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스토리펀딩에서 2015년 5월 7일 공개한 기사입니다. 스토리펀딩에서 읽기]
사건기록 읽기를 몇 번 포기했다. 눈 감은 채 외면하고 싶었다. 가짜 살인범 15살 최성필(가명). 길지 않은 그의 15년 삶은 정말이지 기가 막힌다. 불행과 불운이 이어지고, 어른들은 미성년인 그를 살인범으로 조작했다. 그 시간을 어떻게 버텼을까.
“다 지난 일이죠. 이제 와서 원망하면 뭘 어쩌겠습니까?”
그는 짧은 말로 그 세월을 정리했다. 혀로 마른 입술을 축이며 허탈하게 웃었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에게 잔인한 부탁을 했다.
“익산 약촌오거리에 같이 한 번 갑시다.”
2000년 8월 10일 택시기사 살인사건이 발생한 그곳. “다 지난 일“이어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란 게 있다. 무얼 해도 잊히지 않는 고통과 슬픔도 있다. 지난 4월 23일, 최성필씨와 함께 그의 아픈 기억을 더듬었다.
“형사들이 조용한 데로 가자고 하더라고요. 그러더니 이 모텔로 저를 데려왔어요.”
익산경찰서 소속 형사들은 사건 발생 사흘 뒤인 2000년 8월 13일 새벽 2시께 최성필을 이 모텔로 끌고 왔다. 일종의 불법 체포, 감금이었다. 15살 최성필은 속옷만 입은 채 모텔방 한가운데에 앉혀졌다. 형사들이 그를 둘러쌌다. 한 형사가 그에게 두꺼운 전화번호부 책을 밀었다.
“택시기사 누가 죽였어? 찾아봐.”
“모릅니다.”
“우리가 봤을 땐 네가 범인으로 보이는데, 맞지?”
“아닙니다. 저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한 형사가 최성필의 뺨을 때렸다. 눈에서 불꽃이 튀고 볼이 얼얼했다. 형사들은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최성필은 울면서 역시 부인했다. 뺨과 뒤통수를 계속 맞았다. 추궁, 부인, 구타가 동틀 무렵까지 이어졌다. 끝내 최성필은 형사가 불러주는 대로 자필 진술서를 하나 썼다.
(…) 택시기사 아저씨가 저를 때려서 화가 나 오토바이 (의자) 밑에 있는 칼을 꺼내 택시기사 아저씨 어깨를 잡고 찔렀습니다.
A4 두 장 분량의 진술서는 이렇게 끝난다. 나중에 보도하겠지만, 이는 공소사실과도 다른 엉터리 내용이다. 가짜 살인범 최성필, 그는 어떤 삶을 살다가 이 모텔방까지 끌려왔을까.
유년시절, 최성필은 어른들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무능했고, 술을 좋아했다. 술에 취하면 종종 폭력을 썼다. 엄마는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최성필은 다섯 살이었다.
엄마는 자리를 잡으면 최성필을 데려가려 했다. 최성필은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돈을 벌지 않고 술을 좋아한 아버지는 9살 최성필을 충북의 할머니 집에 맡겼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최성필을 경기도의 한 도시로 데려왔다. 최성필의 전학 절차도 밟지 않고, 학교도 보내지 않았다. 그렇게 배움이 끊겼다.
아버지는 과음이 부른 교통사고로 1998년 사망했다. 최성필 혼자 남았다. 엄마가 최성필을 데려갔다. 엄마는 식당에서 일하며 어렵게 살았다. 열심히 일해도 가난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최성필은 중국음식점 등에서 배달 일을 했다.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는 익산의 한 다방에서 커피 배달을 돕는 ‘오토바이 기사‘로 일했다.
이렇게 최성필은 보살핌 없이 성장했고, 가난했으며, 배우지 못했다. 최성필은 더 큰 수렁에 빠지기 시작했다.
