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그렇지 않다
“그도 …… 그저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 것일 수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한창이던 2017년 1월 한 인터넷 신문에 김기춘을 이렇게 평가하는 글이 실렸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말한 ‘악의 평범성’을 김기춘도 보여줬다는 주장이다.
세간의 예상과 달리 평범하고 가정적이었던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문제는 (성찰 없이) 그저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 데서 비롯됐으며, “역시 평범하고 가정적인 남편”인 김기춘도 그와 마찬가지일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부인에 대한 ‘닭살 애정’이 보여주듯이 김기춘이 “가정적인 남편”일 수는 있다. 그러나 뚜렷한 주관 없이 “그저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했을 뿐이라고 보는 건 무리다.
1960년대 초 법정에서 아렌트가 본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한,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고 그것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을 통해 전쟁 범죄를 저지른 아이히만’과 김기춘은 유형이 다르다.
그 삶을 살펴보면 김기춘 자신이 뚜렷한 주관을 갖고 반민주 행위를 거듭했음을 알 수 있다. 김기춘은 극우 반공주의에 바탕을 둔 공안 통치를 지향하고, 그 과정에서 공작 정치도 서슴지 않는 모습을 자신의 삶을 통해 보였다. 그 점에서 나름대로 일관성이 있었다.
유신 헌법 제작에 관여하고 유신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 노태우 정권 때 비판 세력을 강경하게 탄압하며 공안 정국 조성에 앞장선 것, 초원복집에서 민주주의 파괴 음모를 꾸민 것 등은 그런 측면에서 모두 이어져 있었다. 이는 박근혜 정권 때 세월호나 블랙리스트 등의 문제에 대해 취한 태도와도 당연히 이어진다.
김기춘이 박근혜 정권 창출을 위해 노력한 것 역시 권력욕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과 부합하는 유신 독재 같은(또는 유신 독재를 지향점으로 삼은) 체제를 만들겠다는 위험한 신념과도 관련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2015년 대통령 박근혜가 “정말 드물게 보는, 사심 없는 분”이라며 김기춘을 공개적으로 칭찬한 것도, 김기춘 경질 요구를 거부하는 차원을 넘어 김기춘의 이러한 측면을 높이 평가한 결과 아니었을까?
김기춘은 그와 같은 태도를 견지하며 출세하고 권력과 부를 누렸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분단, 전쟁, 학살로 그 기반을 다진 극우 반공 체제가 한국 사회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기춘의 여러 활동은 그러한 극우 반공 체제를 더 강고하게 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바람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위험한 순환 구조였다.
김기춘 같은 사람들에게 극우 반공 체제는 자신의 주관과 부합하는 것이자 출세, 권력, 부를 안겨준 고마운 체제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인권을 옹호하는 정당한 저항 움직임을 극우 반공 세력이 사력을 다해 짓밟으려 한 것도 이 점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극우 반공 체제는 거제도 장목면의 총명한 소년 김기춘을 오늘의 김기춘으로 키운 기본적인 토양이다. 그 토양에서 김기춘이 권력과 부를 누리기 위해 활용한 주요 도구는 법이다.
흉기로 전락한 법과 ‘검찰 공화국’·‘법비’ 문제
“일부 언론에서 ‘검찰 공화국’이라고 말할 정도로 검찰의 위상이 높았고 …… .”
김기춘은 검찰총장 시절에 대해 <대통령,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다>라는 글에 이렇게 썼다. ‘검찰 공화국’을 만든 것에 대한 은근한 자랑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김기춘은 노태우 집권기에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을 하며 ‘검찰 공화국’을 구축한 주역이다.
그러나 ‘검찰 공화국’은 검찰의 높은 위상을 가치 중립적으로 서술하는 말이 아니다. 자랑할 만한 대상은 더더욱 아니다. ‘검찰 공화국’이라는 말에는 주권자이자 주인인 국민을 발아래 두고 정치 권력, 자본과 영합해온 검찰의 부끄러운 역사가 담겨 있다.
‘리틀 김기춘’ 우병우가 국정 농단에 관여한 것에 더해 ‘법꾸라지(법+미꾸라지)’ 행태를 보일 수 있었던 것도 ‘검찰 공화국’이라는 현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우병우의 ‘법꾸라지’ 대선배 격인 김기춘이 초원복집 사건을 일으키고도 법적으로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은 것 역시 ‘검찰 공화국’ 문제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2016~2017년 촛불 항쟁을 거쳐 김기춘·우병우는 수감됐다.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온 후 어느새 1년 넘게 지났다. 하지만 ‘검찰 공화국’ 해체를 지향하는 검찰 관련 제도 개혁은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검찰 공화국’이 지탄 대상이 된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닌 만큼 개혁 방안이 그동안 여러 차원에서 나왔다. 큰 틀에서 기본적인 방향은 제시돼 있고, 각론의 차이점들은 개혁 과정에서 지혜를 모아 해소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얘기다.
