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차인은 계약 기간이 끝났는데도 건물을 비워주지 않았다. 임대인은 소송을 제기했다. 임차인은 구두연장합의 등을 주장하며 억울하다고 했지만 증거가 없었다.
판사에게 이 사건은 ‘5분 재판’ 한두 번 진행한 뒤 “간단하게 판결을 써서 쳐내면” 끝나는 일이었다. 빠른 사건 처리로 근무평정에도 도움이 될 듯했다. 차성안 판사는 그 사건을 쉽게 치워버리지 않았다.
소송 당사자에게, 특히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에게 ‘간단한 재판’은 없다. 5분 재판에 누군가의 죽느냐, 사느냐가 걸려 있을 수도 있다. 빠른 처리보다 소송 당사자들이 충실한 재판을 받아 결과에 승복하는 일이 중요했다.
차성안 판사는 5분 재판을 하지 않기로 했다. 몇 차례 기일을 열어 양쪽에게 증거를 모으도록 했다. 양쪽 의견을 최대한 듣고, 마지막엔 1시간 동안 토론을 했다. 서로 고성이 오가기도 했지만 합의 조정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피고가 돈을 받지 않고 나가되 기간을 몇 달 주고, 새로운 임대차 계약금조로 보증금 일부를 원고가 먼저 지급해주는” 것으로 말이다.
5분 재판 한두 번, 길게 잡아도 30분이면 끝내버릴 수 있는 사건을 차성안 판사는 허투루 다루지 않았다. 얼마 뒤, 임차인(피고)이 차 판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임대인의 처사에 분노와 원망만을 하였을 뿐 제 자신의 잘못을 느끼지 못했던 점을 재판장님께는 이해시켜주셨으며 못난 제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주신 점 깊이 감사드립니다.”
피고, 특히 소송에 휘말린 일반 서민에게 이런 말을 듣는 판사는 몇 명이나 될까? 차성안 판사(현 사법정책연구원 연구위원)는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에서 일할 때 ‘좋은 재판’을 하려 많이 노력했다. 그의 노력과 고민은 이렇게 요약된다.
5분 재판을 누가 승복합니까?
2015년 <시사인> 제416호에는 위의 제목으로 차 판사의 글이 실렸다. 한 대목은 이렇다.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에서 지난 5개월간 민사단독 재판장으로서 매우 불완전한 형태이지만 실험을 해보고 있습니다. 모든 주장·입증 방법을 채택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건 초기부터 적극적인 석명준비 명령을 합니다. 가능한 한 모든 주장·입증을 1심에서 하도록 유도하고, 통상 변론 종결 후나 판결에 대비해 이루어지는 철저한 기록 검토를 변론기일 전마다 합니다.
이를 토대로 잠정적 결론을 쟁점별로 제시하고 의견을 듣는 식으로 재판 모델을 운영했더니 조정화해율·종국률·상소율이 크게 좋아졌습니다. 판결의 결론을 내가는 과정이 투명화된 것이 승복률을 높이는 주요 이유가 된 듯합니다.”
불가피하게 송사에 휘말린 사람은 이런 재판을 받길 원할 거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차 판사의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러나 더 이상 이 모델을 운영할지 고민 중입니다. 변론 전날 밤을 대부분 새우게 되면서 몸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졌고, 변론 시간 확보를 위해 야근과 주말 근무가 더 늘어났으며, 사건처리율이 떨어졌습니다. (중략)
주 단위 근로시간으로 보면, 얼마 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법원 직원분에게 과로사를 인정한 근거가 된 월 53시간 초과근무(한 달 4주, 1주 5일 기준으로 산정하면 1주 13.25시간, 1일 2.65시간)를 훌쩍 넘기는 경우가 많고, 밤샘 근무가 반복되는 패턴입니다.”
좋은 재판을 위해 야근과 주말 근무를 하던 그때, 차 판사 주변에선 “섬뜩하고 소름끼치”는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감시를 받고 있었다. 감시자는 그의 친척과 군산지원장까지 활용했다. 이들은 짜여진 각본대로 움직였다.
