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스토리펀딩에서 2015년 5월 28일 공개한 기사입니다. 스토리펀딩에서 보기]
만약, 친한 친구가 사람을 살해한 뒤 숨겨달라며 당신에게 찾아온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끔찍한 가정과 질문, 미안하다. 나 역시 사건기록을 읽으며 여러번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임OO도 수없이 스스로에게 물었을 것이다.
“사람을 죽이고 왜 내게로 왔을까? 왜 하필 나란 말인가!”
익산시 약촌오거리에서 택시기사가 끔찍하게 살해된 2000년 8월 10일 새벽 2시께. 그 순간 그는 친구 오OO 집에 있었다. 살인범 김OO에게 전화가 왔다. 숨을 헐떡이며 불안한 목소리였다.
“나 지금 너희 집 근처에 있다. 빨리 좀 와줘라.”
친구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 임OO은 오OO와 함께 집으로 달려갔다. 집 계단 어두운 곳에 김OO이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김OO이 오OO의 어깨를 잡았다.
“너는 들어오지 마라. 그냥 집으로 돌아가.”
방으로 들어가 방을 켜니 김OO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옷 상의 앞면에 잔뜩 묻은 붉은 피, 땀범벅이 된 불안한 얼굴, 안절부절 못하는 태도, 떨리는 목소리..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김OO이 강도짓을 하려 택시를 탔고 뒷좌석에서 칼을 꺼내 택시기사를 공격했다고 했습니다. 몇 번을 공격했는지 모르겠고, 택시기사가 살기 위해 운전석 문을 열었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 얼굴을 보면 안 되니, 공원을 가로질러 저희 집으로 왔다고 했습니다.” – 2003년 6월 5일 작성된 임OO 1차 피의자신문조서에서
김OO은 피 묻은 옷을 벗어 자신이 가져온 검은색 가방에 넣었다. 그때 칼이 든 종이상자가 보였다. 택시기사를 공격한 그 칼이었다.
“칼을 보자고 하니 김OO이 칼을 꺼내 저에게 보여줬습니다. 종이상자에는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칼은 가정집에서 쓰는 식칼이었는데, 칼끝이 휘어져 있었습니다. 칼날 군데군데 피가 묻었고, 돼지비계 모양의 지방분도 보였습니다.” – 1차 피의자신문조서에서.
살인범 김OO은 이 칼을 친구 임OO의 침대 매트리스 밑에 숨겼다. 범행 현장과 임OO의 집은 가깝다. 창밖으로 범행현장이 보일 정도다. 둘은 창밖을 통해 경찰이 현장 조사하는 것도 지켜봤다. 임OO이 말했다.
“네가 사용한 칼 찾나 보다.”
김OO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둘은 택시기사의 사망 여부를 몰랐다.
“택시기사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지 않고 그곳에서 도망쳤다고 했습니다.”
날이 밝아도 둘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TV시청과 인터넷으로 시간을 보냈다. 택시기사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그날 늦은 오후 임OO의 아버지가 알려줬다. 임광원(가명)씨가 아들과 친구에게 “밤길 조심해라, 요 앞에서 살인사건 났으니까 밤에 돌아다니지 마라“라고 말했다.
김OO은 약 열흘간 임OO의 집에서 나가지 않았다. 경찰에 검거될까 봐 우려했다. 인터넷과 TV로 사건 수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챙겨보기도 했다. 살인범 김OO은 태연하게 지내지 못한 듯하다.
“인터넷 뉴스 검색으로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을 경찰이 수사하고 있다는 내용을 보고 (김OO은) 저의 집에 있는 동안 식은땀을 흘리고 안절부절 못하고 불안해했습니다.” – 1차 피의자신문조서에서.
시간이 지난 뒤, 둘은 익산경찰서가 엉뚱하게 15살 최성필(가명)을 살인범으로 체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들은 그가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다가 체포됐는지도 알았다.
“익산시 영등동 소재 OO다방 오토바이 배달원이 범인으로 검거됐다는 걸 (훗날) 김OO이 택시기사에게 들었고, TV를 보고서도 알았습니다.” – 1차 피의자신문조서에서.
엉뚱한 사람이 살인범으로 체포된 상황. 이를 알고 둘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인간적으로 괴로운 심정이었을까?
