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슬리퍼 끈이 툭 끊어졌다. 큰딸과 부동산을 돌며 세 모녀가 살 집을 둘러보던 중이었다.

‘말복 더위에 신발까지 말썽이라니.’

엄마는 갑작스레 벌어진 소동에 피식 웃음이 났다. 엄마는 바닥에 신발을 끌며 급히 신발가게를 찾기 시작했다. 운 좋게 금세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엄마는 딸의 손을 붙잡고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보물 1호, 우리 딸.
엄마 슬리퍼 사는 김에 네 신발도 사자. 하나 골라봐.”

엄마는 짱짱한 모양새의 노란 슬리퍼를 골랐고, 딸은 은색 샌들을 집어 들었다. 은빛 주름이 곱게 자리 잡힌 샌들은 ‘보물 1호’ 큰딸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잘 어울렸다.

사실 그날의 짧은 소동은 엄마에게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햇볕이 내리쬐는 한여름, 슬리퍼 끈이 끊어지는 일은 종종 벌어지는 법이니 대수롭지 않게 그 일을 넘겼다.

“엄마. 이 신발, 엄마 마음에 들면 엄마가 신을래?”

“너랑 나랑 발 사이즈가 다른데 엄마가 어떻게 신니? 얘도 참.”

여느 날과 다른 점이라면 딸의 태도였다. 딸은 마치 새 신을 신지 않을 것처럼 엄마에게 자신의 샌들을 신고 다니라고 말했다. 점심에는 처음으로 엄마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어렸을 때 그렇게 ‘어머니’라 부르라고 가르쳐도 단 한 번 안 하던 아이였는데, 그날은 “어머니, 잘 드시네요” 하면서 엄마 숟가락에 반찬까지 얹어줬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엄마는 그 말이 참 좋았다.

딸이 죽던 그날, 엄마 장연록 씨가 산 딸의 샌들과 본인의 슬리퍼. 엄마는 딸의 슬리퍼를 차마 신을 수 없어 신발장이 아닌 집 안에 두었다. ⓒ 주용성

그게 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큰딸 양진희(가명, 당시 34살)는 강아지에게 밥을 주러 먼저 집에 가겠다고 나선 뒤 서울의 한 건물 18층에서 자기 몸을 던졌다. 투신 시각은 2009년 8월 28일 오후 8시 18분이었다. 준비된 죽음 같았다. 딸이 세상을 등지던 시각과 장소는 끼워 맞춘 듯 모두 숫자 18을 향해 있었다. 뒤늦게 발견된 딸의 마지막 메모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그들의 노리개였다. 죽음만이 살 길이다’

성폭력 피해 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양진희(가명, 75년생), 양선희(가명, 79년생)의 어머니 장연록 씨의 모습. ⓒ주용성

둘째 딸마저 자살… 아빠는 뇌출혈로 숨 거두다

‘신발 끈이 끊어지면 이상한 기운이라도 느꼈어야 했는데. 엄마 주제에 난 왜 아무것도 느끼지 못 했을까.’

신발 끈이 끊어지듯 딸 목숨도 끊어졌다. 엄마 장연록은 감당 못 할 슬픔에 빈소를 차릴 생각을 못 했다. ‘신발 선물에는 이별이 뒤따른다’는 믿기 싫은 미신처럼 딸이 엄마 품을 홀연히 떠나버린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큰딸의 여동생 양선희(가명, 당시 30살) 또한 슬픔에 몸을 가누지 못했다. 언니의 불행에 자신이 일조했다는 생각에 괴로워했던 차에 벌어진 일이라 슬픔은 더했다.

며칠이 그렇게 무상하게 흘렀다. 오직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엄마는 막내딸을, 막내딸은 엄마를 위로하는 것뿐이었다. 큰딸이 가고 엿새째가 되던 밤, 둘은 오랜만에 함께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큰딸 사진은 두 사람 사이에 두었다. 둘은 세 모녀의 단란했던 시절을 회상하며 잠시 그때의 모습을 떠올렸다. 울어도 울어도 진희에 대한 그리움에 두 사람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해가 떠오르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막내딸은 느닷없이 언니의 마지막 날에 관해 물었다.

