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로 향하는 비행기가 김포공항에서 완전히 이륙했을 때 법원 판결문을 꺼냈다. 한 부분을 반복해서 읽었다.
“제주시 청자다방에서 김OO을 만나 차를 마시며 도민들의 생활실태 파악 위해 문의. 그로부터 제주시에서 5인 가족이 생활하고 중고교생이 있으면 한 달에 10만 원으로 모자라고, 약 20만 원 가까운 생활비가 소요된다 (중략) 취지의 대답을 받아냄으로써 국가기밀을 탐지, 수집하고…”
제주시 5인 가족 생활비가 국가기밀이라니. 특별 교육을 받고 제주까지 온 간첩이 위험을 무릅쓰고 수집한 정보 수준이 생활정보지만도 못하다. 그가 탐지한 정보는 더 있다.
“농촌에서는 비료값이 80%이상 인상되었는데 농산물 가격은 제자리 걸음이어서 생활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여기까지 읽으니, 정보의 질보다 간첩 수준이 의심스러웠다. 제주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대한민국 법원이 간첩이라고 확정한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접선’ 장소를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지금 입도했습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뭐라고요?”
“제주공항이라고요!”
“잘 안 들려요… 좀 크게 말해봐요!”
“비행기에서 내렸다고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공항 1층 로비에 있던 사람들의 눈길이 일제히 내게 쏠렸다. 은밀한 접선은 커녕 대화도 힘들었다.
“내가 귀가 잘 안 들려요. 주소 불러줄 테니, 찾아 오세요. 제주시 도평동..”
함량미달 정보 취득에 이어, 청력까지 안 좋은 간첩. 판결문에 따르면 그는 제주에서 일본으로 세 차례 밀항을 결행해, 그곳에서 간첩 교육을 받은 겁 없는 인물이다. 이런 대목도 나온다.
“1962년 3월 하순경 고OO 외 20여 명을 모집하여 재도일(밀항)하였으나 타고 가던 배가 기관 고장으로 표류하는 바람에 일본 해상보안청에 검거되어 한국으로 강제 송환되고..”
그가 불러준 주소에 도착하니 요양원이었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요양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 그가 악수를 하려 오른손을 내밀었다. 미소짓는 그의 얼굴에 파도같은 주름이 겹겹이 퍼졌다.
대법원이 유죄를 확정한 간첩 오재선(1941년생). 그는 제주요양원에서 ‘넘버2’라고 자랑했다.
“제가 이 요양원에 2005년 3월에 들어왔으니, 벌써 13년째 살고 있어요. 그동안 돌아가신 분도 많이 봤어요. 한 20명 넘지. 제가 여기서 두 번째 고참이에요.”
요양원 밖 의자에 그와 함께 앉았다. 저 멀리 바다가 보였다.
“비룟값 80% 인상, 제주시 5인 가족 생활비.. 이런 걸 정말 정보로 수집한 겁니까?”
그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미안한데요, 제가 오른쪽 귀가 기능을 잃어서 듣지를 못합니다. 왼쪽 귀도 난청이고요. 그니까 목소리를 크게 높여서 말을 해주세요. 정말 미안합니다.”
오재선은 왼손을 오므려 왼쪽 귀에 바짝 갖다 댔다. 소리를 모아서 들으려는 행동이다. 목소리를 얼만큼 높여야 할지, 난감했다. 오재선은 쌍꺼플 진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파도같은 주름이 다시 얼굴에 번졌다.
“청력은 왜 잃으셨어요?”
고함 치듯이 물었다. 요양원 주변 숲에 있던 꿩이 놀랐는지 푸드덕 날아갔다. 오재선은 그제야 좀 들리는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주경찰서로 끌려가서 죽도록 맞았어요. 간첩이라고 자백을 하라는 거예요. 제가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무슨 간첩이냐’고 따지니까, 뺨을 때리고 주먹으로 치고, 이불 뒤집어씌우고 발로 밟고.. 아주 심하게 맞았어요. 그러다 오른쪽 고막이 나갔어요. 누명 쓰고 감옥에 갔는데, 제대로 치료를 못 받아서 이제는 아예 들리지가 않아요.”
왼손을 왼쪽 귀에 댄 채 그는 내 반응을 기다렸다. 몇 초가 흘렀을까. 내가 다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런 거 물어서 죄송합니다. 누구한테, 어떤 고문을 당하셨어요?”
