서”), 전달 장소(“롯데호텔 헬스클럽”)까지 특정해 구체적인 증언을 남겼다.
김기춘으로서는 위기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 사건이 터지자 2015년 4~5월 김기춘이 측근들을 시켜 과거 업무나 행적이 담긴 서류들을 모두 찢은 뒤 내다 버리게 했다고 <한국일보>가 보도했다. 이때 버린 상자가 4~5개에 달했다고 한다.
수사에 대비해 관련 자료를 파기했다는 말인데, 결과를 놓고 보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검찰은 김기춘을 소환하지도 않았다. 한 차례 서면 조사만 한 후, 공소 시효가 완성됐다며 김기춘에게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렸다. 김기춘의 후예들이 똬리를 튼 조직다운 모습이었다.
김기춘 비서실장 퇴임 후에도 박근혜 정권의 폭주는 계속됐다. 메르스 사태를 통해 무능함을 또다시 드러낸 것에 더해 시대착오적인 역사 교과서 국정화, 한일 ‘위안부’ 야합, 개성공단 폐쇄 등을 강행했다. 그러다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촛불 항쟁을 거쳐 몰락했다.
그와 함께 김기춘의 3차 전성시대도 몰락으로 귀결됐다. 성완종 리스트와 관련해서는 검찰이 면죄부를 준 덕분에 위기를 넘겼지만, 김기춘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촛불 항쟁을 거쳐 탄생한 특검까지 피해 가지는 못했다. 2017년 1월, 김기춘은 박영수 특검에 의해 구속된다.
“대통령과 비서실장이 관심 있는 일“블랙리스트
박근혜 세력은 민주주의를 거리낌 없이 짓밟았다. 그들에게는 그런 것들보다 최고 권력자의 심기 경호가 우선이었고, 극우 반공 체제 강화가 훨씬 중요했다. 그런 틀을 구축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김기춘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블랙리스트 문제와 ‘세월호 죽이기’를 통해 이 부분을 살펴보자. 전자는 김기춘이 죄수복을 입게 된 직접적인 계기이고, 후자는 박근혜 정권의 다양한 반민주 행태 중에서도 특히 많은 국민의 가슴을 멍들게 만든 대표적인 공작이다.
정권에 비판적이거나 정권의 눈에 거슬리는 일에 관련됐다는 이유로 정부 지원에서 배제하고 등급을 나눠 관리한 것, 그것이 바로 블랙리스트다. 청와대 쪽의 심기를 상하게 하면 반체제, ‘종북’으로 몰려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구조였다.
주요 표적은 문화 예술계였다. 명단으로 확인된 블랙리스트 대상자만 9,473명에 이른다. 명단에 오른 계기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세월호 참사 진실 규명 촉구, 다른 하나는 선거 때 야당 후보 지지였다. 그러나 블랙리스트 지침이 적용된 건 그 두 가지만이 아니다.
영화 쪽을 예로 들면, 2014~2016년에 박근혜 정권이 문제 영화로 낙인찍고 지원 사업에서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를 배제한 사례가 27건(중복 배제가 있어 작품 수는 17편)에 이르렀다. 세월호, 한진중공업, 밀양 송전탑, 강정 해군 기지, 용산 참사, 국가보안법, ‘위안부’, 성 소수자 문제 등을 다룬 영화들이었다. 청와대–국정원–문체부–영진위가 짝짜꿍해 벌인 짓이었다.
많은 영화인들과 영화를 사랑하는 시민들의 노력에 힘입어 해외에서도 인정받은 부산국제영화제가 망가진 것도 블랙리스트 문제와 깊은 관계가 있었다. 세월호 참사, 천안함 사건 등을 다룬 영화를 상영한 것을 문제 삼아 박근혜 정권은 부산국제영화제를 망가뜨렸다.
박근혜 정권의 블랙리스트 작업은 이명박 정권의 민간인 사찰과 맞닿아 있다. 더 올라가면, 군사 독재 시절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되찾으려 한 이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고 감옥에 가둔 것으로도 모자라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밥줄까지 끊으려 했던 것과 만나게 된다.
그러한 블랙리스트 문제의 중심에 박근혜와 김기춘이 있었다. 이는 김기춘 비서실장 밑에서 일한 박준우 전 정무수석의 법정 증언(2017년 11월 28일)에서도 잘 드러난다. 박준우는 업무를 인수인계할 때 후임 정무수석 조윤선에게 “‘정무수석실이 (정부 보조금 배제) TF를 주관했고 최종 보고까지 됐지만 계속 챙겨야 한다. 대통령과 비서실장이 관심 있는 일이니 챙겨야 한다’고 설명한 것이냐”는 특검 측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김기춘의 블랙리스트 변명 그리고 화이트리스트
박준우의 증언 이외에도 청와대가 블랙리스트 작업의 사령탑이었음을 보여주는 여러 증거가 세상에 드러났다. 그럼에도 김기춘은 어떻게든 법적 처벌을 면하려 안간힘을 썼다.
