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없이 속으로 반문했다. ‘내가 장애인, 서민의 딸이어서 일까.’ 도무지 알 수 없다. 김신혜는 뺨과 뒤통수를 때리며 진술과 자백을 강요한 완도경찰서 A경찰을 만난 이후 스스로에게 물었다.
누구에게나 평생 잊을 수 없는 어떤 날이 있다. 보험금을 노리고 아버지를 죽였다는 혐의로 무기형을 선고 받은 김신혜. 그녀에게는 경찰에 체포된 2000년 3월 8일 오후 11시 40분부터 며칠이 그런 날이다. 김신혜는 말한다.
“죽어도 못 잊습니다. 천 번을 다시 태어나도 못 잊습니다. 그걸 어떻게 잊습니까!”
경찰 가혹행위에 관한 김신혜의 기억은 상세하다. 대한변호사협회는 그녀의 진술에 귀를 기울였다. 대한변협은 지난 205년 1월 27일 공식 보도자료를 통해 “‘김신혜 사건’에 대한 15년 전 재판기록과 증거 등을 검토한 결과, 경찰의 반인권적 수사가 이뤄졌다”고 밝혔다.
이어 김신혜에 대한 재심청구서를 광주지방법원 해남지원에 2015년 1월 28일 접수했다. 재심청구서에는 김신혜가 직접 쓴 “죽어도 못 잊을 기억”도 담겼다. 그 기록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1. 2000년 3월 9일 – “주먹으로 명치 때리며 조사 시작”
당직을 마친 A경찰이 가고 B경찰이 왔습니다. B경찰은 저를 보자마자 주먹으로 명치를 구타하고, 뒤통수를 때리면서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빨리 자백 녹음하고 끝내자. 응?”
그는 자백을 강요하며 녹음기를 들이댔습니다. 그는 사건과는 관계도 없는 저의 사생활을 캐묻고 어떤 대답을 할 때까지 폭행을 했습니다.
“(내가 살던) 서울 집 냉장고, 부엌, 방에 뭐가 있는지 말해라”, “아버지가 양주잔을 평소 어디에 놔두냐?”는 식의 질문이 이어졌고, 제가 어느 쪽이든 선택해 대답할 때까지 구타해 조서를 조작했습니다. 저는 구타를 견딜 수 없어서 조서 내용도 모른 채 (조서에) 서명·날인했습니다.
저는 조서 내용을 읽기 힘드니 서명을 할 수 없다고 했지만, B경찰은 “조서는 무조건 서명을 하고 지장을 찍어야 해, 이게 법이야”라고 강요했습니다. 기망과 강요로 조서에 서명과 지장을 찍은 의미가 이토록 가혹한지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2. 2000년 3월 10일 – “머리채 잡고 사무실 끌고 다녀”
“네 동생들이 너가 범인이라고 하는데, 왜 자백을 안 하냐!”
B형사가 기망하면서 소리쳤습니다. 저의 머리채를 잡고, 주먹과 손바닥으로 머리를 때렸습니다. 수갑을 뒤로 채운 상태로 팔을 비틀어 올리는 고문을 했습니다. 말로 다 표현 못할 끔찍한 고통이었습니다.
또 발로 저의 다리를 걷어차고 밀어서 바닥에 넘어뜨렸습니다. “빨리 일어나!”라면서 (저의) 머리채를 잡고 수사과 사무실을 왔다 갔다 했습니다. “빨리 자백해라, 녹음 따서 빨리 끝내자”면서 자백을 강요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점점 멍하고 무기력해져 나중에는 때리면 때리는 대로 멍하니 가만히 있을 정도가 됐습니다. B경찰이 “이렇게 했잖아”, “이런 거 맞지?”라고 물으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는 “대답 1초 늦을 때마다 1대씩”하면서 저의 뺨을 때리고,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서 팔 부분으로 제 목을 감고 그 위에다 손을 얹어서 저의 목을 조르기를 반복했습니다.
#3. 2000년 3월 11일 – “수건으로 입 틀어 막고 구타”
B형사가 수건 같은 걸 저의 입에 물려놓고 얼굴을 때리고 명치를 구타했습니다. 머리채를 잡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서 넘어뜨렸습니다. 저의 입 속에 피가 고였습니다. 숨이 막히고 토할 것 같아 입에 물려진 수건 같은 걸 빼내려고 했는데, B경찰이 빼지 못하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입에 고인 피가 코로 넘어올 정도여서 다시 수건 같은 걸 빼내려고 했습니다. B경찰이 씩 웃더니 제 입에 물려진 것을 빼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삼켜!”
코로 피가 넘어와 할 수 없이 삼킬 때까지 B경찰이 제 입을 막았습니다.
“맛있지?”
