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처음 성전환 수술을 한 사람은 누구일까? 성전환 수술과 관련한 최초의 신문 보도는 1955년 8월 15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가십성 기사 한 건이다.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 조선시대 혹은 그 이전에도 트랜스젠더는 우리들 사이에 분명 존재했을 터. 고려 공민왕이 트랜스젠더 혹은 게이였을지 모른다는 기록도 있다.
그 오랜 역사를 모두 따라 올라갈 순 없지만 궁금했다. 사회의 시선이 더 차가웠을 그때 그 시절, 트랜스젠더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과거보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차별이 줄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다.
1961년생, 올해 나이 58세. 1980년대 초반부터 서울 이태원과 종로, 부산, 대구 등을 옮겨 다니며 트랜스젠더 클럽에서 일했다는 양민수(가명) 씨를 꼭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다.
그녀에게 연락을 취하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한때 양 씨와 함께 트랜스젠더 클럽에서 일한 적 있는 정태연(가명) 씨에게 부탁했다.
고향 울산에서 각각 13세, 15세인 남동생의 자녀를 돌보며 밤에는 노래방에서 일하는 양민수 씨를 만나려면, 일요일 오후, 조카들이 교회에 가고 집에 없는 시간에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야 했다.
양 씨가 낯선 기자를 경계한 터에 정태연 씨가 인터뷰에 동행했다. 양민수 씨는 고모가 트랜스젠더인 걸 모르는 조카들이 상처받을까 봐 사진 촬영을 난감해 했다.
양해를 구해 정면 사진을 찍지 않는 것으로 합의했다. 인적 드문 바닷가 카페에서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트랜스젠더’ 다섯 글자를 입에 담는 걸 어려워했다. 그 단어를 꼭 써야 할 땐, 목소리를 최대한 줄여 “트…”라고 얼버무렸다.
양 씨는 본명과 일할 때 쓰는 가명을 합해 이름이 네 개다.
양 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에서 스스로를 숨기기 위해 지은 이름이다. 60세를 바라보는 그녀가 지금껏 숨어 지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녀의 육성으로 직접 담았다. 양 씨 요청으로, 본문에는 모두 실제와 다른 이름을 사용했다.
이름 양민수 시절
나 어릴 땐 “트…”라는 말도 없었어. 우리같은 사람들을 ‘장미족(1971년 일본에서 창간된 남성동성애 잡지 <장미족>에서 유래된 말로, 남성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를 넓게 가리키는 말로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이라고 불렀던 것 같아.
아니면 그 왜… ‘호’로 시작하는 말 있잖아. 근데 나는 한 번도 티내면서 다닌 적이 없어서, 직접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은 없어. 학교 다닐 때도 결석 한 번도 안 하고 조용한 애였거든. 근데 나중에 들어보니까 실제로 길에서 돌 맞고 그랬다는 애들이 있더라.
나 어릴 때부터 사람들이 참 그랬어. 우리 엄마가 많이 아팠거든. 그래서 내가 살림을 다 맡아서 했어. 물도 뜨러 다니고.
기자님은 그 또바리(‘또아리’의 전라도 방언)라고 모르지? 그게 뭐냐면 머리에 물동이 일 때 밑에 받치는 그 동그란 거거든. 보통 남자들은 물 뜨러 가도 물지게 졌지, 또바리로 머리에 이고 다니지는 않았어. 근데 이상하게 나는 그게 편하더라고.
어떤 사람들은 남자가 그러고 다닌다고 쟤 거시기 떼야 한다고 그러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나보고 효녀, 아니 효자라고 먹을 것 주고 그랬어. 자기들 보고 싶은 것만 본 거지.
고2 때 엄마가 마흔 넷 나이에 돌아가셨어. 그래서 그런지 난 삶에 대한 애착이 그렇게 크지가 않았어. 여자 옷 같은 거 따로 사서 입어 볼 생각도 못 했어.
그래도 혼란스럽긴 했지. 근데 어디 티를 낼 수나 있나. 그냥 “못 하실 게 없으신 하나님, 내일 아침 자고 일어나면 예쁘게 변해 있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했어. “이 세상에 나같은 사람이 한두 명이나 더 있을까” 생각하면서.
이 세계를 고3 겨울방학 때 알았어. 저기 울산 시내에 조그마한 가게가 하나 있었어. 술집이라기엔 좀 크고, 나이트클럽이라기엔 또 작은 그런 가게였는데, 거기서 서빙 등을 했어.
몰라, 나는 티를 안 냈다고 생각하는데 주인 언니 눈에는 뭐가 보였나 봐. 손님 없어 한가하면 나를 불러다 놓고 화장도 살짝 해 주고, 어느 날은 파마도 살짝 해 줬어.