”엄마. 언니 가던 날, 혹시 샤워했어?”

“그게 무슨 말이니?”

“우리 20년 뒤에 만나요.”

“그게 무슨 말이냐고!”

“20년이 너무 빠르면 우리 30년 뒤에 만나자.”

큰딸을 잃은 상실감이 엄마의 눈과 귀를 모조리 막아버린 걸까. 엄마는 그날의 대화가 또 다른 죽음을 예고한다는 사실을 당시에 눈치 재지 못했다. 문을 나설 때마다 ‘다녀오겠습니다’란 말을 하던 막내딸이 그날따라 그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도 뒤늦게 알아챘다.

2009년 9월 3일, 언니가 죽고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그날 막내딸 선희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후에야 모든 것이 조각처럼 맞춰졌다.

두 딸의 잇따른 죽음은 아빠의 병세를 급속도로 악화시켰다. 뇌출혈로 수술을 받고 병상에 누워있던 아빠는 끝내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막내딸이 죽은 지 꼭 두 달째 되던 2008년 11월 3일, 아빠는 두 딸이 먼저 걸어간 그 황망한 길을 말없이 따라갔다.

엄마는 말 그대로
줄초상을 치렀다

세상에 어디에도 엄마 편은 없는 것 같았다.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보였다. 친척들마저 자살 가족을 불경하게 여기는 것 같았고, 텔레비전에서는 두 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성범죄자들 이름이 버젓이 등장했다. 배고파서 정신을 잃을 것 같을 때만 끼니를 챙기는 탓에 엄마의 몸무게는 37kg까지 빠졌다. 혼자 밥을 먹을 때면 딸 생각이 더욱 간절해져서 숟가락을 들 수 없었다.

엄마는 막내딸 선희가 남긴 마지막 말을 곱씹으며 두 딸을 죽인 그놈들을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이유는 선희의 유언 때문이었다. 특히 엄마라는 단어에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선희의 마지막 말은 이랬다.

“엄마는 복수하고 와라. 엄마는 강하니까 할 수 있을 것 같다”

큰딸 양진희(가명), 막내딸 양선희(가명)의 영성사진과 가족사진. ⓒ주용성

딸을 사지로 몬 건 가해자지만, 죽인 건 경찰이었다

비극은 2004년 여름부터 시작됐다.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하던 진희는 동생의 권유로 방학 중에 단역배우 출연, 이른바 ‘엑스트라’ 아르바이트로 용돈 벌이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일은 바빴다. 지방 일정이 많은 드라마 촬영 특성상 외박이 잦았다. 유명 가수 백댄서였던 동생 선희는 학교 수업이 없고 무대 일정이 없을 때만 엑스트라 일을 해서, 언니가 동생보다 촬영을 더 많이 나갔다.

진희가 돌연 이상 행동을 보인 것은 그로부터 두어 달 지나서부터였다. 옷을 벗은 채로 방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XXX. 죽여버릴 거야”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뇌고 다녔다. 집 안 살림살이들은 닥치는 대로 때려 부쉈다. 쟁반에 칼질을 하면서 누군가를 계속 저주하기도 했다. 진희는 급기야 가족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엄마와 동생 선희는 그런 진희가 걱정되면서도 무서웠다.

“어머니, 놀라지 마십시오.
정신과 상담 중에 따님께서 얼마 전에 성폭행을 당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희의 기이한 행동의 원인을 알게 된 것은 그해 11월 병원에서였다. 딸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달래보고자 정신과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하던 중, 딸이 의사 선생님에게 자신의 강간 사실을 쏟아낸 것이다. 이틀 전 이와 비슷한 얘기를 하는 걸 들었을 때는 단순히 건강이 좋지 않아 내뱉은 헛소리인 줄만 알았다.