B경찰은 그런 잔인한 고문을 하면서도 웃었습니다. 잔인한 고문을 즐기면서 희열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소름이 끼쳐서 몸서리를 치며 B경찰을 밀치고 문을 향해 있는 힘껏 기어서 갔습니다. B경찰이 재빨리 제 머리채를 잡더니 질질 끌고 다녔습니다. 그때 제가 발버둥 치다가 어딘가에 부딪혀 무릎을 다쳤는데, 그 흉터가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이날 A경찰이 영장도 없이 저의 서울집을 압수수색한 뒤 큰 포대에 제 물건을 담아왔습니다. 그 중에 저의 누드사진이 있었습니다. 경찰서에 있던 다른 형사들이 이걸 돌려보면서 속닥거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B경찰은 저에게 누드사진을 보이며 “확 뿌려부려! 씨..”라고 협박했습니다.
이런 김신혜의 증언은 사실일까? 혼란스러웠다. 솔직히 믿기 어려웠다. 김신혜가 다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 박준영 변호사도 처음에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우리에게 김신혜가 말했다.
“2000년 3월 그 당시, 완도경찰서에 조형철(가명)씨 등 여러 사람이 들어왔어요.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나자 B경찰은 깜짝 놀라 구타를 멈췄고, 쓰러져 있던 저를 의자에 앉혔습니다. 제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요. B경찰도 급히 자기 자리에 앉았지만, 누가 봐도 폭행을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내 말을 못 믿겠으면, 조형철씨를 찾아 물어보세요. 그 사람이 뭔가를 봤을 겁니다.”
15년 전(2015년 기준) 경찰서 유치장에 함께 있던 사람 이름을 아직 기억하다니. 불과 수년 전만 해도 교도소 내에서 그녀가 소지할 수 있는 건 30페이지 남짓한 노트 한 권 뿐이었다. 그녀는 혹시라도 기억을 잊을까봐 자신의 속옷, 양말 바닥 등에 기록을 남겼다.
인터넷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조형철씨를 찾아나섰다. 완도를 떠나 지방의 소도시에 머물고 있는 조 씨를 어렵게 찾았다. 우선 그에게 당시를 기억하느냐고 전화로 물었다.
“오래된 일인데..가족들과 밖에 나와 있으니 다음에 통화하시죠.”
그는 이 말을 남기고 연락을 끊었다. 이후 약 일주일 동안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내도 답하지 않았다. 2015년 1월 26일 오후, 그가 근무하는 회사 앞으로 무작정 찾아갔다. 그날 저녁 조씨는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오셨어요?”라면서 어렵게 입을 열었다.
“김신혜씨가 자백했냐고요? 완도경찰서에 한동안 함께 있었는데, 자백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B경찰이 욕을 하면서 책상을 탁탁 치고, 서류 등으로 머리를 때리려고 (위협)하더라고요. ‘너가 죽였잖아!’하면서..강압적으로 (수사를 하면서) 김신혜가 뭔 말을 해도 안 믿는 분위기였어요. 자백을 했다면, 그렇게 윽박지르지 않았겠죠.
김신혜는 계속 울었어요. 나중에 그런 생각을 했죠. ‘과연 아버지를 죽였으면 계속 저렇게 울까’ 김신혜의 머리는 다 헝클어져 있었고, 밥도 안 먹고 계속 고개를 숙인 채 울어서 얼굴을 못 볼 정도였어요.”
조 씨는 김신혜가 구타당하는 모습을 직접 보지 못했지만, 자백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밝혔다. 이는 “김신혜가 자기 발로 찾아와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는 경찰의 공식 견해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조 씨 외에 김신혜가 구타당한 정황을 엿본 사람은 더 있다. 우선, 김신혜의 친구 권아무개 씨. 권 씨는 김신혜가 해남교도소에 있었을 때 면회를 갔다가 충격을 받았다. 완도에 사는 권 씨를 지난 2015년 1월 28일 밤에 만났다.
“다른 친구와 함께 신혜 면회를 갔었거든요. 신혜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머리가 다 헝클어져 있고, 듬성듬성 빠져 있더라고요. 옆에서 교도소 직원이 우리 대화를 기록하니 대놓고 물어볼 수 없었죠. 그래도 조심스럽게 ‘너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신혜가 눈치를 보면서 ‘(경찰한테) 맞았다’고 했어요. 15년이 지났지만 당시 신혜 모습이 충격적이어서 아직도 기억을 해요.”
김신혜의 동생 김종현도 똑같이 기억하고 있다. 그는 “당시 누나 머리 곳곳이 빠져 있었고, 나도 경찰서에서 누나가 보는 앞에서 구타를 당했다”고 증언했다.
혹자들은 ‘합리적인 의심’의 눈길을 김신혜에게 보낸다. “범행을 자백했다가 왜 이제 와서 부인하느냐”, “감옥에서 15년 동안(2015년 기준) 자기방어 논리를 만든 것 아니냐”고 말이다. 충분히 품을 수 있는 의문이다.