하루는 서울에서 놀러 온 손님이 있었는데, 나를 딱 보고는 그러는 거야.
“얘, 서울 가면 이태원이라는 데 있는데 거기 너같은 애들 많아, 넌 거기 가서 일해야겠다.“
그 손님이 주소, 전화번호 다 적어 줬어. 그걸 들고 기차 타고 서울로 간 거지. 이태원에 ‘보카치오’라는 가게가 있었어 지금도 있을 걸? 거기랑 ‘열애’랑 양대산맥이었지.
내가 거기 도착한 게 한 오후 네다섯 시 됐나봐. 조금 있으니까 하나둘 출근을 하더라고. 난 어린 축이었어. 낮에는 방위 서는 빡빡머리인데 밤에는 가발 쓰고 일하러 오는 스물 두 살 오빠도 있었고, 결혼 한 번 하고 돌아온 서른 몇 살 먹은 사람도 있었어.
근데 정말 서른 명 쯤 있으면 서너 명만 빼고는 그때 내 눈엔 그냥 싹 다 아저씨로 보였어. 내가 봐도 좀 무섭더라고. 사람들이 도깨비처럼 본다고 해서 우리끼리 서로를 “깨비”라고 했거든. 내가 봐도 사람들이 왜 그런 눈을 하는지 이해가 됐다니까.
이름 진주 시절
손님이 일러 준 대로 이태원에 가긴 갔는데, 도무지 일 할 용기가 안 났어. 3일인가 일주일인가 있다가 다시 울산으로 내려왔어.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가 반 년 만에 재가했거든. 새엄마랑 한집에 지내는 게 편하지가 않았어.
그리고 서른 명 중에 서너 명은 정말 예뻤다고 했잖아. 내가 거기에 포함될 수 있겠더라고. 큰 맘 먹고 다시 3일 만에 짐 싸서 이태원으로 올라간 거지. 근데 보카치오에서도 일주일 정도만 있었어. 팁 받으면 영업 끝나고 다 모았다가 연차 별로 나눠 갖는 룰이 있었거든.
어린 애들이 개인 팁 꼬불쳐 놓기도 하고 그랬는데 나는 그럴 수 있다는 것도 몰랐어. 근데 어떤 손님이 내 옷 흘러내려온 걸 잡아올려 줬는데 언니들이 그걸 보고는 팁 꽂아줬다고 오해한 거야.
새벽에 옥상 올라가서 언니들이 옷 벗겨 확인한다고 하는데 너무 억울하고 자존심 상하는 거야. 그 길로 짐 싸들고 종로에 있는 친구한테 갔지.
그때가 1980년대 초반이니까 전두환 대통령 시절이잖아. 종로3가 뒷골목에 가면 요정집이 엄청 많았다고. 우린 그때가 좋았어. 검은 돈이 많이 돌았거든. 기생 관광도 성행하고. 나라에서 아시안게임인가 그런 거 연다고 요정집들에 융자 내주고 그랬거든.
큰 집은 아가씨가 백 명, 이백 명씩 있었어. 그 옆이 보갈(성소수자들 사이에서 게이를 이르는 은어) 골목이었는데, 보갈 가게들 사이에 트랜스 가게가 딱 하나 있었어. 거기 친구가 일하고 있었거든. 친구 덕에 그 가게에서 나도 일을 할 수가 있었던 거야.
내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좀 일찍 (정체성을) 깨달았다고 했잖아. 하리수도 아직 안 나왔을 때니까 자기가 트랜스인줄도 모르고 살았지 다들. 그래서 사람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어.
사장들이 “종로나 이태원에 누구 어리고 예쁜 애가 있다더라”하면 그 가게에 손님인 척 가서 종이 쪽지에 자기 연락처랑 월급 얼마 주겠다 적어서 건네고 그랬어. 그 때 서울은 월급제가 아니었거든. 나도 그렇게 대구로 스카웃이 된 거지.
처음엔 트랜스젠더 클럽이 이태원에 세 개, 종로에 하나, 부산에 서너 개 뿐이었어. 1980년대 중반에 전국으로 퍼지기 시작했어. 그땐 사람들이 호기심에 진짜 많이 왔어
연예인부터 대학교수, 또 호스티스 바에서 일하는 여자애들도 손님으로 오고 그랬어. 대구에도 예닐곱 개인가 생겼어.