그는 감시를 받았다
감시자는 현재 40대인 차 판사의 20대 대학시절까지 추적했다. 그의 가족사, 성격, 대학 시절 활동까지 사찰했다. 한마디로, 차 판사를 탈탈 털었다.
– 재판 준비에 매우 철저한 성실한 성격의 소유자. 사건 메모를 하다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였다고 함.
– 서울대 도서관에서 고시공부를 하던 중에도 학내 성폭력 문제 등의 사안에 대하여 장문의 대자보를 쓰면서 논쟁을 하는 활동을 함. 비주류 활동가 성향.
– 2002년 고시공부 중 장애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후부터 장애인 문제 개선을 위한 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
– 2003년에는 고시생 신분으로 이라크 전쟁 반대운동 동참.
감시자는 법원행정처 소속 엘리트 판사들이었다. 이들이 흥신소 직원들처럼 차 판사의 뒤를 캔 이유가 있다. 차 판사가 ‘제왕의 뜻’과 다르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2011년 9월 임명한 대법원장 양승태. 그는 ‘사법부의 제왕’으로 불렸다. 임기 대부분을 박근혜 정권과 함께 한 그는 ‘박근혜 코드’에 맞추는 판결을 여럿 남겼다. 정권의 정통성 문제가 걸린 원세훈 전 국정원장 대법원 판결도 그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정권 코드 맞추기 판결의 이면에는 상고법원 도입이 있다. 일반 상고심(3심) 사건은 상고법원이 맡고, 대법원은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만 처리하는 게 양승태의 뜻이었다. 법관, 법학자, 변호사 등 여러 법조인은 상고법원 정책을 비판했다.
차성안 판사도 그 중 한 명이다. 차 판사는 상고법원 도입보다 법관 대폭 증원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법원에 대한 신뢰 회복과 충실한 재판을 위해서는 법관을 늘려 실체적 진실을 확인하고 다투는 사실심(1심, 2심 재판)을 강화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차 판사는 SNS, <시사인> 투고, 동료 법관에게 보내는 이메일 등으로 자기 생각 꾸준히 밝혔다. 감히 제왕의 핵심 정책을 비판하고 다른 목소리는 적극적으로 내다니. 법원행정처가 그를 집중 감시한 이유다.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시사인 칼럼 투고 관련 동향과 대응’ 문건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 비공식적 채널(차 판사와 사촌관계인 차OO 부장판사)을 통한 논리적 설득 전략은 이미 사용하였으나 실패.
– 공식채널인 군산지원장이 차 판사의 칼럼 투고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며, 문제 부분을 안내할 필요 존재.
– 차 판사가 존경하는 선배, 친한 선후배 명단 취합-관리 필요.
최고 권력자의 뜻과 다르게 움직이는 사람에 대한 철저한 감시와 견제. 이런 사법부의 행태는 30여년 전, 사법부에게 치욕을 안긴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안기부가 했던 일과 비슷하다.
1984년 10월 5일, 안기부는 이런 제목의 문건을 남겼다.
‘시위학생 즉심, 형 면제 선고자 남부지원 강금실 판사 성향 등 내사보고’
참여정부 때 법무장관을 지낸, 당시 서울남부지원 판사 강금실 사찰 문서다. 강 판사는 시위에 참석했다가 경찰에 연행돼 직결심판소에 회부된 서울대학교 학생 네 명에게 그해 9월 형 면제 선고를 했다.
이 때문에 강금실 판사는 안기부에 ‘찍혔다’. 안기부는 법원에 강력히 항의했다. 안기부 문서에 따르면 법원은 이렇게 해명했다고 한다.
“심리 과정에서 학생들이 자신들의 죄과를 깊이 뉘우치고 있어 한 번 더 기회를 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형 면제 선고를 하였다고 하면서, 판사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건의 중요성을 인식치 못한 데 있다..”
