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여 명이 동시에 두 손과 양팔로 만든 ‘하트’가 자신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을까? 연두색 셔츠를 입은 정중앙의 남자는 환하게 웃고 있다. 모두가 두 손 들어 하트를 만들었는데, 혼자만 두 팔을 편하게 내려 놓았다.
‘하트에 둘러싸인 기분은 어떨까.’
이런 상상을 하면서 현수막에 적힌 글을 읽었다.
‘대법원장님과 함께해서 행복했습니다.’
– 2014년 7월 19일(토) 서울북부지방법원 가족 일동
색과 크기를 달리해 포인트를 준 두 글자, 행복. 이 사진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해도 연두색 셔츠의 남자, 양승태 대법원장이다. 판사, 법원공무원 등의 ‘집단 하트’ 속에 선 그는 행복해 보인다.
사진 열람을 끝내고 최근 입수한 판결문 6개를 펼쳤다. 누구에게는 사형을, 어떤 이에게는 무기징역과 징역 10년 등을 선고한 판결문이니 모두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사건들이다. 판결문 6개에서 공통점을 발견했다.
– 피고인들은 모두 재일교포이거나 일본에 다녀온 경험이 있다.
– 피고인들은 간첩 등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았다.
– 피고인들은 사건 당시 신문 1면 등을 장식할 정도로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 피고인들은 유죄를 입증할 명백하고 뚜렷한 물적 증거 없이 사형 등 중형을 선고 받았다.
– 생존한 피고인들은 훗날 재심을 통해 거의 모두 무죄를 선고 받았다.
간첩으로 몰려 교도소에 다녀왔으나, 훗날 다시 살펴보니 무죄였던 사람들. 6개 판결문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이 있다.
‘판사 양승태’
훗날 이명박 대통령이 대법원장으로 임명해 사법부 수장이 된 그 양승태다. 양승태처럼 명백하게 적시되지 않았지만, 판결문을 읽다보면 눈앞에 아른거리는 한 인물이 있다. 6개 판결문 중 네 사건과 깊이 관련된 인물.
‘김기춘’
둘은 경남고 선후배 사이다. 공부를 잘해 일찍부터 수재로 불리며 각각 판사, 검사가 되어 각자의 조직에서 ‘넘버 원’ 자리에 오른 두 사람. 이들은 여러 사람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고, 한국 현대사에서 큰 오점으로 남은 사건에도 함께 관여한다.
선배 김기춘이 조작하고, 후배 양승태가 도장을 찍어준 사건. 바로 ‘학원 침투 북괴 간첩단’ 사건이다. 수사 책임자였던 김기춘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이 11월 22일 직접 발표해 ’11.22 사건’이라 불리기도 한다. 간첩단 핵심 인물로 지목된 이들은 모두 재일 교포 유학생들이었다.
김기춘은 당시 이런 말도 했다.
“이번 사건에는 여학생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한 여학생의 경우) 지하철이나 버스 정거장 등지에서 중견 장교에게 추파를 던져 접근, 소속 부대의 임무 등 군사 기밀을 빼내려 했다. 학원 소요의 배후에는 북괴 간첩이 있다.”
훗날 재심에서 무죄 판견이 나온 것처럼, ’11.22 사건’은 고문으로 만든 조작이었다. 당시 중앙정보부의 고문은 어떠했을까? 비슷한 시기에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끌려 갔던 한 인물은 이렇게 표현했다.
“(옆방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는) 소가 죽을 때 내는 우는 소리 같았다.”
간첩으로 조작된 재일 교포 유학생 김동휘, 최연숙, 조득훈, 이원이, 장영식 등은 1976년 서울형사지방법원 법정에 섰다. 저 높은 법대에는 판사 양승태가 배석으로 앉아 있었다. 김기춘이 간첩단으로 조작한 이 사건에 당시 재판부는 모두 유죄를 판결했다.
판결문에 적시된 간첩 활동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서울의 지형 및 지리를 숙지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1975년 10월 종로서적센터에서 영진문화사 발행의 서울시 전도 개정판 1매를 250원에 구입. 같은 11월 하순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역 부근상호미상 서점에서 지도원 ‘사이또’에게 보고할 목적으로, 정부에 비판적인 잡지라고 판단하여 국내 경제 문제에 대한 대학 교수들의 분석 비판 논문 등이 게재된 <동아일보>사 발행 월간지 <신동아> 1권을 500원에 구입하는 등 국가기밀을 탐지 수집.” – 1976년 6월 8일 선고된 조득훈 1심 판결문에서
서점에서 판매하는 <신동아>와 서울시 지도가 국가기밀이라니. 재판부는 조득훈에게 ‘징역 10년 및 자격정지 10년’을 선고했다.
양승태 판사가 서명한 판결문에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한 내용이 계속 나온다. 이번엔 재판부가 ‘징역 5년 및 자격정지 5년’을 선고한 피고인 이원이의 판결문을 보자.
“부산대학생 2000여명이 ‘학원의 자유화를 요구한다’ ‘중앙정보부는 학원사찰을 중지하라’는 등 구호를 외치며 동래온천장까지 약 1km 가량 시위 데모하는 것을 목격하고 대학생들의 동향 및 데모 상태를 수집함으로써 적국을 위하여 간첩하고..” – 1976. 4. 30. 1심 판결문에서.
거리에서 본 학생들의 데모가 “적국을 위한 간첩” 활동이라고 적시됐다. ‘징역 5년과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은 김동휘의 판결문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1974년 9월 초경, 서울시내 일반 서민층의 생활실태를 요해할 목적으로 청량리역 주변과 청계천 7가, 미아리 등지에서 산재하여 있는 빈민촌을 배회하면서 동 지역 내에 거주하는 국민생활상을 탐지. 1974년 12월 12일까지의 신문지상의 기사 내용 등을 통하여 서울의 청계천, 청량리, 미아리 등에 판자촌이 많다는 사실 (중략) 등 국가기밀을 탐지 수집하여 간첩하고..” – 1976년 4월 30일. 1심 판결문에서.