블랙리스트 사건 재판에서 주요 범죄 혐의에 대해 “알지 못한다”, “기억이 없다”며 거듭 발뺌했다. 혐의를 부인하며 “노구를 이끌고 봉사를 하러 (청와대에) 들어갔을 뿐”이라는 주장도 내놓았다. 그러나 1심에서도, 2심에서도 유죄 판결을 피할 수는 없었다.
흥미로운 건, 발뺌하는 건 변함이 없지만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그 방식에서는 변화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1심 재판 과정에서 김기춘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문체부) 실무자들이 이름을 넣고 빼고 해서 안타깝다”는 식으로 책임을 떠넘겼다. “누군가는 배제될 수밖에 없는데 (문체부) 말단 직원이 자기 기준으로 삭감한 게 범죄냐”고 항변하기도 했다.
2심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항소심 재판 과정에서 김기춘은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취지는 아니라는 말을 드리고 싶다”고 얘기했다. “집행하는 단계에(서) 어떻게 되고 있었는지는 제가 알지 못하고 기억이 없는 부분도 많다”는 것일 뿐이라는 주장이었다.
항소심 최후 진술에서는 “지휘관으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블랙리스트 사건이 “자유 민주주의 수호라는 헌법적 가치를 위해 직무를 수행하다 벌어진 일”이라고 강변했다.
블랙리스트와 짝을 이루는 것이 화이트리스트다. 정권에 편향된 극우 반공 성향 단체들에 대규모 자금을 지원해준 것, 그것이 바로 화이트리스트다. 박근혜 집권기에 그 문을 활짝 열어준 인물로 김기춘이 꼽힌다. 2013년 12월말 김기춘 비서실장이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좌파들은 잘 먹고 잘사는데 우파는 배고프다”며 이른바 우파 단체들에 대한 자금 지원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하면서 그렇게 된 것으로 얘기된다.
청와대의 주문에 따라 전경련을 통해 2014년부터 2016년 10월까지 그러한 단체들에 68억 원이 지원된 것으로 특검 조사에서 드러났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68억 원과 별개로, 박근혜 집권기에 국정원 주도로 재벌들이 그러한 단체들에 수십억 원을 지원한 사실도 드러난다. 박근혜 정권은 재벌 위주 정책을 펴고, 재벌들은 정권의 요구대로 극우 반공 성향 단체들에 돈을 대주고, 돈을 받은 단체들은 정권과 재벌에 편향된 활동을 전개하는 악순환 구조였다.
“좌파들은 잘 먹고 잘사는데 우파는 배고프다”는 말도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미 이명박 집권기 때부터 극우 반공 성향 단체들은 큰 규모의 자금을 지원받았다. 이명박·박근혜 집권기에 그러한 단체들에 불법 지원된 것으로 의심되는 금액은 230억 원(2017년 10월 집계 기준)에 이른다. 극우 반공 성향 단체 관계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좋은 시절이었다.
박근혜 정권이 자행한 국가 범죄, ‘세월호 죽이기’ 공작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다. 그 밑바탕에는 인명의 소중함을 무시하고 돈벌이에 혈안이 된 자본의 탐욕이 있었다. 자본의 탐욕을 통제하기는커녕 방관하거나 더 나아가 부추겨온 국가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수많은 승객이 희생되고, 그렇지 않은 승객 중 상당수는 알아서 탈출해야 했던 현실은 정권의 무능, 국가의 부재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박근혜 정권은 ‘세월호 죽이기’ 공작을 자행했다. 희생자와 그 유가족을 두 번 죽이는 것은 물론 생존자에게도 또 다른 고통을 강요하는 국가 범죄였다.
‘세월호 죽이기’ 공작은 정권 차원에서 조직적·전방위적으로 자행됐다. 그만큼 집요하고 지독했다. 진상 규명 가로막기, 자료 조작, 유가족 사찰 등 그 방식도 다양했다.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유가족을 보상금에 눈먼 사람들인 것처럼 몰아가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또한 세월호 특조위를 혈세 낭비 조직으로 매도했다. 특조위 해체를 강변한 일부 단체의 시위도 박근혜 정권과 무관치 않았다.