‘집단 성폭력에 관여되었다’는
첫 고백 이후 날로
구체화된 증언을 풀어놓았다

엄마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울화가 치미는 것을 넘어 가슴에 천불이 났다. 엄마는 어떻게든 진희를 설득해 경찰에 이를 고소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건의 윤곽이 드러날수록 실체는 충격을 더해갔다. 단역배우들을 관리하는 반장, 그리고 반장을 보조하는 보조 반장 등을 포함해 업계 관계자 12명이 딸을 집단 강단 및 성추행했다는 믿을 수 없는 폭로가 딸의 입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딸의 증세는 점점 악화됐다. 진희는 결국 입원했다.

“강제로 술을 먹게 한 후 비디오방으로 끌고 간 후 강간했습니다.
소리쳤더니 입으로 막고 ‘찍어 놓은 알몸사진을 인터넷에 올린다’고 했습니다.
‘니 엄마를 죽인다’고 했습니다.
‘니 동생을 팔아넘긴다’라고 했습니다.
– 양진희 씨가 경찰에 우편 진술한 내용 일부

장연록 씨가 두 딸의 유골함을 두 손으로 움켜잡고 있다. ⓒ주용성

지금까지의 비극은 서막에 불과했다. 경찰에 고소하기만 하면 억울한 딸의 사연이 낱낱이 밝혀져 그놈들이 정의의 심판대에 오를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2004년 12월 경찰에 고소한 이후 수사는 진척이 없었고 기대는 금세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경찰은 처음부터 진희의 편처럼 보이지 않았다. ‘100% 질 게 뻔한 소송을 왜 하냐’면서 수사를 빨리 종결짓겠다는 말을 서슴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가해자의 성기 색깔과 길이를 그려보라’까지 했다.

괜찮아졌던 정신질환이
다시 악화된 것도
그 경찰들 때문이었다

진희는 집에 있는 구멍은 죄다 종이로 막으면서 몰래카메라와 도청장치가 설치될지 모른다는 말을 하는 등 또다시 강한 불안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증언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탓에 경찰은 진희에게 그때 일을 계속해서 증언하도록 몰아세웠다. 검찰로 사건이 송치되고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소극적인 수사와 강압적인 분위기는 진희의 목을 계속 죄어왔고, 결국 고소를 취소하도록 만들었다.

‘딸을 사지로 몬 것은 가해자들이지만, 딸을 정말 죽인 건 경찰’이라고 엄마는 생각했다.

딸 강간한 가해자들, 엄마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다

엄마는 텔레비전을 볼 수 없었다. 너무 울어서 실명 위기 진단을 받기도 했지만, 드라마 자막에 내 딸을 강간한 놈들의 이름이 나오는 꼴을 감당할 수 없었다. 가해자 대부분은 여전히 단역배우 기획사에 종사하고 있었다.

항간에 ‘그놈들이 아들딸 낳고 잘살고 있다더라’ 말이 들리면 엄마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다. ‘저 놈들 때문에 내 딸들은 한 줌의 재가 됐는데’ 엄마는 매일매일 애꿎은 가슴만 치며 슬픔을 삼켰다.

‘혹시 내 이름이 부정 타서 딸들이 죽은 게 아닐까’ 싶어 개명까지 한 엄마였다. 자식이 죽으면 모든 게 부모 탓인 것처럼 느껴지는 게 바로 엄마의 심정이다. 모든 걸 제자리로 돌릴 수만 있다면 개명 뿐이겠냐, 목숨도 내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놈들은 엄마와 다른 이유로 개명했다는 소문이 여의도 바닥에 떠돌았다. 12명의 가해자 중 2명이 개명을 했는데, 딸들의 죽음과 자신들이 연관되는 것이 싫어서 그랬다는 풍문이 엄마 귀에까지 들렸다.

‘어떻게 해야 그놈들에게 복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죽어서 딸들 볼 면목이 설까.’