판결문에 나오는 대로 판자촌 소식을 담은 신문 보도 내용이 국가기밀로 둔갑했다. 이번엔 판사 양승태 등 1심 재판부가 망신을 당한 것으로 봐도 무방한 판결을 보자.
“남한의 경제는 외국차관으로 고층빌딩을 건설하는 등 외형상 발전한 것처럼 보이나 일반 대중들의 생활 실태는 아주 빈곤하다. 빈민층의 어린아이들은 생활고로 인하여 학교에 다니지도 못하고 시내 다방 등지를 돌아다니며 껌팔이 구두닦이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등 그간 한국 내에서 수집한 정보를 (정보원에게) 보고함으로써 반국가 단체의 구성원으로서 그 목적 수행을 위하여 간첩하고..” – 1976년 5월 7일. 1심 판결문에서.
이런 내용 등을 근거로 재판부는 피고인 장영식에게 ‘징역 3년 6월 및 자격정지 3년 6월’을 선고했다. 하지만 장영식 사건은 2심에서 일부 무죄, 3심에서는 원심의 유죄 부분을 파기 환송했다. 2심 판결문에는 이렇게 나온다.
“피고인에 대한 피의자 신문조서는 이를 그대로 믿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위 검찰 자백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한 아무런 보강증거도 없다.”
한마디로, 양승태 판사가 포함된 1심 재판부가 자백 외에 아무런 증거도 없이 유죄를 선고했다는 이야기다. 사실 이 말은 양승태 판사가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에 유죄 선고에 참여한 모든 판결에 적용된다. 간첩 행위를 뒷받침하는 명백한 증거는 하나도 없다.
양승태는 배석 판사였기에 책임이 없다고? 그렇게 말하기 어렵다. 재판부를 세 명으로 구성하는건 그만큼 판사들끼리 토론을 거쳐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판결하라는 취지다.
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예를 보자. 판사 시절 박범계는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치사사건’ 피고인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재판부의 배석판사였다. 이들 피고인 세 명은 2016년 재심을 거쳐 무죄를 선고받았다. 박범계 의원은 이들을 국회로 초대해 머리 숙여 사과했다.
배석판사로서 간첩단 조작에 마침표를 찍어준 양승태는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간첩 조작’을 보면서 출세를 터득했는지도 모른다. 부장판사로 승진해 제주지방법원에서 일하던 시절, 양승태 판사는 더욱 적극적으로 간첩 조작에 자기 이름을 걸친다.
1986년 12월 4일은 한국 사법 역사에서 기록적인 날이기도 하다. 이날 양승태 판사는 두 재판에서 연속으로 오판해 무고한 두 사람에게 간첩 누명을 씌웠다.
서울에서 일을 제대로(?) 배웠는지 패턴도 똑같다. 피고인들은 일본에 다녀온 적이 있는 오재선, 강희철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제주의 두 사람은 유학생이 아닌, 가난한 서민이었다.
양승태 판사는 역시 명백한 물적 증거도 없이 강희철에게는 무기징역, 오재선에게는 징역 7년을 선고했다.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형인 무기징역을 강희철에게 선고한 판결문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국군휴양소에는 군인 신혼부부와 장교 가족들이 많이 와서 놀다가 간다. 나는(강희철 지인) 사우나에서 근무하였는데 다른 곳보다 수입도 좋고 근무가 편하다. 국군휴양소는 호텔과 마찬가지로 방이 깨끗하고 시설도 잘 되어 있다라는 (중략) 국가기밀을 탐지 수집하여 간첩하고..”
국군휴양소 방이 깨끗하고 시설이 좋다는 게 국가기밀이라며 무기징역의 근거로 삼은 판사 양승태. 그는 피고인 강의철이 경찰에 무려 105일 동안 불법 구금됐다는 걸 외면했다. 사건 기록만 보면 뻔히 보이는 사실인데도 눈을 감았다.
당시 27세였던 강희철은 약 12년을 교도소에서 불혹의 나이가 되어 광복절특사로 세상에 나왔다. 제주도에 사는 강희철은 아직도 종종 밤잠을 설친다.
“다 잊고 싶은데, 잊을 수가 없습니다. 기자님, 저는요.. 정말이지 무언가를 잘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제일 부럽습니다. 교도소에서 눈만 뜨면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복수만 생각했습니다. 고통스러워 잊고 싶은데, 도저히 잊을 수가 없어요.”
그에게 물었다.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한 양승태 판사, 용서가 됩니까?”
“잘못했다고 말을 해야 용서를 하든가 말든가 하죠. 가해자가 뉘우치고 반성을 해야 해야 용서를 해주죠! 저한테 그런 말 하지도 마세요!”
그는 금방 울어버릴 듯했다. 강희철은 2008년 재심을 거쳐 무죄를 선고 받았다. 그로부터 다시 10년이 지났지만, 양승태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경남고의 수재였던 김기춘 검사와 양승태 판사. 현대사의 영욕을 함께 한 두 사람은 권력의 최정점에서 또 비슷한 일을 했다. ‘블랙리스트’가 그것이다.
김기춘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으로 현재 구치소에 수감돼 있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는 판사들을 뒷조사해 판사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양승태는 아직 수사도 받지 않았다. 대신 작년에 훈장을 받았다.
이 글을 다 쓰고 다시 ‘집단 하트’에 둘러싸여 환하게 웃는 양승태 사진을 본다. 그에게 재판을 받은 여러 국민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