이번엔 꿩 대신 사람이 반응했다. 요양원의 노인들이 웬 소란인가 싶어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거나 직접 밖으로 나왔다.
오재선은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경찰 아홉 명이 때렸어요. 경찰서 바닥에 경찰봉 두 개를 놓고요. 그 위에 이렇게 무릎을 꿇게 합니다. 허벅지와 종아리 사이에 경찰봉을 꽂고요. 그런 다음 경찰이 제 허벅지를 막 밟아요. 무릎, 허벅지, 종아리가 어찌나 아픈지.. 말로 다 설명을 할 수가 없어요.
또 땅바닥에 머리 박고 엎드려뻗쳐를 하는 ‘원산폭격’을 시키고, 넘어지면 경찰봉으로 허벅지, 허리 등을 마구 때려요. 자기들이 시키는 대로 허위자백을 하라고, 그러면 안 때리고 살려주겠다고..”
오재선은 1941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2남2녀 중 장남이다. 부모는 한국인이다. 해방 직전인 1945년 3월, 가족과 함께 부모 고향 제주도로 왔다. 그의 부친은 애월면사무소에서 일했다. 1948년 일어난 ‘제주 4.3사건’ 이후 그의 아버지는 일본으로 다시 떠났다.
오재선은 엄마, 동생들과 함께 제주에서 성장했다. 애월국민학교, 애월중학교를 다녔다. 그는 15세 때인 1956년, 아버지를 찾아 일본으로 처음 밀항했다. 일본에서 아버지와 일본인 새엄마와 함께 살며 가방공장 재단사, 식당종업원 등으로 일했다.
그때부터 오재선은 자신을 낳아 준 엄마와 동생들이 있는 제주, 아버지와 새엄마, 이복동생이 있는 일본을 오가며 살았다. 제주에는 먹기 살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 재일 한국인은 북한과 가까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남한과 가까운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으로 크게 나뉘었다. 양쪽의 많은 사람은 서로 적대하지 않고 대체로 가깝게 지냈다. 오재선도 양쪽 사람들과 모두 교류했다.
오재선은 1983년 3월부터 한국에서 살았다. 선원, 어구 외판원, 목장 관리인 등의 일을 했다. 서울 등 육지에서는 재일동포 유학생이 간첩으로 조작된 것처럼, 제주에서는 돈 벌기 위해 일본에 다녀온 가난한 사람들이 공안기관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1986년 4월 25일에 제주경찰서로 끌려 갔어요. 경찰들이 일본에서 뭘 했는지 자필로 쓰라고 하더라고요. 있는 그대로 썼더니, 그걸 바탕으로 저를 조총련에 포섭된 간첩으로 만들더라고요. 제가 부인하면 계속 고문을 하고..”
경찰서로 끌려간 오재선이 집으로 돌아가는 건, 일본으로 밀항하는 것보다 어려웠다. 오재선은 제주경찰서에 약 45일간 불법구금 된 상태로 고문을 당하며 수사를 받았다. 그곳에서 간첩으로 다시 태어났다. 구속영장은 그해 6월 11일에 나왔다.
“검찰에서 다른 말 하면, 다시 보안대나 안기부로 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알았지?”
검찰로 송치될 때, 자신을 고문한 경찰이 말했다. 45일간의 고문에서 겨우 살아 남았는데,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라니. 오재선은 검사 앞에서도 허위자백을 했다.
자신을 때리며 영혼까지 지배했던 제주경찰서 경찰 아홉 명. 오재선은 지금까지 이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한다. 오재선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인물은 또 있다.
“제가 법정에서는 사실 그대로 이야기했거든요. 나는 간첩이 아닌데, 경찰이 고문하는 바람에 그들이 원하는 대로 허위진술을 했다고요. 몇 번을 말해도 그 젊은 재판장은 눈 하나 깜짝 않더라고요. 제 동생, 삼촌이 증인으로 출석해 자기들도 고문당한 걸 말해도 아무 소용 없었어요. 그러더니 제가 간첩이라면서 징역 7년을 선고하더라고요. 그 양승태 판사를 어떻게 잊습니까?”
고문당한 사실을 아무리 말해도 귀담아 듣지 않았던 판사 양승태. 그로부터 약 25년 뒤인 2011년, 양승태는 사법부 수장인 대법원장이 된다.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했다.