익산 약촌오거리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진 직후였다. 그는 커피 배달을 도운 뒤 다방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경찰들이 현장에서 사건 단서 등을 찾고 있었다. 최성필이 경찰에게 “무슨 일이냐“고 먼저 물었다.
경찰에게 살인사건을 들은 최성필은 두 남자가 사건 현장 근처에서 뛰어가는 걸 봤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성필은 얼굴까지는 못 봤다. 그럼에도 그는 전북지방경찰청까지 가 몽타주를 그렸다. 당연히 엉뚱한 얼굴이 나왔다. 종종 있는 일이다. ‘연쇄 살인범‘ 강호순 수사 때도 한 고교생이 범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봤다면서 안산경찰서에서 몽타주를 그렸다. 그때도 사실과 다른 ‘그림‘이 그려졌다.
엉뚱한 몽타주는 화를 불렀다. 경찰은 최성필을 범인으로 의심했다. 의심은 확신으로 커졌고, 경찰은 과학수사 대신 강압수사를 택했다. 강압수사는 사실과 다른 조작을 낳았다. 조작은 최성필을 체포한 순간부터 시작됐다. 익산경찰서가 2000년 8월 13일 작성해 전주지방검찰청 군산지청에 보낸 ‘긴급체포승인건의‘ 문서에는 이렇게 나온다.
긴급체포한 일시 : 2000년 8월 13일 04시 40분
긴급체포한 장소 : 익산경찰서 수사과 형사계 사무실
‘모텔방 불법체포와 감금‘ 사실을 숨기고 싶었을까? 경찰의 공식기록에서 모텔방은 사라졌다. 당시 경찰은 모텔방에서 나온 뒤 지척에 있는 익산경찰서로 최성필을 끌고 갔다. 그곳에선 구타대신 인권이 보장된 적법수사가 이뤄졌을까?
“경찰서에서도 계속 맞았죠. 자기들이 원하는 대답 안 하면 때리고, 질문에 제대로 답을 못 하면 또 때리고.. 경찰서에 있는 동안 계속 정신없이 맞았어요.“
그에게 “경찰이 어떻게 때리던가요?”라고 잔인한 질문을 던졌다. 미안했다. 최성필은 과거 자신이 두들겨 맞은 옛 경찰서 건물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봤다. 뭔가 울컥하는지 마른 기침을 몇 번 했다.
“뺨과 뒤통수 맞는 건 기본이고요. 경찰봉으로 발바닥을 자주 맞았아요. 대걸레 자루 있죠? 그걸로 허벅지와 등을 많이 맞았어요. 엎드려뻗쳐 자세로 기합을 받았고, 시멘트 바닥에 머리 박은 채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어요. 아무튼 그땐 너무 많이 맞아서 정신이 없었어요. 형사계 사무실 안쪽에 작은 방이 하나 있거든요. 내가 범행을 부인하면 형사가 거기로 끌고 가는 거예요. 거기서 또 맞고.. 무서웠죠. 많이 울기도 했고.”
최성필만의 주장이 아니다. 사건 당일 최성필과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공범으로 의심받은 최성필의 두 선배도 익산경찰서에서 구타당했다고 법정에서 증언했다.
최성필의 엄마 양OO씨도 당시 아들이 구타당한 정황을 목격했다. 양씨는 지난 2000년 12월 8일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에서 열린 5차 공판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익산경찰서) 형사계에서 (아들 최성필을) 면회할 때 보니, 형사계 옆에 대기실처럼 생긴 곳이 있었습니다. (형사가) 그 안으로 피고인(최성필)을 데리고 갔는데, 때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 다음에 아들의 얼굴을 보니 얼굴과 목이 빨개진 상태로 울고 있었습니다.”
최성필의 빨개진 얼굴을 보고 양 씨가 큰소리를 치며 항의했지만 형사들은 면회를 시켜주지 않았다. 미성년자 최성필은 변호사 조력없이 경찰수사를 받았다. 엄마가 있었지만 제대로 도울 처지가 못 됐다.