문제는 반발에 굴하지 않고 그것을 추진할 정치 세력과 사회적 힘을 지속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검찰 공화국’ 해체는 분명 쉬운 일도,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손 놓고 있으면 언제든 또 다른 김기춘·우병우에게 짓밟힐 수 있다.
‘검찰 공화국’ 구축의 주역 김기춘은 ‘법비(法匪)’(법으로 도적질하는 무리)로 규탄되는 집단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이 ‘법비’ 문제가 검찰 쪽만 관련된 사안일까? 그렇지 않다. 법을 흉기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을 자초한 건 검찰만이 아니다. 법원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면, 김기춘이 수사 책임자였던 학원 침투 북괴 간첩단 사건(1975년) 같은 조작 간첩 제조 사건이 숱하게 일어났다. 그때 법원은 간첩으로 조작된 사람들에게 정권과 공안 당국이 바라는 대로 중형을 선고하기 일쑤였다.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피해자들이 법정에서 억울함을 호소해도 사법부가 묵살한 경우 역시 한둘이 아니다.
사법부가 독재 정권과 영합해 인권을 짓밟는 판결을 내리거나 ‘검찰 공화국’과 짝짜꿍한 사례는 차고 넘친다. 김기춘의 법무부 장관 시절을 살필 때 빼놓을 수 없는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1991년)에서도 사법부는 명백히 공범이었다.
사법부가 법을 흉기로 전락시킨 것이 이젠 흘러간 옛일일 뿐일까? 그렇다고 볼 수 없다. 간첩으로 조작돼 삶이 망가진 피해자에게 국가의 잘못을 인정하는 의미로 지급된 배상금에 ‘부당 이득’이라는 딱지를 붙여 다시 뺏어가겠다는(심지어 높은 이자까지 물렸다) 판결을 내리는 것이 오늘의 사법부다.
이것 이외에도, 조작 간첩 제조 사건 피해자의 재심 신청을 몇 년이 지나도록 묵살하는(강기훈에게 했던 것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등 법의 이름으로 피해자와 그 가족의 가슴에 다시 대못을 박는 일이 근래에도 계속 일어났다.
다른 한편으로 사법부는 재벌 총수들에게는 이른바 ‘3·5 법칙’(징역 3년, 집행 유예 5년)에 따른 정찰제 판결을 거듭하며 솜방망이 처분을 내렸다. 대법관 등 고위직을 거쳐 변호사로 개업한 전직 판사들이 전관예우를 통해 ‘도장 값’으로만 어마어마한 금액을 챙기는 모습도 사라지지 않았다.
두 가지 모두, 배상금을 토해내라고 국가 범죄의 피해자를 압박하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다. 사법부, 더 나아가 법조계 전반과 관련된 이러한 적폐를 청산하는 것은 또 다른 김기춘·우병우에게 다시 짓밟히지 않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과제와 결코 무관치 않다.
김기춘 전성시대 가능케 한 토양을 바꿔야 한다
김기춘의 삶이 전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정보 기관 개혁이다. 중앙정보부, 안기부, 국정원으로 이어지는 정보 기관이 민주주의를 어떤 식으로 짓밟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 역시 차고 넘친다. 근래 진행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수사 및 재판, 이명박 집권기에 권력을 휘두른 인사들에 대한 수사 및 재판에서도 그런 사례가 거듭 확인됐다.
김기춘이 대공수사국장이던 시절 중앙정보부의 행태 역시 정보 기관 개혁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으로서 유신 독재 수호에 앞장서다가 검찰에 복귀해 다시 법 기술자로 살아간 김기춘의 삶은 정보 기관 개혁과 ‘검찰 공화국’ 문제가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정보 기관 개혁 문제 역시 ‘검찰 공화국’ 건과 마찬가지로 큰 틀에서 개혁 방향은 이미 제시돼 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정보 기관, 검찰, 사법부 개혁의 지향점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대한 주권자의 통제 체계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극우 반공 체제 수호, 조직 보위 논리 등을 내세워 주권자 위에 군림하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이것은 언론 개혁, 재벌 개혁 등 다른 부문의 적폐 청산과도 이어져 있는 문제다.
다시 말해 총체적인 개혁을 통해 김기춘 전성시대를 가능케 한 토양을 바꿔야 한다.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김기춘 전성시대가 막을 내린다고 해서 김기춘이 남긴 문제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 차례에 걸친 김기춘 전성시대는 출세 지향 법조인들에게 ‘저렇게 해야 더 크게 성공하는구나’라는 잘못된 확신을 갖게 하는 명확한 신호였다. 김기춘에게 상응하는 책임을 물어 단죄하는 것은 그러한 잘못된 신호를 바로잡는다는 차원에서도 의미가 크다. 그 점은 분명하지만, 거기서 멈추면 언제든 되치기를 당할 수 있다.