“박근혜는 내려가고 세월호는 올라오라“는 많은 사람의 염원은 촛불 항쟁을 거쳐 현실이 됐다. ‘세월호 죽이기’ 공작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사실이 밝혀졌다. 전모가 드러났다고 볼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세월호 죽이기’ 공작의 실체만 해도 총체적으로 정리하려면 책 한 권 분량은 족히 필요할 것이다. 여기서는 김기춘과 관련된 부분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김영한 업무 수첩을 통해 본 김기춘과 세월호
‘세월호 죽이기’ 공작과 김기춘이라는 문제를 살필 때 주요하게 참고할 만한 자료가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업무 수첩이다. 2014년 6월 중순부터 2015년 1월 초까지 업무 관련 기록이 담겨 있는데, 세월호 문제에 대한 박근혜 정권의 속내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사항이 많이 있다.
2014년 5월 19일 대통령 박근혜는 세월호 참사 관련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필요하다면 특검을 해서 모든 진상을 밝힐 것이며, 진상조사위원회를 포함한 특별법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는 내용이었다. 낯 두꺼운 거짓말이라는 것이 곧 드러났다. 박근혜 정권은 진실 규명을 막고, 세월호 실소유주 유병언 쪽에 모든 책임을 지움으로써 정권의 책임을 회피하는 데 주력했다.
이 점은 김영한 업무 수첩에서도 확인된다. 유병언 일가 관련 지시 사항 등이 수십 가지 나오는데, 그중 상당수는 김기춘 비서실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되는 “長(장)”이라는 표시와 함께 등장한다. 김영한 업무 수첩을 따라가며 김기춘과 세월호 문제를 더 짚어보자.
▲ 수첩의 7월 13일 부분에는 “세월호 특별법 – 국난 초래 – 法務部(법무부) 黨(당)과 협조 강화”, “좌익들 국가 기관 진입 욕구 强(강)”이라고 기록돼 있다. 역시 “長(장)”이라는 표시와 함께 나온다. 세월호 특별법과 특조위가 탄생하기 전부터 박근혜 정권이 그것을 얼마나 비뚤어진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 7월 18일 부분에는 세월호 참사 그날 박근혜의 7시간과 관련, “알지도 알려고도 않는다. 자료 제출 불가”라고 기록돼 있다. 이것도 “長(장)”이라는 표시와 함께 나온다. 박근혜의 7시간과 관련해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지침은 8월 9일 부분에도 등장한다.
▲ 8월 22일 부분에는 “長(장)”이라는 표시와 함께 이렇게 기록돼 있다. “세월호 유가족(학생 유가족) 외 기타 유가족 요구는 온건 합리적. 이들 입장 반영되도록 하여 중화.”
이 부분은 세월호 특조위로 탄생하게 되는 조직의 수사권, 기소권 문제와 관련돼 있었다. 진상 규명을 위해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유가족과 야당 쪽에서 제기됐으나, 박근혜 정권과 여당은 거세게 반발했다.
박근혜 정권과 여당이 그렇게 나온 탓에 특별법 제정 자체가 미뤄지면서, 유가족들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리게 됐다. 수첩의 8월 22일 부분은 유가족들 사이의 그러한 틈새를 정권에 유리한 방향으로 활용하라는 지시로 풀이된다.
▲ 8월 23일 부분에도 “長(장)”이라는 표시와 함께 유가족 관련 내용이 있다. “자살 방조죄. 단식(생명 위해 행위) 단식은 만류해야지 부추길 일 X. 국민적 비난이 가해지도록 언론 지도.”
이 시기에 유가족들은 제대로 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단식 농성 중이었다. ‘유민 아빠’ 김영오 씨는 8월 28일까지 46일간 단식하며 목숨을 걸고 호소했다. 그것에 대해 “국민적 비난이 가해지도록 언론 지도”를 하라는 기막힌 지시로 해석된다.
▲ 9~10월 부분에는 검찰 수사 결과 발표(10월 6일), 감사원 감사 결과 발표(10월 10일) 관련 사항이 거듭 나온다. 전자의 경우 “발표문(10/6)-초동 대응 미숙(정부) 용어.→구체적 지적”, 후자의 경우 “감사원 감사 결과 발표–미리 받아 검토, comment” 같은 식이다.
정권에 불리한 사항은 빼도록 검찰 수사 결과 및 감사원 감사 결과를 사전에 마사지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검찰 발표에는 “초동 대응 미숙(정부)” 부분이 담기지 않았다. 또한 감사원 감사 결과 발표 자료를 청와대에서 미리 살펴보고 내용을 뜯어고쳤다는 사실이 나중에 드러난다.