전두환 시절 강금실-박시환 파일
안기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강금실 판사 남편의 과거, 친정과 시댁의 가족관계, 재산 규모 등을 치밀하게 조사했다. 사법시험 동기 김영란 판사(전 대법관)의 주변을 탐문하기도 했다. 문건에는 이런 취지의 내용이 적혔다.
– 학교 재학 중 문제 서클이나 학원 데모 등에 가담 사실 없고 학업에만 전념.
– 판사 임용 후에도 자기 직무에 비교적 충실한 자로 평가 받음.
– 무림사건(서울대 학회 지하모임 사건)으로 복역한 남편 영향으로 형 면제 선고 배제 못함.
이상, 한홍구 저 <사법부> 참고
안기부는 8개월 뒤인 1985년 6월에 또 다른 판사를 뒷조사한 문건을 남긴다.
‘인천공단 입구 가두시위 관련 즉심 회부자 무죄선고 경위 확인보고’
이 문건의 주인공 역시 낯익다. 참여정부 시절 대법관으로 임명돼 소수의견 등 진보적 견해를 많이 밝힌 박시환 판사다.
문건에 따르면, 1985년 6월 3일 19시 30분부터 25분간 인천시 북구 가좌동 제5공단 입구에서 대학생 150여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노동운동 탄압하는 군사독재 박살내자”라는 현수막을 들고 화염병을 던지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25명을 연행해 이 중 14명을 6월 6일 인천지법에 즉심을 회부했다. 이들을 담당한 박시환 판사는 3명에게는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구류 3~4일, 나머지 11명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안기부의 속은 다시 한 번 뒤집어졌다. 안기부가 작성한 일명 ‘박시환 문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 박시환 판사는 85년 3월 형사사건 담당 판사로 임명되어 6월 6일 처으으로 즉결심판을 담당.
– 학생시위 사건에 대한 처벌의 필요성을 직감하지 못하고 경솔한 판단을 한 것으로 평가.
안기부는 문건 작성으로 그치지 않고 ‘후속 조치’를 취한 듯하다. 국정원 과거사위원회가 편찬한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박시환 판사가 그해 9월 인사에서 강원도 OO지원으로 좌천됐던 것이다. 인천지법으로 부임한 지 6개월 만으로 극히 이례적인 인사였으며 그해 6월의 즉심 무죄선고가 좌천의 원인이 되었음은 당시 법조계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안기부가 법원 판결을 주물렀던 군사정권 시기는 ‘사법 암흑기’로 불린다. 그 어두운 시절에 정보기관이 작성한 ‘강금실–박시환 파일’과 양승태 체제의 법원행정처가 만든 ‘차성안 파일’은 별 차이가 없다.
양승태 시절이 더 지독하다
오히려 2018년에 공개된 ‘차성안 파일’이 더 지독하고 집요하기도 하다. 블랙리스트 추가조사위원회가 별지 형태로 공개한 문건에서 차 판사 관련 내용은 A4 용지 13페이지에 이른다. 누구보다 법을 지키고 법관의 독립을 보장해야 하는 법원행정처가 군사정권 시절의 안기부 위법행위를 그대로 따라했다는 점이 놀랍다. 차 판사 파일에서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이 있다.
‘차 판사가 존경하는 선배, 친한 선후배 명단 취합–관리 필요’
도대체 법원행정처는 판사 뒷조사를 어디까지 진행한 걸까?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컴퓨터와 암호 탓에 열지 못한 760개 파일을 철저히 조사해야 하는 이유다. 법원 행정처는 최근 이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 걸로 알려졌다.
판사 블랙리스트 작성 지시자와 최종 보고를 받은 ‘넘버원’은 누구였을까. 양승태 대법원장 지시 없이 법원행정처가 판사들을 사찰하고 비밀 파일 수백 개를 만드는 게 과연 가능할까?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 책임자들이 모두 서울구치소에 있는 지금, 판사 블랙리스트는 여전히 실체조차 파악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