“황당했지만 제가 김OO에게 ‘너한테는 천만다행이지만 그 사람(최성필)에게는 참 재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그 사람이 잡혀갔을까, 경찰이 사건을 빨리 종결하고 싶었나보다‘고 말했습니다. 김OO은 아무 대꾸하지 않고 ‘빨리 잊고 싶은데 (사건이) 머릿속에 맴돈다‘고 했습니다.”
임OO은 경찰서에서 “김OO이 범인인 걸 알면서도 경찰에 붙잡히지 않도록 도왔다“며 “시간도 많이 흘렀고, 다른 사람이 범인으로 살고 있는 상태에서 김OO이 교도소에 가는 게 싫어 신고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임OO은 피의자신문조서 마지막에 이렇게 적으며 친구를 걱정했다.
“제 친구 OO이를 선처해 주세요. 제가 그 당시 OO이를 설득하여 자수하도록 했어야 됐는데, 그러지 못해 지금은 많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제 친구를 선처해 주세요.”
임OO 역시 범인은닉죄로 피의자 신분이었다. 그의 진술은 김OO의 자백과 정확히 일치한다. 지난 기사 ‘살인범의 놀라운 자백..그래도 풀려났다‘를 확인하면 그 일치를 확인한 수 있다.
범행 이유, 범행 도구와 수법, 칼로 택시기사를 공격했을 때 칼 끝에 ‘딱!’하고 뼈가 걸렸다는 느낌, 택시기사가 운전석 문을 열었다는 진술, 도피 방법, 범행 도구인 칼을 숨긴 방법..
임OO은 살인범의 친구이면서 그를 숨겨준 당사자다. 살인범을 숨겨준 사람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진술하는데도, 심지어 그 진술이 살인범의 자백과 일치하는데도, 검찰은 이들을 구속시키지 않았다. 심지어 임OO의 부친 임광원의 진술마저 이들의 말과 일치한다.
경찰 : 아들의 진술에 따르면, 당시 아들에게 “이 앞에서 택시강도 사건이 났다, 밤 늦게 돌아다니지 말아라”라고 이야기했다는데 사실인가요?
부친 임광원 : 정확한 일시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제가 아들에게 집 앞에서 살인사건이 났으니까 밤 늦게 돌아다니지 말라고 이야기한 적은 있습니다. – 2003년 6월 20일 참고인 진술조서에서
앞서 여러 번 언급한 대로 김OO, 임OO은 각각 네 차례, 다섯 차례 같은 취지의 내용으로 자백했다.
그럼에도 검찰은 계속 구속영장을 청구하지 않았다. 황상만 전 군산경찰서 형사반장은 포기하지 않고 이 사건에 매달렸다. 그는 많은 관련자 진술을 확보했다. 김OO과 임OO은 사건 당시 10대 후반이었다. 자기들만 알기에는 살인사건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을까?
이들은 여러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약촌오거리 진짜 살인범은 바로 김OO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그 말이 황상만 전 반장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말만 떠돌아 다닌 게 아니다. 물증을 본 사람도 여럿이다.
“칼 끝이 휘어졌고, 피와 돼지비계 같은 게 묻어 있었다.“
범행 도구인 칼을 목격한 임OO의 놀라운 진술. 이 칼을 목격한 사람은 그 혼자만이 아니다. 복수의 사람이 이 칼을 봤다. (추후 보도 예정)
검찰이 계속 구속영장을 청구하지 않자, 김OO과 임OO은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등 범행을 부인하기 시작한다. 살인사건을 저지른 자와 살인범을 숨겨준 친구. 이 엄청난 사실을 가슴에 안고 이들은 온전히 살 수 있었을까?
끝까지 살인범 친구를 걱정했던 임OO. 이후 그는 여러 문제로 우울증을 앓는 등 힘겹게 살았다고 한다. 그는 지난 2012년, 자신의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의 진실을 아는 또 한 명의 친구가 그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의 장례식은 경기도 안산의 한 병원에서 치러졌다. 진짜 살인범 김OO도 자신을 끝까지 지켜준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나저나, 끝내 이들을 구속시키지 않은 정OO 검사는 결정적 증인 임OO의 죽음을 알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