“똑똑하게 생긴 양승태 판사가 나와 우리 가족 말만 믿어줬어도, 증거라도 제대로 판단해 줬으면 제 귀가 이렇게까지 망가졌겠습니까?”
77세 노인 오재선의 눈빛이 파도처럼 흔들렸다. 눈에 물기가 고였다.
오재선의 말은 거짓이 아니다. 1986년 10월 11일 제주지방법원에서 열린 제5차 공판을 기록한 조서에는 오재선이 이렇게 진술한 걸로 나온다.
“경찰에서 조사받을 때 기압을 받고 무서워서 그런 것(허위자백)입니다. (중략) 진술조서를 쓰라고 해서 쓰면 사실이 아니라고 찢어버리고 다시 쓰라 하고, 머리를 바닥에 박으라 하고, 엎드려 뻗치라고 하였습니다. 경찰 9명에게 한 달간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의 동생 오OO도 양승태 판사 앞에서 고문을 당했다고 호소했다.
“저는 1986년 5월 4일 (제주경찰서로) 끌려가 5월 13일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경찰관들의 모진 고문으로 사실과 다르게 진술한 부분이 많습니다. 사무실 바닥에 경찰 곤봉을 두 개 놓고, 저를 그 위에 꿇어앉게 한 후, 허벅지와 정강이 사이에 곤봉을 다시 끼워서 경찰관이 그 곤봉을 밟고 바닥에 있는 곤봉을 굴리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 1986년 10월 31일 제주지법에서 증언
양승태는 고문에 대해 묻지 않았다
양승태 판사는 청력에 문제가 없었다. 이런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도 그는 관련 질문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그가 오재선에게 징역 7년을 선고한 판결문은 우습다 못해 슬프다.
판결문에 적힌 오재선의 간첩 혐의는 ‘비룟값 80% 인상’ ‘5인 가족 생활비’ 정보 수집 외에 몇 가지 더 있다.
“(제주도민에게) ‘농촌생활은 매우 살기 힘들다. 최근에 질소비료는 90%, 칼리비료는 60%가 인상되는 등 평균 50%나 인상되었다. 농산품 가격은 오르지 않고 공산품 가격만 계속 오르고 있으니 잘 살수가 없다’는 요지의 대답을 받아냄으로써 국가기밀을 탐지 수집.”
“(제주도민에게) ‘5,16횡단도로는 5.16군사혁명 후 해군 준장 김영관씨가 제주도지사로 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깡패들을 인부로 동원, 1964년 완공하였는데 길이는 43km, 폭은 4m로 제주시에서 서귀포까지 버스로 40~50분 소요된다’ 취지의 대답을 받아냄으로써 국가기밀을 탐지 수집.”
“제주 애월읍 시외버스정류소에서 외판원이 판매중인 수첩에 국내선 대한항공시간표, 전국주요열차시간표, 전국고속버스시간 및 안내표가 인쇄되어 있음을 보고 이를 국가기밀로 수집.”
비룟값에 이어 제주에서 서귀포까지 버스로 이동했을 때 걸리는 시간, 외판원이 파는 전국고속버스시간표 등이 국가기밀로 적시됐다. 특히 외판원에게 1000원 주고 구입한 교통 시간표는 오재선의 간첩 혐의를 입증하는 물적 증거로 채택됐다. 그 외에 물적 증거는 하나도 없다.
이쯤 되면 간첩의 능력과 그가 수집한 정보의 질이 아니라, 판사와 판결의 수준을 의심해야 한다.
“비룟값, 열차시간표가 무슨 국가기밀입니까. (웃음) 고작 그런 걸 들이 밀면서 내가 간첩이라고 하는데.. 그게 많이 배운 판사가 할 짓입니까?”
양승태가 대법원장으로 임명된 2011년 가을에도 오재선은 요양원에 있었다. 방에서 TV를 보는데 양승태가 나왔다.
“아마 뉴스였을 겁니다. 그 양반도 많이 늙었지만, 딱 보니까 기억이 나더라고요. 속으로 ‘날 이렇게 만들고, 너는 많이 출세했구나’ 했죠.”
인터뷰가 끝날 즈음, 오재선은 “점심을 함께 먹자”며 인근 곰탕집으로 향했다. 곰탕에 하얀 소면이 담겨 나왔다. 오재선이 후후 불어가며 소면을 먹으려는 순간에 전화기가 울렸다. 그의 동생이었다. 귀가 어두운 오재선의 휴대전화는 상대방 목소리가 크게 들리게 설정돼 있었다.