2018년 3월 현재 김기춘은 79세의 고령이다.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수감돼 있고, 유죄가 확정될 경우 몇 년간 옥살이를 해야 하는 처지다. 여러 상황을 감안할 때 김기춘이 다시 권력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4차 전성시대를 누릴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그러나 김기춘이 사라진다고 해서 ‘검찰 공화국’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것도, ‘법비’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김기춘 전성시대를 가능케 한 토양이 바뀌지 않으면 김기춘 같은 사람은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 한 가지만 더 짚어보자. 살펴볼 것은 14년 전 이맘때 세상에 나온 한 통의 편지다.
다시 읽는 <‘공순이’ 최순영이 ‘영애’ 박근혜에게>
“당신이 잘 꾸며진 청와대 뜨락에서 국내외 귀빈을 만나고 ‘영애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던 동안, 당신과 같은 또래였던 우리들은 얼마 안 되는 돈을 받기 위해 하루 종일 공장 먼지를 마셔야 했습니다. 당신 아버지가 철권을 휘두르며 국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던 동안 우리 아버지들은 가족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평생을 노동해야 했습니다.
당신 아버지가 군대·경찰·관료·재벌들과 함께 ‘5개년 경제 계획’을 밀어붙이는 동안 내 아버지 또래의, 내 또래의, 그리고 내 동생 또래의 노동자들이 죽어나갔습니다. 당신 아버지의 집권 시절 이뤄진 산업화·근대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한 통계 작업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서 “당신”은 박근혜다. 이 편지를 쓴 사람은 박근혜보다 한 살 아래인 최순영. 부마항쟁과 더불어 유신 독재에 조종을 울린 사건으로 꼽히는 YH사건(1979년) 당시 노조 지부장이었던 그 최순영이다.
YH사건 당시 노조 지부장이었던 최순영은 2004년 박근혜에게 공개편지 <‘공순이’ 최순영이 ‘영애’ 박근혜에게>를 띄웠다. 경제 개발과 노동자의 관계, 고도성장 또는 산업화의 주역 등의 문제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 편지였다. 이미지는 이 사건 당시 강제 진압돼 끌려가는 여성 노동자들의 모습을 전한 <동아일보>(1979년 8월 11일 자) 기사. ⓒ<동아일보> 화면 갈무리
최순영은 2004년 3월 한나라당의 새 대표로 선출된 국회의원 박근혜에게 이 공개편지를 띄웠다. 제목은 <‘공순이’ 최순영이 ‘영애’ 박근혜에게>. 최순영의 얘기를 조금 더 들어보자.
“저는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산업화 세력이라는 표현에 심한 거부감을 느낍니다.
청춘을 산업화에 바친 ‘산업 전사’의 한 사람으로서, 기업과 국가의 부를 창출하기 위해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 조건에 시달렸던 근로자의 한 사람으로서, 남의 노동에 기생하지 않고 자기 노동력에 의지해 힘껏 일했던 노동자의 한 사람으로서, 저는 당신이 말하는 ‘경제 발전의 주역이 박정희와 3공 세력’이라는 주장에 모멸감을 느낍니다.
한국 사회에 부를 가져다 준 산업화 세력, 경제 발전의 진정한 주역은 님의 아버지나 한나라당으로 대변되는 수구 기득권층이 아니라, 당신들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을 참혹한 노동 환경에서 묵묵히 일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근대화의 피해를 고스란히 감내했던 농민들이었습니다. 자기 몸 하나 믿고 사회 복지 제도 하나 변변치 않은 천민 자본주의를 견뎌냈던 이 땅의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경제 개발과 노동자의 관계, 고도성장 또는 산업화의 주역 등의 문제에 대해 깊이 있게 음미할 거리를 담은 편지였다. 박정희의 딸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평생 땀 흘리지 않고 특혜를 누린 박근혜에 대한, 더 나아가 박근혜를 비롯한 극우 반공 세력(김기춘도 당연히 포함된다)이 부추긴 박정희 신드롬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기도 했다.
한국 사회에서 다수가 이 편지에 담긴 진실에 귀를 기울였다면 그 이후 상황이 어떠했을까? 그랬어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참담한 국정 농단 사태를 겪어야만 했을까? 그랬어도 자기 당에서조차 “전과 14범”이라는 지적을 받은 이명박의 ‘경제 대통령’ 운운하는 위험한 선동이 많은 사람에게 쉽게 먹혔을까?
이와 관련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1997년 IMF 구제 금융 위기 도래 후 ‘민주 정부’를 표방한 정권이 두 번 들어섰지만 그 시기에 격차는 더 커졌고 재벌 중심 경제 구조도 바뀌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명박·박근혜의 위험한 선동이 많은 사람에게 먹히고 김기춘 같은 사람이 힘을 발휘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줬다. 민주주의를 지키고 확장하기 위해서는 격차 해소를 지향하고 재벌 중심 경제 구조를 바꾸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이다.