대구로 옮긴 지 얼마 안 돼 단속이 심해졌어. 단속 피해 간 곳이 부산이야. 부산에서도 트랜스젠더 바에서 일 했어. 아, 하리수도 그때 처음 봤지. 그냥 남자 모습으로 찾아왔는데, 그때는 뭐랄까 꽃미남 스타일이었어. 타고난 거지. 요즘 유명한 BJ A라고 있지, 걔도 내가 데리고 있었는데 걔는 좀 노력파였고. 잘 때도 몸매 관리한다고 복대 두 개씩 하고 자고 그랬어.
‘진주’는 부산에서 일할 때 사장이 지어 준 이름이야. 진주같이 귀한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지었지. 태연이 이름도 내가 지어줬지만, 이 세계에선 이름 잘 짓는 게 진짜 중요해.
이쪽 세계에서 한 서른 넘은 애들은 ‘진주 언니’ 하면 전국 어디서든 내 얘긴 줄 다 알거야. 지금도 교회 사람들은 전부 나를 진주로 알아. 그러니까 이름 절대 기사에 내보내면 안 돼.
부산에서 일 할 때 내가 무대에서 춤 추는 걸 보고 어떤 밤무대 프로덕션 사장이 “너 ‘디스코 걸’ 안 해볼래?“해서 나이트클럽에 가서 춤 추는 일을 했어. 트랜스젠더 바가 아닌 곳은 거기가 처음이었어.
그러니까 다른 트랜스젠더들은 일할 수 있는 데가 바 하나만 있는데 나같은 경우는 두 가지 일을 다 할 수 있으니까 트랜스 바 지겨우면 일반 업소 일 하고 그랬었지.
사람들 눈 피하려고 속옷 안에 테이핑 하고 그랬어. 종로에서 일 할 때부터 호르몬 주사를 맞았는데, 나는 어려서부터 맞아서 그런지 가슴이 일찍, 빨리 나왔어. 그래서 테이핑만 잘 하면 사람들이 진짜 여자로 알았지.
수술도 부산에 있을 때 했어. 옛날에 어떤 언니들은 ‘사짜 의사’한테 여관방에 신문지 깔아놓고 수술 받았다는 소문도 들은 적 있어. 그땐 여자 꺼 만들지는 못하고 (남자 성기를) 자르기만 한 건데, 의사가 자기도 겁이 나서 소주 한 병 들이키고 수술 했대.
우리 때는 병원에서 했는데 무섭긴 마찬가지였어. 1차로 남자 성기 없애는 수술은 B 박사한테 했고, 2차 여자꺼 만드는 수술은 C 박사한테 했어. C 박사가 그때 우리들 숙소로 쓰던 여관방 주인 언니 친척이었어. 나랑 친구랑 “우리도 수술 해야하는데 어떡하지” 고민하고 있으니까 여관 언니가 그 박사한테 가서 상담 한 번 해보라더라고.
성형외과 의사였는데, 성전환 수술 경험은 없던 사람이었어. 서로 내가 먼저 하네, 네가 먼저 하네 했었는데 친구가 나보다 용기가 있었지. 그땐 부분마취로 해야 한다는데 난 전신마취 아니고는 못 하겠더라고. 그래서 친구가 그 의사 첫 번째 환자가 됐고, 내가 두 번째 환자였어.
그 의사가 지금 이렇게 유명해질 줄 그땐 몰랐지. 그때쯤 하리수가 배우로 데뷔했는데, 우리 세계에선 어딜 가나 그 얘기뿐이었어. 하리수 나온 게 솔직한 마음으로 나는 좀 싫었지.
다들 욕했어. 그 전까지는 우리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모르니까 나이트에서 일해도 트랜스젠더냐고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어. 근데 그때부터 목소리 조금만 허스키하게 내도 “너 혹시.. 하리수..”하고 의심을 하더라고.
걔가 나오면서 잣대가.. “(트랜스젠더는) 하리수처럼 예쁘다“ 하고 정해졌잖아. 근데 진짜 몸무게 백 킬로그램 나가고 선 굵게 생긴 사람도 실제로 있어. 키 185cm 넘는 애들도 있고, 안 예쁜 애들도 많단 말이야. 어깨 있고 이런 애들은 막…
그래도 동전의 양면 같았어. 내가 마담 일을 좀 일찍 시작했는데, 하리수 나오고 나서부터 가게에서 일 해보겠다고 찾아오는 애들이 확 늘었지. 그때를 기점으로 숨어 살던 애들이 자신감을 갖고 다 나온 거야.
태연이도 그 중에 하나였잖아. 그전까진 우리 월급이 백만 원, 그냥 여자애들 월급이 백오십이었다면 그때부턴 우리가 200만 원씩 받고 그랬어. 나이트클럽같은 데서도 아예 우리들 쇼를 따로 했으니까 숨길 필요도 없었지. 솔직히 안 숨기고 일 하면 편하긴 편해.
