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이 살해되던 그날 밤, 광호가 이향숙 뒤를 졸졸 따라다닌 걸 봤대요.”
영화 <살인의 추억>을 기억하시는지. 박두만(송강호 분) 형사는 애인의 말을 듣고 백광호(박노식 분)를 경찰서로 연행한다. 박 형사는 조용구(김뢰하 분) 형사와 함께 백광호를 폭행, 협박하며 자백을 강요하고 증거를 조작한다.
‘이향숙 살해’ 현장검증의 날. 백광호가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한 서태윤(김상경) 형사는 백광호 손을 보고 “손가락이 이렇게 (화상으로) 붙어서 젓가락질도 제대로 못하겠다”고 말한다. 서 형사는 현장검증 현장에서 수사반장(변희봉 분)에게 말한다.
“어차피 현장검증 제대로 하긴 글렀습니다. 반장님, 망신당하기 전에 중지시키세요. 쟤(백광호) 범인 아니에요. 애들도 웃어요!”
백광호는 범행을 부인하며 현장검증을 거부한다. 기자까지 부른 현장검증 현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결국 백광호는 석방된다. 영화는 엉망이된 현장검증 소식을 전하며 세 형사의 사진을 담은 한 신문을 보여준다.
“물거품 된 기념촬영. 물증 없이 밀어붙인 경찰의 강압수사는 결국 아수라장으로 끝나고 말았다.”
영화보다 무섭고 끔찍한 현장검증이 있다. 보험금을 노리고 수면제로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일명 ‘김신혜 사건’의 현장검증이 그렇다. 1980년대 화성 부녀자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과 2000년 3월 전남 완도에서 일어난 ‘김신혜 사건’을 비교하는 건 무리 아니냐고?
사실을 따지면 <살인의 추억>보다 충격적이다. 영화에서 “물증 없이 밀어붙인 경찰의 강압수사는” 아수라장으로 끝난다. 백광호는 무죄로 풀려났다. 하지만 2000년 3월 완도경찰서는 그대로 밀어붙였다. 물증이 없고, 범행을 부인하는 피의자를 상대로 강압수사를 한 건 <살인의 추억>과 똑같은데 말이다. 김신혜는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변호사로 약 10년 일하면서 국선 등으로 형사사건을 수천 건 다뤘어요. 완도경찰서가 진행한 김신혜 사건 현장검증은 정말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현장검증이 21세기 한국에서 진행됐다는 게 정말 참담합니다. 대낮에 주민이 지켜볼 때 이뤄진 현장검증이 그 정도인데, 밀실에서 진행된 수사는 어땠겠어요?”
김신혜 사건 재심을 위해 노력하는 박준영 변호사의 말이다. 김신혜를 돕는 변호사의 일방적 주장이 아니다.
“김신혜가 현장검증을 거부했잖아요. 당시 완도경찰서 간부회의가 열렸는데, 내가 ‘뭔가 의심스럽지 않느냐, 이거 나중에 문제 된다, 확실히 하고 가자’고 했어요. 피의자가 현장검증을 거부하면 안 해야 정상이죠. (그런데도 밀어붙여) 상당히 염려가 됐어요. 그 왜소한 친구(김신혜)가 수면제 먹인 아버지를 혼자 2층 집에서 끌어내고, 차에 태워 유기했다고? 그건 말이 안 되죠.”
지난 1월 26일 완도에서 만난 한 퇴직 경찰의 말이다. 그는 사건 당시 완도경찰서에서 근무했다. 당시 경찰마저 믿지 못한 김신혜 사건. 도대체 현장검증이 어땠길래 그는 “상당히 염려”를 했을까. 2000년 3월 13일과 14일 이틀 동안 진행된 것으로 기록된 현장검증을 사진과 함께 하나하나 살펴보자.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현장검증은 2000년 3월 7일 새벽 1시의 상황을 재연하는 일부터 시작된다. 전날 오후 서울에서 EF소나타를 렌트해 출발한 김신혜는 그 순간 완도 원동검문소를 통과했다. 김신혜는 새벽 1시 30분께 집에서 가까운 항만터미널 공중전화로 할머니집에 전화를 한다.