하지만, 김신혜는 자신의 무죄 주장과 경찰 등의 가혹행위 증언을 이제 와서 하는 게 아니다. 경찰에 체포된 직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주장했다. 친구들에게 편지로 말했고, 검사와 판사에게도 말했다. 뒤늦게 범행을 부인하는 게 아니다.
심지어 당시 경찰서 유치장에서 근무했던 사람이 남긴 접견 기록에도 그녀가 무죄와 경찰의 가혹행위를 증언하는 게 담겨있다. 2000년 3월 14일 작성된 완도경찰서 유치장 접견부를 보자.
이날 김신혜의 고모 김아무개 씨가 김신혜를 면회했다.
고모 : 있는 그대로 말해라. 솔직히 다 털어놔라.
김신혜 : 그런 거 없어. 난 안 했어.
고모 : 겁먹지 말고 다 말해라. 너 머리가 얼마나 비상하냐.
김신혜 : 나는 하지 않았어.
고모 : 사실대로 말해라.
김신혜 : 거짓말 안 했어. 나도 했다고 하면 편해. 그런데 이건 아닌 것 같아. (중략)
고모 : 마음 정리해서 오늘 밤 안으로 사실대로 털어놔라.
김신혜 : 사실대로 말했는데, 조서를 받지 않아. 더 힘들어졌어. 사람 취급도 안 해.
시종일관 범행을 부인하는 김신혜. 사실대로 말했는데, 사람 취급도 안 한다니. 경찰은 김신혜가 자백했다고 했는데, 이건 도대체 뭘까?
경찰에서 다섯 차례, 검찰에서 여섯 차례 김신혜에 대한 조서 작성이 이뤄졌다. 놀라운 건 조서마다 범행동기, 수면제의 종류, 수면제를 먹인 방법, 양주병과 잔의 소재, 사체유기 방법 등 이 사건의 중요한 실체 관련 진술내용이 다르다는 점이다. 그 탓에 사건 실체 파악이 어렵다. 경찰은 김신혜가 자백했다면서 왜 이런 조서를 남겼을까. 박준영 변호사가 말했다.
“왜 조서 내용이 다르겠어요? 경찰의 강압으로 김신혜가 허위자백으로 없는 말을 꾸며냈거나, 경찰이 사체에서 약물이 검출된 걸 근거로 객관적인 상황에 맞게끔 진술을 왜곡해 조서를 조작했으니 앞뒤가 안 맞는 거죠. 김신혜가 진범이라면 자백을 하면서 이렇게 오락가락 진술을 할 이유가 없죠. 자수까지 했다면 더더욱 그렇고요.”
이번엔 그때 그 경찰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다. 지난 2015년 1월 15일 전남의 한 파출소를 찾아가 A경찰을 만났다.
“김신혜가 다 자백을 했는데, 왜 자꾸..가혹행위요? 그런 거 없었어요. 기억도 안 나고. 그리고 (경찰이 때렸다고 해도) 이젠 공소시효도 거의 끝나지 않았나요?”
다음에는 20일, B경찰을 찾아갔다. 김신혜가 “가장 잔혹한 경찰”로 기억하는 그는 전남의 한 경찰서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는 ‘김신혜’ 이름을 꺼내자마자 거친 반응을 보였다.
“김신혜씨 아시죠? 2000년 완도에서 존손살해 혐의로 체포됐던..”
“김신혜를 왜 나한테 물어요? 난 조사도 안 했는데.”
“당시 직접 작성한 조서가 있던데요.”
“몰라요.”
“당시 김신혜씨 누드사진으로 협박하신 적 있죠?”
“뭐, 누드사진으로 협박? 당신들 나 협박하는 거야?”
갑자기 B경찰은 스마트폰을 집으며 대화를 녹음하려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박준영 변호사가 말했다.
“예, 그냥 녹음하세요. 녹음 하시고 고소하셔도 됩니다. 나중에 법정에서 보죠.”
“나가! 할 말 없으니까 나가요. 나가라고!”
이번엔 김신혜 진술조서에 입회인으로 기록된 C경찰을 만나기 위해 26일 광주광역시의 한 경찰서를 찾았다. 그도 거친 반응을 보였다. 경찰들끼리 정보를 공유한 듯한 이야기도 했다.
“당신들 우리들에 대해 이것저것 캐묻고 다닌다면서요? 저는 김신혜 모릅니다. 15년 전 일을 어떻게 기억합니까! 몰라요. 나가세요!”
그는 사무실 문을 쾅 닫아버렸다. 이상하다. 유치장에 있던 사람도 기억하는 일을, 사건을 조사한 경찰들은 모른다고 한다. 15년이 지난 지금, 김신혜는 아직도 스스로에게 반문한다.
“도대체, 경찰이 내게 왜 그랬을까? 왜 내게..”
(박상규 기자가 2015년 카카오 스토리펀딩에 연재했던 기획입니다. <셜록>에 다시 옮겼다는 걸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