이 문제와 관련, 수첩의 10월 13일 부분에는 “長(장)”이라는 표시와 함께 “수·감·조사 결과 발표 시 사전 내용 파악하여 정무적 판단, 표현 등 조율토록 할 것→유념, 검찰, 감사원”이라고 기록돼 있다.
▲ 10월 27일 부분에는 “長(장)”이라는 표시와 함께 “세월호 인양–시신 인양 X. 정부 책임, 부담”이라고 기록돼 있다. 실종자 및 세월호 선체 인양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김기춘은 2016년 국정 조사 청문회에서 “시신을 인양하지 않으면 오히려 정부에 부담된다는 취지였다”고 주장했다.
조작된 30분, 여당 추천 특조위원, 화이트리스트와 ‘세월호 죽이기’
김영한 업무 수첩은 김기춘의 비서실이 정권 보위를 위해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것을 막고자 얼마나 노심초사했는가를 느끼게 해준다. 그런데 이 수첩에 “長(장)”이라는 표시와 함께 기록된 것이 김기춘과 세월호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세 가지만 더 살펴보자.
첫 번째는 세월호 참사 최초 보고 시간 조작 문제다. 박근혜 집권기에 청와대가 참사 당일 대통령에게 최초로 상황을 보고한 시점을 실제보다 30분 늦춰(오전 9시 30분→10시) 발표하고 그것에 맞춰 참사 6개월 후 공문서까지 조작한 사실이 2017년 10월 드러났다.
인명 구조의 골든 타임을 놓친 것과 관련해 박근혜의 책임을 어떻게든 덜어보고자 조작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쏟아졌다. 참사 당일에도, 공문서가 조작된 때에도 비서실장은 김기춘이었다. 김기춘이 모르는 상태에서 이러한 조작이 이뤄질 수 있었을까?
두 번째는 여당 추천으로 세월호 특조위에 들어온 인사들과 관련된 문제다. 이들은 사사건건 특조위 활동을 방해했다. 2015년 1월 새누리당 원내 수석 부대표 김재원이 특조위를 “세금 도둑”으로 매도하자(얼마 후 특조위를 “탐욕의 결정체”라고 또다시 매도했다), 이들은 그러한 터무니없는 낙인찍기에 맞장구치며 특조위를 내부에서 교란했다. 여당에서 추천한 특조위원들의 방해 공작은 그 후에도 끊임없이 계속된다.
그러한 특조위원 선정과 관련된 내용이, “長(장)”이라는 표시는 없지만 김영한 업무 수첩의 11월 28일 부분에 나온다. “세월호 진상 조사위 17명–부위원장 겸 사무총장, (정치 지망생 好). *세계일보 공격 방안 *②석동현 ①조대환.”
여당 추천으로 특조위에 들여보낼 인사를 고르는 문제를 청와대에서 주의 깊게 챙겼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진상 규명에 헌신할 사람들을 특조위에 보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그 반대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비서실장 김기춘이 이 문제와 무관하다고 볼 수 있을까?
처음에 여당 추천으로 특조위에 발을 들인 이들은 김영한 업무 수첩에 언급된 석동현, 조대환에 더해 고영주, 차기환, 황전원까지 5명이었다. 이 가운데 특히 고영주 사례는 박근혜 정권이 특조위원으로 어떤 인물을 원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고영주는 영화 <변호인>의 소재가 된 공안 조작 사건인 부림 사건(1981년)을 담당한 공안 검사 중 한 명이다. MBC 보도가 망가져 대다수 시민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던 시기에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기도 했다.
김영환 업무 수첩에 “정치 지망생 好(호)”라고 기록된 것에 걸맞게 석동현과 황전원은 2015년 새누리당에 입당했다. 조대환은 2016년 말 박근혜 정권의 청와대 정무수석이 됐다. 차기환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후 문고리 3인방 중 한 명인 정호성의 변호를 맡게 된다.
세 번째는 화이트리스트와 ‘세월호 죽이기’의 관련성이다. ‘세월호 죽이기’ 움직임은 극우 반공 성향 단체 등에서도 심하게 나타났다. ‘유민 아빠’ 김영오 씨가 46일간 단식한 직후에도 그러했다. 일베 회원 등은 단식 농성을 하는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들 앞에서 ‘폭식 투쟁’이라는 것을, 박근혜 제부 신동욱은 ‘세월호 단식 실체 규명 실험 단식’이라는 것을 자행했다.
