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가정을 해보자. 혼자만의 시간을 꿈꾼 당신, 차를 몰아 조용한 바다로 떠난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 차를 세우고 잠시 눈을 붙인다. 낮잠과 산책으로 혼자 시간을 보낸 뒤 해질녘 집으로 돌아간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배우자가 누군가에게 살해돼 있다. 사건을 맡은 경찰이 당신을 의심하며 묻는다.
“배우자가 사망한 그 시각에 어디에서 무엇을 했나요?”
“혼자 시간을 보내고 싶어 바닷가에 갔습니다. 차에서 낮잠을 자고 산책을 했습니다.”
“그 알리바이를 누가 증명해줄 수 있나요?”
“글쎄요. 그냥 저 혼자 있었습니다.”
누구도 증명해줄 수 없는 혼자만의 시간. 경찰은 사건이 벌어진 현장 보존에 실패하고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한다. 사망자 신원을 조회하니 여러 개의 보험이 가입돼 있다. 보험금 수령자는 유족인 당신이다. 경찰이 의심을 거두지 않고 계속 당신을 추궁한다면?
의심은 쉽고, 증명은 어려운 법이다. 무죄 추정의 원칙은 누구에게나 적용돼야 하고, 유죄 입증 책임은 수사기관에 있다. 하지만 현실에선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2000년 3월 그때, 스물세 살의 김신혜는 그렇게 의심을 받았다. 보험금을 노리고 수면제로 아버지를 살해한 뒤 시신을 유기한 당사자로 말이다. 그녀는 지금 청주여자교도소에서 무기수로 살고 있다. 15년째 무죄를 주장하면서 말이다.
물론 경찰이 막무가내로 의심한 건 아니다. 사건 초기 수사기관이 봤을 때, 김신혜에겐 약점(?)이 두 개 있었다. 그녀가 아버지 앞으로 가입한 여러 개의 보험(추후 보도 예정)과 ‘3시간의 공백’이 그것이다. 오늘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 그 운명의 3시간을 따져보자.
먼저 검찰이 밝힌 공소사실을 이 지면에 그대로 옮긴다.
“2000년. 3월 7일 01:00경 전남 완도읍 OO리 소재 피해자(아버지 김아무개씨)의 집에서 (첫째 딸 김신혜가) 미리 준비한 양주와 수면제 약 30알을 피해자에게 건네 주며 ‘간에 좋은 약’이라고 속여 한꺼번에 마시게 함.
서울에서 타고 온 승용차에 (아버지를) 태워 완도읍 일대를 돌아다니다 같은날 03:00경 승용차 안에서 피해자를 사망하게 함. 04:00경 살해한 피해자를 차량조수석에 싣고 집에서 약 6km 떨어진 OO리 소재 버스승강장 앞에 버려 사체를 유기함.”
이를 보면, 사건 당일 김신혜의 시간대별 동선이 보인다. 양주와 수면제를 미리 준비한 계획 살인이다. 물론 수사기관의 주장이다. 김신혜는 이를 전면 부인한다.
검찰의 공소사실은 객관적 사실과 다르다. 전날 오후 서울에서 차를 몰고 출발한 김신혜가 완도 원동검문소 CCTV에 찍힌 시각은 2000년 3월 7일 0시 56분이다.
여기에서 김신혜 아버지 집까지는 차로 최소 30분을 가야한다. 게다가 김신혜는 중간에 차에서 내려 공중전화를 이용했다. 여러 정황을 종합하면, 그녀는 3월 7일 02시 즈음에야 아버지 집에 도착할 수 있다.
하지만 김신혜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 판결문에는 “새벽 1시경 아버지에게 양주와 수면제를 건넸다”고 되어 있다. 이 사건에서 시간을 정확히 따지는 일은 무척 중요하다.
살해방법과 사체 유기 등을 고려했을 때 범행에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1,2시간 차이는 김신혜에게 의미가 크다.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이 문제는 쟁점이 안 됐다.
어쨌든 김신혜는 완도 할머니집에는 05시께 들어갔다. 김신혜 아버지의 시신은 그날 05시께 OO리 버스승강장 앞에서 발견됐다.
완도에 도착한 김신혜는 05시께까지 어디에서 무엇을 했을까? 수사기관 주장대로 그 시간에 그녀는 정말 아버지를 살해하고 사체를 유기했을까? 사건 발생 다음 날인 3월 8일, 경찰이 김신혜를 참고인으로 불러 추궁한다.
(새벽 1시 완도 도착 이후) 바로 집으로 갔나요?