헌법 제12조 2항은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고 규정돼 있다. 제11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명시했다. 어리고, 가난하고, 많이 배우지 못한 최성필에겐 이런 헌법마저 비껴갔다.
최성필은 자신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 상태에서 허위자백을 했다. 그것이 물증이 없는 이 사건에서 유죄판결의 유력한 증거였다. 엄마의 가슴에 대못이 박혔다. 엄마는 2001년 광주고등법원에 이런 내용의 탄원서를 냈다.
“(아들 최성필이)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부모의 사랑이 부족하다보니, 어린 마음에 부정한 대답(허위 자백)을 한 것 같습니다. (중략) 존경하는 재판장님, 제가 가진 것이 너무 없어서 변호인 선임을 못 했습니다. 가진 것이 있어 변호인을 선임했으면 이렇게 억울한 선고를 받지 않았겠지요.”
최성필은 당시 1심 법원에서 범행을 부인했다. 경찰에게 구타를 당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법원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 최성필의 범행 부인은 반성하지 않는 모습으로 비춰졌고, ‘괘씸죄‘의 근거가 됐다. 1심 법원은 최성필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2000년 당시 소년법 제59조는 ‘죄를 범할 때에 18세 미만인 소년에 대하여 사형 또는 무기형으로 처할 때에는 15년의 유기징역으로 한다‘고 규정돼 있었다. 결국 15살 최성필에겐 법정최고형이 선고된 것이다. 최성필은 항소했다. 그는 항소이유서에 이렇게 썼다.
“제가 이렇게 누명을 쓰고 형을 살면 어머님과 식구들은 한평생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지금쯤 이번 살인 사건의 진범은 또다른 범행을 꾸미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제가 무슨 죄를 졌다고 이러한 누명을 쓰고 형을 살아야 하는지 앞날이 캄캄합니다.”
하지만 최성필은 2심 재판에서 자신이 살인을 했다고 허위로 말했다.(당시 상황 추후 보도 예정) 사람을 죽이지 않았음에도 어른들에게 거짓으로 용서를 구했다. 거짓말은 반성으로 여겨졌고, 그 대가로 최성필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최성필은 감옥에서 10년을 다 채우고 2010년 25살에 세상으로 나왔다. 그는 이제 서른 살이 됐다. 결혼을 했고 아이도 하나 낳았다. 살인 누명을 쓰게 된 현장, 옛 익산경찰서 앞에서 최성필이 말했다.
“저를 때린 형사들 한 번 만나보고 싶긴 하네요. 저는 당당하거든요. 난 사람을 죽이지 않았고, 죄가 없으니까요. 그 형사들이 저를 만나면 이제 뭐라고 할지..그게 좀 궁금해요.”
2000년 그해, 전북지방경찰청은 택시기사 살인사건을 수사한 익산경찰서 형사들에게 유공 표창장을 줬다. 상금 100만 원과 함께 말이다. 이 돈은 모두 국민 세금이다.
근로복지공단은 2012년 6월 최성필과 어머니 양OO씨에게 1억4000만 원을 물어내라는 구상금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공단은 2000년 사망한 택시기사 유족에게 4000여만 원을 지급했다. 그 돈과 이자 1억 원을 물어내라는 것이 공단의 주장이다. 공단은 “자식을 잘못 키운 어머니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논리도 내세웠다.
10년을 감옥에서 보낸 조작된 살인범 최성필과 식당일을 하며 홀로 자식을 키운 어머니 양 씨. 재심이 열려 최성필이 무죄를 선고받지 않으면 이들은 큰 돈까지 물어내야 한다. 최성필 씨는 많은 괴로움에 2013년 자살을 시도했다.
진짜 살인범은 단 하루도 처벌받지 않았다. 최성필을 수사했던 그때 그 형사들은 거의 모두 현직에 남았다. 이들은 그동안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최성필을 때리지 않았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