조직적·지속적으로 진실 규명을 가로막은 단체도 있었다. 예컨대 어버이연합의 경우 2014년 4~11월에 세월호 진실 규명 반대 집회를 39번이나 열었다. 이 과정에서 북한 이탈 주민 1,200여 명을 돈을 주고 동원한 사실도 드러났다.
이러한 시위는 그 내용도 문제이지만, 박근혜 정권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 관제 데모라는 지적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도 큰 문제다. 관제 데모의 윗선으로 국정원과 함께 청와대 쪽, 다시 말해 조윤선과 김기춘 등이 지목됐다. 어버이연합의 세월호 진실 규명 방해는 박근혜 정권 쪽에서 왜 화이트리스트 작업에 관심을 보였는가를 느끼게 하는 사례 중 하나다.
‘세월호 죽이기’와 비국민, 그리고 ‘무좀론’
‘세월호 죽이기’ 공작은 김기춘이 비서실장에서 물러난 후에도 계속됐다. 김기춘이 비서실장일 때 틀이 잡힌 ‘세월호 죽이기’ 기조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에 더해 박근혜는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대통령이 세월호의 ‘세’ 자도 듣기 싫어한다(고 한다)”(박종운 전 세월호 특조위 상임위원)는 것이 결코 지나친 얘기가 아님을 거듭 입증했다.
참사의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민주공화국의 온전한 주권자로 여겼다면 ‘세월호 죽이기’라는 국가 범죄를 자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세월호 죽이기’의 밑바탕에는 그런 이들을 주권자가 아닌 비(非)국민, 즉 제압해야 할 국가 내부의 적으로 간주하는 논리가 깔려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비국민은 이른바 불순분자로부터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마녀사냥을 정당화하는 논리이자 그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소름 돋는 규정이다. 빨갱이 사냥이 난무하며 수십 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당시 학살자들의 기본 논리도 ‘저자들은 국민 자격이 없는 비국민’이라는 것이었다.
5·16쿠데타(1961년) 후 자행된 제2의 학살도 그런 논리와 무관치 않다. 그 시기에 박정희 세력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의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요구하는 유족회 관계자들을 용공분자로 몰아 탄압했다. 피학살자 합동 분묘를 파헤쳐 유골 상자를 부수고 위령비를 정으로 파괴하기까지 했다.
억울한 죽음의 진실 규명을 가로막고, 국가의 책임 인정을 거부하며, 진상 규명 요구를 국가와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하고 희생자 유가족을 공격·탄압했다는 점에서 제2의 학살은 ‘세월호 죽이기’ 공작을 떠올리게 만드는 면이 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5·16쿠데타 후 제2의 학살을 체제 수호와 질서 유지를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고(심지어, 더 나아가 잘한 일이었다고) 여기는 것은 비국민 논리를 내면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극우 반공 정권에 순종하면 ‘선량한 국민’, 그렇지 않으면 ‘위험한 비국민’으로 가르고 후자를 체제 위협 세력으로 바라보기 마련이다. 이러한 사고는 ‘세월호 죽이기’ 공작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세월호 참사의 경우 정권이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하는 사안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7시간 문제까지 지속적으로 거론됐다. 그런 점에서, 세월호 참사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박근혜 정권 눈에는 ‘위험한 데다 발칙하기까지 한 비국민’으로 비치지 않았을까? ‘세월호 죽이기’ 공작이 집요하고 지독했던 이유를 이 점과 연결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김기춘에게도 비국민 논리는 낯선 것일 수 없다. 극우 반공주의에 충실한 삶을 살았을 뿐 아니라 공안 통치의 시각을 견지해왔기 때문이다. 비국민 논리는 극우 반공주의, 공안 통치의 시각과 잘 맞아떨어진다. 세월호 문제에서 김기춘이 보인 모습이 이런 점과 무관할까?
김기춘은 검찰총장일 때 ‘무좀론’을 이야기했다고 회고록에 썼다. “공산주의자들은 무좀과 비슷”해서 “뿌리를 뽑지 않으면, 또 언제 독버섯처럼 돋아날는지 모른다”는 주장이었다. 따라서 “그만큼 끊임없는 사상 투쟁, 국민의 사상 무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이라고 쓰여 있지만, 한국 현대사를 살펴보면 “무좀”으로 규정된 대상은 ‘비국민’으로 찍힌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공산주의와는 무관한 사람들이 조작 간첩으로 제조된 숱한 사례에서도 이 점은 잘 드러난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김기춘의 ‘무좀론’에서 ‘세월호 죽이기’ 공작과 블랙리스트 문제를 떠올리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극우 반공주의에 근거한 ‘공안통’ 김기춘에게 세월호 문제는 박멸해야 할 또 다른 “무좀”으로 비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