“아닙니다. 중간에 차량을 세워두고 잠을 잤습니다.”
어디에서 잠을 잤나요?
“완도읍 죽청리 마을 입구 공터 주차장에서 잤습니다.”
(중략)
집에 다와 가는데 왜 그곳에서 잠을 잤나요?
“너무 피곤하여 잠을 잤습니다.”
몇 시간 동안 잤나요?
“일어나 보니 05:00경 다 되었습니다.”
(중략)
왜 아버지집으로 가지 않고 할머니 집으로 갔나요?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자식들을 모아 놓고 잔소리를 하기 때문에, (아버지가 술에서) 깨면 만나려고 할머니 집으로 갔습니다.”
이번엔 김신혜의 주장대로 당일 행적을 재구성해 보자.
김신혜는 2000년 3월 7일 00시 56분에 완도에 도착했다. 01시 30분께 완도 항만터미널 공중전화로 할머니집에 전화해 “곧 도착한다”고 여동생 김수현(가명, 당시 18세)에게 말했다.
그해 3월 말 일본 유학을 앞둔 김신혜는 휴대전화가 없었다. 전화통화에서 동생 김수현은 언니에게 “아버지가 술에 많이 취했다”고 말했다.
동생 말대로 술에 취한 아버지는 사망 몇 시간 전인 3월 6일 자정께 할머니집을 찾아와 소란을 일으키고 돌아갔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고 술주정을 자주했다. 그 탓에 김신혜 3남매는 아버지집에서 50m 정도 떨어진 할머니댁에서 주로 지냈다.
아버지가 술에 취했다는 말을 듣고 김신혜는 더욱 집으로 가기 싫었다. 그녀는 차를 몰아 등대가 보이는 바닷가로 갔다. 서울에서 내려오면 친구들과 종종 새벽까지 어울려 놀던 카페로 갔다. 새벽이어서 카페는 문 닫을 준비를 했다.
김신혜는 카페에서 나와 차 안에서 와인과 맥주를 마셨다. 친구들과 함께 마시려고 서울에서 준비한 술이다. 새로 준비하는 시나리오도 구상했다.
술에 조금 취한 김신혜는 2년 전 교제했다가 헤어진 옛 남자친구를 떠올렸다. 그녀는 차를 운전해 완도읍 죽청리에 있는 그의 집 근처로 갔다. 한 번 만나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다.
그녀는 옛 남자친구 집 인근에 차를 세워두고 잠시 눈을 붙였다. 눈을 떠보니 05:00시가 다 되어 있었다. 그녀는 차를 몰아 할머니 집으로 향했다.
아버지 집 2층 방에 불이 켜진 게 보였다. 김신혜는 집 앞에서 “아버지!”를 몇 번 불렀다. 잠이 들었는지 아버지는 대답이 없었다. 김신혜는 할머니 집으로 가 잠을 잤다. 07:00시경 경찰이 찾아와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이상은 2001년 2월 18일, 김신혜가 고상만 반부패국민연대 국장에게 편지로 설명한 알리바이를 근거로 재구성한 것이다. 대법원이 사건을 심리하던 때였다.
수사기관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의 알리바이를 입증해 줄 사람은 없었다. 수사기관의 결론에 따르면 김신혜는 철저한 계획 살인범이다. 아버지를 살해하기 위해 서울에서 양주와 수면제를 미리 준비했다. 완도에서는 계획에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지난 8번째 기사 “<살인의 추억>보다 무서운 현장 검증”에서 지적한 대로, 경찰은 양주병, 수면제 등 살해 도구를 발견하지 못했다. 수면제를 구입한 경로도 찾지 않았다.
“(친구 김신혜가) 3월 4일 연락해 월요일(6일)쯤에 완도에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권OO과 함께 완도버스터미널에서 6일 자정 넘어서까지 김신혜를 기다렸지만 못 만났습니다. 집으로 들어왔는데, 7일 02시께 김신혜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신혜가 ‘지금이라도 나올래?’라고 했지만 너무 피곤해 내일 만나자고 했습니다.” – 박OO씨 법정 증언
“(친구 김신혜가) 사건 발생 며칠 전에 전화를 해 3월 6일께 완도에 온다고 했습니다. 박OO과 함께 완도버스터미널에서 7일 새벽 1시께까지 김신혜를 기다렸지만 만나지 못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7일 새벽 2시께 신혜가 전화를 해 ‘나 이제 도착했다. 놀러 나올래?’라고 하였지만, 다음날 장사를 해야 해서 나중에 보자고 했습니다.” – 권OO씨 법정 증언
김신혜는 3월 7일 새벽 2시 두 친구와 이렇게 전화통화를 했다. 수사기관의 결론대로라면, 그 시각에 김신혜는 아버지를 살해하기 위해 수면제를 먹이는 등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한다. 게다가 김신혜는 두 친구에게 미리 전화해 완도에 간다는 계획까지 이야기했다.