세상에 나온 후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공순이’ 최순영이 ‘영애’ 박근혜에게>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출현을 가능케 한 요소 중 하나인 박정희 신드롬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수준을 넘어,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주요한 시사점을 주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전쟁 같은 노동을 매일매일 견뎌내며 허리띠를 졸라맨 “이 땅의 일하는 사람들”이 쏟은 노력의 가치를 온전히 인정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역사를 볼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다.
이것은 현실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오늘날에도 한국인의 다수는 전쟁 같은 노동을 매일매일 견뎌내며 허리띠를 졸라매는 ‘이 땅의 일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뿌리 뽑지 않으면, 또 언제 독버섯처럼..
2016년 하반기, 하나둘 촛불이 켜졌다. 힘센 누군가가 억지로 시킨 것도, 돈 많은 누군가가 검은돈으로 구슬린 것도 아닌데 계속 켜졌다. 코끝을 에는 찬바람에도 사람들은 거리에서 촛불을 들었다.
그렇게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진 촛불은 광장을 밝히고 박근혜 일당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박근혜도, 박근혜 부녀와 “운명적인 인연으로 얽혀 있었다”고 토로한 김기춘도 감옥에 갔다.
수많은 시민이 함께 만들어낸 촛불 항쟁은 뒷걸음질하던 역사의 물줄기를 되돌렸다. 촛불이 추구한 것은 박근혜 탄핵만이 아니었다. 촛불과 함께 적폐 청산 요구가 타올랐다.
각 부문에 켜켜이 쌓인 역사의 오물을 씻어내고 나라다운 나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자는 것이었다. 그 지향점은 김기춘 전성시대를 가능케 한 토양을 바꾸는 것과 다르지 않다.
돌아보면, 해방 후 한국 사회가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민주주의와 인권 쪽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게 만든 근본 동력은 아래로부터 솟은 시민들의 힘이었다. 4월혁명(1960년) 때에도, 부마항쟁(1979년)과 광주항쟁(1980년) 때에도, 6월항쟁과 7·8·9월 노동자 대투쟁(1987년) 때에도 그러했다. 2016~2017년 촛불 항쟁도 마찬가지다.
그로부터 1년여. 한국을 바꾸는 작업은 쇠뿔 빼듯 단김에 마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촛불을 들던 그때의 마음을 떠올리며 끊임없이 이어가야 하는 과제임을 확인시켜준 시간이었다. 청산에 진전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적폐의 뿌리는 깊고 바로잡는 작업은 더딘 게 사실이다.
그러는 사이, 적폐 청산에 딴죽을 거는 목소리도 일각에서 계속 나왔다. 정치 보복이라고 억지를 부리기도 하고, 재벌 총수에게 죄를 물으면 경제가 무너질 것처럼 협박 섞인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었던 익숙한 풍경이다. 개혁 피로감을 운운하기도 한다. 주권자 다수가 피곤하다고 느낄 만큼 개혁이 이뤄진 적이 없는데도 이런 식으로 발목 잡는 것 역시 익숙한 풍경이다.
적폐 청산을 하더라도 시한을 정해놓고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적폐 청산엔 시한이 있을 수 없다. 수십 년이 지나더라도, 밝혀야 할 진실은 밝혀야 하고 물어야 할 책임은 물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길이며, 역사의 퇴행을 막기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
청산해야 할 것을 청산하지 못했을 때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를 해방 후 한국인들은 뼈아프게, 거듭해서 되새겨야 했다.
친일파 문제, 민간인 학살 문제 등 그러한 사례가 한둘이 아니다. 제한적이고 부분적인 민주화 속에서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김기춘이 화려하게 부활해 민주주의를 다시 위협한 것도 그중 하나다.
여기서 검찰총장일 때 설파했다고 김기춘이 회고록에 쓴 ‘무좀론’을 뒤집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김기춘은 “공산주의자들”(이라고 썼지만 실제로 겨냥한 건 비판 세력 전반)을 “무좀”에 비유하며 이렇게 강조했다.
“뿌리를 뽑지 않으면, 또 언제 독버섯처럼 돋아날는지 모른다.”
이것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적폐 세력에 대한 처리 원칙과 연관해서 읽어보면 어떨까? “뿌리를 뽑지 않으면, 또 언제 독버섯처럼 돋아날는지 모른다.” 그러한 세력에 대한 처리 원칙과 관련해 이것만큼 적확한 표현도 찾기 어렵다. 이것이 어쩌면 김기춘이 자신의 삶을 통해 반면교사 형태로 한국 사회에 전한 최대 교훈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