김신혜는 이후 완도 OO리에 차를 세워놓고 시간을 보낸 뒤 오전 5시께 할머니집에 들어갔다고 주장한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할머니 집에까지 와 소란을 피웠다는 말을 듣고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는 게 그녀의 주장이다. 경찰은 ‘김신혜의 4시간’을 믿지 않았다. 그 시간에 수면제로 아버지를 살해하고 교통사고로 위장하기 위해 시신을 거리에 유기했다는 게 경찰의 주장이다.
김신혜는 항만터미널 공중전화를 이용하는 장면 이후 모든 현장검증을 거부한다. 그녀는 현장검증에서도 “나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경찰은 자신들의 주장대로 현장검증을 강행하고 김신혜에게 ‘연기’까지 시켰다. 당시 상황은 경찰이 남긴 사진과 기록에 고스란히 남았다.
이 사진을 보자. 경찰이 작성한 설명에는 “피의자(김신혜)가 피해자(아버지)의 집에서 문을 노크하는 장면”으로 적혀 있다. 하지만 실제의 김신혜는 범행을 부인하며 집 앞에 주저 앉아 있다.
경찰은 아버지의 집 2층 방을 범행현장으로 지목했다. 김신혜가 방에서 양주에 수면제를 타 두 잔을 아버지에게 먹였다는 게 경찰의 주장이다. 위 사진은 김신혜가 아버지 방으로 올라가는 현장검증 장면이다. 역시 김신혜는 현장검증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경찰은 두 손으로 포승줄을 잡고 김신혜를 2층 방으로 강제로 밀어 올리고 있다.(위 사진 붉은 표시)
아버지에게 양주 두 잔을 건네는 현장검증 모습은 황당하다. 범행을 부인하는 김신혜 대신 경찰이 술병을 들고 재연을 하고 있다.
그 뒤의 상황은 더욱 논란이다. 경찰이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에 따르면, 아버지는 술을 마신 뒤 김신혜에게 “드라이브 하자”고 말했다. 김신혜는 그런 아버지를 2층 방에서 데려나와 완도의 OOO호텔 방향으로 드라이브를 했다는 게 신문조서의 내용이다.
하지만 시신 부검결과 당시 아버지의 혈중 알코올 농도는 0.303%였다. 이는 운전면허 취소에 해당하는 혈중 알코올 농도 0.100%의 3배가 넘는 고도명정 상태에 해당한다. 의식이 없거나 거의 잃은 것으로 추정되는 아버지가 “드라이브를 하자”고 제안했다?
게다가 위 사진에서 보듯이 아버지의 집에서 2층 방으로 오르는 계단은 경사가 심하고 난간도 없다.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저는 만취 상태의 아버지가 이 계단을 어떻게 내려왔는지도 의문이다. 경찰은 이런 상황을 무시했다.
경찰이 작성한 조서상의 자백을 보면, 아버지는 스스로 저 계단을 내려와 김신혜가 끌고온 차에 탔다. 이어 행선지를 말하고, 김신혜가 길을 찾지 못하자 화를 냈다는 내용도 나온다. 하지만 아버지 시신에서 혈중 알코올 농도 0.303%와 다량의 수면제성분이 검출된 걸 감안하면 이는 객관적 상황에 부합하는 진술로 보기 어렵다.
이후 상황은 아버지가 차 안에서 사망했고, 김신혜가 시신을 완도읍 OO리 버스승강장에 유기했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여기에서 경찰이 작성한 현장검증조서의 한 대목을 보자.
“수면제를 마시게 한 피해자를 태우고 OOO호텔 방면으로 가는 방향을 물어본 바, (김신혜는) ‘모르겠어요’라고 말을 하고 거부함.”
“피해자를 유기한 완도읍 OO리 마을 버스승강장 앞에 도착을 한 바, 피의자 김신혜는 ‘여기가 OO리예요?’라고 반문을 함.”
김신혜는 정말 아버지 시신을 OO리 버스승강장에 유기했을까? 그게 맞다면 그녀는 왜 처음 온 곳인양 “여기가 OO리예요?”라고 물었을까? 이상한 대목은 이어진다.