친구 둘이랑 광주에 가게 차린 것도 그때 쯤이야. 근데 그것도 오래 못 갔어. 같이 하던 친구 한 명이 손님으로 왔던 남자랑 사귀다가 결혼했거든. 잘 된 거지. 그런 것도 있었고.. 또 2000년에 한 번, 2002년에 한 번 군산 성매매촌에서 주인이 숙소 문을 잠그고 나갔다가 불이 나서 아가씨들이 죽는 일이 있었어. 첫 번째에는 다섯 명이 죽고, 두번째에는 열네 명이 죽었어.
그때부터 유흥업소 단속이 심해졌지. 2004년에 성매매 특별법이 만들어졌잖아. 우리야 성매매를 하는 건 아니니까 종류가 달랐는데도, 싸잡아서 그렇게 된 거야. 그리고 왜 우리나라 사람들 잘 휩쓸리잖아.
꼭 트랜스 업소 아니더라도, 어느 지역에 어떤 아가씨가 에이즈에 걸렸다 하면 전국에 손님이 싹 없어졌어. 그래서 그때 문 연 가게도 금방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어. 그러고 나서는 한 1년인가 지방으로 한 달, 두 달씩 공연 하러 다녔어.
호적은 수술 하고도 몇 년 지나서 2004년에 바꿨어. 그 전에도 수술 한 언니들이 호적 바꾸고 결혼까지 하고 산다는 얘기를 전해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 지방법원인가 가정법원에 산부인과 서류 떼서 들고 갔어. 어떤 여자가 들어와서 옷 벗어보라고 하고 눈으로 밑에 확인 했어. 고추가 달려야 남자, 없으면 여자 그런 잣대로 봤던 거지.
우리나라 옛날에는 인권 이런 게 없었던 것 같아. 판사마다 수술 해도 안 바꿔준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 나는 그런 거 없이 바꿔 줬어. 근데 이상하게 개명 허가는 안 났어. 나 호적 바꾸고 나서 2년인가 지나서 대법원에서 규정(성전환자의 성별정정허가신청사건 등 사무처리지침)을 만들었다고 하더라고.
마담 일도 오래 했지. 마담이 뭐 하는 거냐면 어디 가게 새로 문 연다 하면 애들 팀을 짜서 거기로 보내는 거야. 생긴 게 좀 못나도 끼 잘 떠는 애, 예쁜데 내성적인 애, 완전 우락부락한 애.. 애들 성격을 다 파악해서 적절히 섞어서 보내는 건데, 보통은 마담도 따라가서 일을 같이 하지.
나도 태연이도 지금은 트랜스젠더 바에서 일 안 하는 게, 우리 애들이 시기 질투가 좀 많아. 근데 천성이 그런 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애들을 그렇게 만든 거야. 손님들이 참 못됐었지. 태연이처럼 티 안 나고 예쁘장한 애들은 옆에 끼고 술 마시면서, 우락부락한 애들은 테이블에도 못 오게 했어.
“어이 형님, 군대는 다녀 왔어?” “형님은 오줌은 앉아서 싸나 서서 싸나?” 이랬다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뭐든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잖아.
그러니까 함께 일하는 애들이 태연이같은 애들 안 싫어하고 못 배겼지. 그거 보기 안쓰러워서 내가 일하러 가는 데마다 태연이 데리고 다니고 한 거야.
이름 은실이 혹은 영숙이 시절
요즘은 진주 그 이름 안 써. 10년쯤 됐지. 고향 내려와서 살기 시작하면서는 그냥 일반 업소 나가거든. 손님들이 좀 세련됐다 싶으면 은실이, 질 나빠 보인다 하면 영숙이라고 해.
내가 올해 쉰 여덟인데, 한 마흔 다섯이라고 해도 다들 믿더라고. 단골은 안 만들어. 자주 보다 보면 익숙해지고, 그럼 들통날 일도 생기기 마련이거든.
울산 내려온 건 조카들 때문이야. 나보다 열한 살 아래인 남동생 애들인데, 지금은 큰 애가 열다섯, 작은 애가 열세 살이야. 작은 애가 다섯 살일 때 엄마가 집을 나갔어.
그때 나는 부산에 있었는데, 어느 날 애들이 지들끼리 라면 끓여먹는다고 하다가 끓는 냄비를 엎어버린 거야. 그때 전화 받고 놀라서 달려온 게, 어쩌다 지금까지 거의 10년을 여기 눌러앉게 됐네. 동생이 부인이랑 이혼하고 나서 돈도 다 날려먹어서 개인파산 신청하고 그랬어.