“형님, 저 도저히 법정에 못 나가겠습니다. 형님 간첩 누명 벗기려면 제가 법정에 나가 말해야 하는데요. 제가 그때 일만 생각하면 머리가 터질 거 같아요. 심장도 두근거리고요. 지금도 너무 힘들어서 누워 있습니다, 형님. 제가 증인으로 나가지 않아도 형님 재판 무사하겠습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오재선은 젓가락에 집은 소면을 놓지도 못하고 동생 말을 들었다. 그는 “형은 괜찮으니까, 너 건강부터 챙겨라. 내가 변호사님에게 너 증인으로 부르지 말라고 말해볼게. 걱정 말고 편히 쉬어라”라고 동생을 위로했다.
전화통화를 하는 동안 그의 젓가락에 들린 소면은 퉁퉁 불었다. 오재선은 울먹이며 “나 때문에 고문을 당한 동생은 지금도 트라우마에 시달린다”고 말했다. 그는 붉어진 눈을 훔치며 불어터진 하얀 소면을 천천히 씹었다. 그마저도 넘기는 게 쉽지 않은지 밥을 많이 남겼다.
고문 피해자는 요양원 ‘넘버2’
택시를 타고 다시 요양원으로 돌아가는 길. 오재선은 “사실 나도 옛날 이야기하면 한동안 밤잠을 못 잘 정도로 심한 두통을 앓는다”고 고백했다. 32년 전 겪은 고문과 양승태 판사의 오판, 칠순을 넘긴 형제는 여전히 과거의 고통에 묶여 있다.
택시에서 내린 오재선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요양원으로 들어갔다. 그는 기초생활수급권자다. 요양비 등을 제외하면 한 달에 20만 원이 남는다.
“종일 요양원에 있는데 돈 쓸 일이 있겠습니까. 담배만 조금 피는데요, 월 20만 원이면 부족하지 않습니다.”
오재선이 13년째 좁은 방에 살면서 ‘요양원 넘버2’가 되는 동안, 양승태 판사는 ‘대한민국 넘버3’가 됐다. 대법원장은 대한민국에서 의전서열 3위인 자리다.
오재선이 청구한 재심이 제주지법에서 열리고 있다. 그가 누명을 벗을지 여부는 5월쯤에 판가름 날 듯하다. 오재선이 32년간 듣고 싶었던 한마디, ‘무죄’. 오랫동안 듣고 싶었던 그 말을 판사가 한다고 해도 오재선은 못 알아들을 가능성이 크다.
그의 귀는 세상의 소리를 잘 듣지 못한다.
하나를 더 이야기하고 싶다. 오재선이 제주지법에서 유죄를 선고한 날은 1986년 12월 4일. 같은 날, 제주지법에서 27세 청년 강희철도 간첩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오재선처럼 일본에서 간첩 교육을 받았다는 혐의였다. 오재선을 두들겨 팬 그 경찰이 강희철도 때렸다.
간첩 누명을 쓴 강희철은 12년을 복역하고 1998년 광복절특사로 풀려났다. 그는 2008년 재심에서 최종 무죄를 선고받았다.
강희철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던 그때 그 판사, 역시 양승태다. 같은 날, 다른 재판에서도 오판을 반복해 무고한 두 사람에게 간첩 누명을 씌운 판사. 이런 판사가 세상에 또 있을까 싶다. 한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 시절에 안기부가 판결을 뒤에서 조정했다고 해도, 같은 날 두 번씩이나 오판을 해 두 사람에게 간첩 누명을 씌웠다는 건 실수로 보기 어렵습니다. 오재선, 강희철의 범죄를 입증할 물적 증거는 하나도 없었거든요. 그 지경까지 갔으면 수사기관의 간첩 조작에 양승태 판사가 적극적으로 가담한 걸로 봐야죠.”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에 사법부 수뇌부는 ‘판사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안기부가 했던 일을 사법부 판사들이 그대로 따라했다. 많은 판사들은 정확한 진상조사를 요구했지만 양승태 대법원장을 이를 묵살했다. 그는 작년 9월 임기를 마치고 법원을 떠났다.
법원노조와 시민단체 등에서 양 전 대법원장을 검찰에 고발했지만, 수사는 진행되지 않고 있다. 법원의 자체 진상조사도 지지부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