사진은 경찰의 강요에 따라 김신혜가 완도읍 OO리 버스승강장 앞에 아버지 시신을 유기하는 걸 재연하는 모습이다. 김신혜가 운전석에 앉아 조수석에서 사망한 아버지를 두 손으로 밀어 떨어뜨렸다는 게 경찰의 주장이다. 운전석에서 조수석의 시신을 밀어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그 뒤 차문은 어떻게 닫았는지 등의 의문은 차치하자.
이번엔 이 사진을 보자. 아버지의 신발이 벗겨진 채 시신 옆에 놓여 있다. 또 사진 앞쪽에는 깨진 자동차 전조등 조각이 놓여 있다. 애초 경찰은 교통사고로 위장하기 위해 김신혜가 일부러 이를 뿌린 것으로 파악했다. 이런 모든 상황은 ‘김신혜가 아버지 시신을 조수석에서 밀어 떨어뜨렸다’는 경찰 주장과 배치된다.
뿐만 아니라 경찰의 현장검증은 사건의 앞뒤 맥락에도 맞지 않는다. 경찰은 “김신혜가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면서 왜 이런 현장검증을 했을까?
현장검증은 피의자가 한 진술을 실천으로 보여주는 일종의 ‘몸으로 하는 진술’이다. 현장검증은 형사사건의 실체를 이해하고 동시에 새로운 증거를 찾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완도경찰서는 모든 면에서 실패했다. 새로운 증거는커녕, 자신들이 주장한 범행도구인 수면제, 술병, 술잔도 못 찾았다. 깨진 자동차 전조등의 출처도 확인하지 못했다. 교통사고로 위장했다는 게 공소사실인데, 깨진 자동차 전조등은 압수되지 않고 증거물로도 제출되지 않았다. 영장 없이 위법하게 김신혜의 주거지를 압수수색했는데도 말이다. (관련 기사)
또 경찰은 공소사실상 범행장소인 아버지 집에 대한 현장보존이나 감식을 전혀 하지 않았다. 김신혜는 아버지 집에 가지도 않았다고 주장하는 상황. 만약 경찰이 아버지 집에서 김신혜의 지문, 족적, 모발 등을 찾았다면 김신혜의 무죄 주장을 꺾을 수 있었다. 그런데 경찰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결국 경찰은 어디에서도 미세한 수면제 가루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경찰은 김신혜가 끌고 와 시신 유기에 이용했다는 렌트카를 압수해 감식을 의뢰했다. 여기에서도 범죄사실을 입증할 지문 등 아버지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경찰은 물증 하나 없이 현장검증을 강압적으로 진행했고, 김신혜를 존속살해범으로 단정했다. 김신혜의 남동생 김종현(가명. 당시 19세)씨는 여전히 그때를 기억한다.
“누나는 현장검증을 다 거부했어요. 울면서 꼼짝도 안 했어요. 경찰들이 그런 누나에게 쌍욕을 하고, 누나를 들어서 옮긴 뒤 자신들이 원하는 사진을 찍고 그랬죠.”
헌법 제12조 2항은 “모든 국민은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고 규정돼 있다. 범행을 부인하는 피의자에게 이를 강제로 재연시키는 것은, 불리한 진술을 몸으로 재연하게끔 강요하는 일이다.
형법은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없는 일을 하게 한 때”에는 직권남용죄로 처벌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제123조). 수사에 관여한 경찰이 그 직무에 관한 죄를 범하면 재심 사유가 된다 (형사소송법은 제420조 제7호).
김신혜는 정말 아버지를 수면제로 살해했다고 자백했을까? 시신에서 발견된 약물성분을 근거로 누군가 그녀를 범인으로 몰아간 건 아닐까?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백광호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날 때 박두만 형사가 반장에게 “정말 백광호 풀어주는 겁니까?”라고 묻는다. 그러자 반장이 말한다.
“그럼 어쩌냐? 자백만 가지고 (범죄) 성립이 안 된다는데!”
범행 도구 등 물증도 없이 김신혜는 존속살해 혐의 등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김신혜는 백광호보다 못한 대우를 받았다. 그것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박상규 기자가 2015년 카카오 스토리펀딩에 연재했던 기획입니다. <셜록>에 다시 옮겼다는 걸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