아버지 살해를 준비한 사람이 미리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다니,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두 친구의 말이 거짓 아니냐고?
“오히려 우리가 정말 미안해요. 사건이 발생한 그날 새벽, 신혜가 전화했을 때 그냥 우리가 만나러 나갔으면 아무 일도 없는 거잖아요. 신혜도 의심 안 받고. 신혜가 서울에서 내려오면 자주 새벽까지 함께 놀았어요. 저희 부모님이 그런 걸 다 아실 정도예요. 근데, 법원은 우리 증언을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았어요.”
지난 1월 28일 오후 완도에서 만난 권OO 씨의 말이다. 권 씨의 눈이 눈물로 젖었다.
두 친구의 증언은 ‘김신혜의 3시간 알리바이’를 어느 정도 뒷받침한다. 그만큼 김신혜에겐 중요한 증언이다. 하지만 경찰과 검찰은 단 한 번도 권 씨와 박 씨를 부르지 않았다.
권 씨는 “당시 신혜와 전화통화 한 사실을 믿기 어렵다면, 내 휴대전화 통화 내역을 알아보라는 말까지 (법정에서) 했지만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고 밝혔다.
불쾌한 기억은 더 있다. 권 씨와 박 씨의 증언은 김신혜에게 유리한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다. 오히려 판사에게 부적절한 비난을 들었다.
“사건 당일 밤 늦게까지 완도버스터미널에서 신혜를 기다렸다고 말하니 판사가 하는 말이 ‘그렇게 할 일이 없냐, 여자들이 왜 그리 밤 늦게 돌아다니냐’고 훈계를 하더라고요. 우리가 미성년자도 아닌데..기분 나빴죠. 법정에서 나오면서 친구 박OO과 말했어요. ‘사실대로 말한 우리가 왜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하느냐’고요.”
왜 경찰, 검찰은 두 친구를 부르지 않았을까? 법원은 왜 이들의 말을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을까?
누구에게 죄를 물을 땐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는 근거를 대야 한다. 하지만 ‘김신혜 사건’에는 합리적 의심 투성이다. 김신혜가 고상만 국장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도 담겼다.
“가혹행위를 당하고, 입에 담기도 민망한 성적 희롱, 욕설을 들었다는 사실이 너무 수치스럽고, 창피해서 숨기고만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아직도 그 생각을 하면 몇 끼 식사를 하지 못하고, 공포감에 시달립니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는데, 혼자 있다는 것이 죄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도와주세요! 이미 제 자신은 (저희 가족과 친구들 또한) 이 상처를 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운명 속으로 걸어들어가야만 하지만, 더 이상 이렇게 짓밟히는 영혼이 이 땅 위에 없었으면 합니다.” – 김신혜가 고상만 국장에게 보낸 편지 中
편지를 보낸 후 한 달 만인 2001년 3월 23일 대법원은 김신혜의 상고를 기각했다. 고상만 씨는 “도와주고 싶었지만, 손을 쓸 시간조차 없이 사건이 끝나 버렸다”면서 당시 상황을 아쉬워했다.
혼자 있는 게 죄가 됐다는 김신혜의 주장. 그녀의 ‘3시간 알리바이’를 확실히 입증할 증인은 없다. 하지만 반대로 김신혜가 그 시간에 아버지와 함께 있었다는 증거도 없다.
무죄 추정의 원칙은 누구에게나 적용돼야 하고, 유죄 입증은 수사기관의 몫이다. 하지만 수사기관은 물증도, 사건현장에서 용의자 흔적도 찾지 못했다. 법원은 중요한 증언을 외면했다.
15년이 지난 지금, 두 친구는 가족을 이뤄 살고 있다. 이들은 지금 “그때는 어려서 판사의 타박을 듣고 돌아섰지만, 다시 재판이 열린다면 법정에 나가 ‘당시 증언은 모두 사실이다’라고 내 가족을 걸고 진실을 말하고 싶다”고 밝혔다.
(박상규 기자가 2015년 카카오 스토리펀딩에 연재했던 기획입니다. <셜록>에 다시 옮겼다는 걸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