엄마는 뒤늦게나마 가해자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제기하기로 했다. 두 딸의 목숨값과 엄마의 정신적 피해가 돈으로 환산될 리 만무하지만, 딸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최소한의 일이라 생각했다. 엄마는 2014년 4월 서울중앙지법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장연록 씨가 여의도 단역배우 기획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모습. ⓒ주용성

1인 시위도 했다

가해자들의 기획사 앞에서 딸을 강간하고 강제추행한 12명의 이름을 내걸고, 엄마는 억울한 마음을 푯말에 담아 주변에 알렸다. ‘강간하고 살인한 자들이 아직도 반성하지 않는데 내 두 딸의 영혼은 하늘을 맴돌고 있다’는 말을 보고 누구라도 그놈들을 피해갈 수 있다면 족했다. 당시 소송을 대리하던 변호사는 ‘그놈들이 인간이라면 어머니를 차마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지만 못할 것’이라고 했었다. 최소한의 죄책감이라도 있다면 그럴 거라고 엄마도 생각했다.

“경찰입니다. 여기 신고가 들어왔어요.
누가 길거리에서 명예훼손을 하고 있다고요.”

우려는 현실이 됐다. 딸을 성폭행한 가해자의 동생이 엄마를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그 사람은 엄마에게 욕을 쏟아부으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리려고 했다. 그런 이유로 1인 시위는 일주일도 채 하지 못하고 접어야 했다. 그 뒤로도 가해자들의 음해는 멈추지 않았다. ‘민사소송을 걸어서 엄마를 알거지로 만들겠다’는 얼토당토않은 소문들은 다시 엄마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이 일은 결국 법정까지 향했다. 정작 손해배상 소송은 3년의 소멸시효가 지났다며 기각되었지만, 가해자들이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은 엄마를 기어코 피고인석에 앉게 했다.

사실 ‘명예훼손을 걸겠다’고
엄마를 협박한 이들은 더 있었다

딸을 강간했던 한 가해자의 부인은 경찰 조사가 시작될 무렵 전화로 ‘회사 사람들 앞에서 (엄마 장연록이 내 남편을) 개망신 줬으니 당신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심지어 경찰도 같은 협박을 했다. 딸이 죽고 10년 만에 만난 조 모 경찰관이 ‘이상한 말로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있다’며 ‘엄마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말했다.

다행히 가해자들이 제기한 명예훼손 판결은 무죄로 결론 났다. 판사의 말은 엄마에게 작은 위로가 됐다. 판사는 판결문을 통해 ‘공권력이 범한 참담한 실패에 깊은 좌절과 슬픔을 금할 수 없다’면서 ‘공권력의 한 수임자로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사과와 간곡한 위로의 뜻을 전한다’고 했다. 하지만 엄마 가슴에 꽂힌 비수는 큰 흉터를 남겼다.

가해자들이 제기한 명예훼손 고소는
딸들을 두 번 죽이려는 짓이었다.

장연 씨가 여의도 단역배우 기획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모습. ⓒ주용성

엄마의 복수는 이제 시작이다

“아무래도 서지현 검사 꿈에 우리 딸들이 나온 것 같아요.”

엄마는 단 한 번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폭로 이후 촉발된 미투 운동에 힘입어 딸들의 억울한 죽음 이면이 이제서야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미투 운동이 일지 않았으면 엄마는 이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자살 결심 이후 딸들을 흙으로 돌려보내고, 유골함을 엄마 품으로 다시 가져온 것은 불과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오기 두 달 전이었다.

엄마의 복수는 이제 시작됐다. 두 딸을 죽음에 이르게 한 내막을 세상에 밝히고, 성폭력 가해자가 피해자 입을 막으려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돕고 싶다. 엄마가 눈물로 밥을 넘기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막내딸의 마지막 유언을 지키기 위해 엄마는 두 딸의 영정사진을 옷소매로 훔치며 오늘을 산다.

“보물 1호, 보물 2호야.
엄마가 꼭 원수 갚고 갈게. 그때 다시 보면 엄마 너무 늙었다고 모른척 하면 안돼.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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