요즘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내가 “트..”인 거 당연히 모르지. 태연이처럼 나도 들킬까봐 조마조마하면서 일 해. 50이 넘었어도 그건 어쩔 수 없어. 100명이면 한 2-3명 알아보는 것 같아.
그래도 나는 태연이보다는 나은 게, 주민번호를 바꿨잖아. 일단 나라에서 여자라고 인정해 준 건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 그래도 밑을 확인해 보자거나 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지.
한 번은 나를 앞에 두고 지들끼리 기네 아니네 내기하다가 싸우는 놈들도 있었어. 경찰 부를 뻔 했지. 근데 사람들이 똑같이 의심 해도, 내가 기라고 인정해 버리는 거랑, 끝까지 잡아 떼는 거랑 또 다르거든.
한 번 같이 일하는 애한테 기라고 했다가 소문이 쫙 퍼질뻔 한 적이 있어. 공장 다니는 동생 대신해서 내가 애들 학부모회의도 다 참석하고 해야하는데, 소문 나면 큰일나는 거지. 요즘 애들 얼마나 무서운데. 고모가 트랜스라고 따돌림 당하면 어떡해.
네 식구 건사해야 하니까 예전 같았으면 걷어차고 나갔을 손님도 요즘에는 참게 돼. 눈 딱 감고 삼십분에서 한 시간은 버텨야 기본급이라도 받거든. 작은 조카가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바지에 오줌을 지렸어. 근데 처음에는 누가 어디 가서 날더러 “엄마야?”하고 물으면 따박따박 “엄마 아니고 우리 고모예요” 하던 애들이 요즘은 안 그래.
애들 보는 게 힘든 때가 70이면 좋은 때가 30이더라고. 그래서 지금까지 일 하면서 버티는 거야. 동생은 내가 이 일 하는 거 알긴 알아. 근데 지보다 내가 나이도 한참 많고, 지 자식들도 다 키워주니까 싫은 소리 못 하는 거지.
아버지는 십년 전쯤 돌아가셨는데, 여동생 결혼식에도 못 오게 했으면서도 내가 일하면서 매달 몇십 만 원 씩 생활비 부쳐주는 건 마다 한 적 없어.
다른 일 해 보려고 한 적이 없는 건 아니야. 옷 장사 아르바이트 좀 해 본 적이 있었지. 카페도 차린 적 있는데 전전세 잘못 들어가서 망했어. 근데 낮일 하고 싶어도 쉽지가 않더라니까. 하루하루 벌어도.. 기술이 없으니까. 내가 가게를 차려서 하지 않는 이상 어렵지. 가게도 요즘 열 집 하면 아홉 집은 문 닫는 상황인데.. 아무튼 이 일이 좋아서 하는 건 아니야.
요즘 드는 생각이 뭐냐면, 젊었을 때 미용이라던가 옷 짓는 거라던가 기술 하나만 배워둘 걸 그랬다는 거야. 나도 쭉 올라갈 거라고만 생각했지 늙은 이런 모습은 상상 못했지. 태연이 법대 들어갔을 때 뿌듯했는데 다시 밤일 하러 나오니까 가슴 아프더라고.
내가 조카들 스무 살 될 때까지는 엄마 노릇 해줘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도, 그런 후회가 들어서 그런 거야. 조카들은 이렇게 안 살게 하려고. 완벽하게 숨기고 살려는 것도 애들 때문이지. 조카들은 고모가 식당에서 일 하는 줄 알아. 말하자면 이중 생활인 건데. 밤에 일 할 때 하도 치마를 입어야 하니까 낮에는 이렇게 긴 바지만 입어. 그래야 애들이 모르기도 하고.
우리 애들이 나처럼 살겠다고 하면 어떡하겠냐고? 백 프로 반대지.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지만 글쎄, 내가 옛날 유교적인 사람이라서 그런가. 사람들의 잣대라는 게 아직은 남자 여자 딱 그것밖에 없잖아.
우리 애들도 얼마 전에 같이 길을 가는데 어떤 남자더러 “저 사람 동성애잔가보다”하고 수군대더라고. 뭐 나쁘다고 한 건 아닌데 그래도 가슴이 덜컥 했지. 난 그냥 끝까지 완벽하게 숨어 사는 것, 그것 말고는 더 바라는 것 없어 나는.
세상이 달라지면 모를까.
(2018년 카카오 스토리펀딩에 연재했던 기획입니다. 같은 내용을 <셜록>에 다시 옮겼다는 걸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