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규 기자와 저는 김신혜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김신혜가 석방되는 꿈이었냐구요? 아닙니다. 꿈속에서 진범은 그녀였고, 저희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악마를 대변했다’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몰락했습니다. 우리의 시작은 이렇게 불안했습니다.
박상규 기자는 저를 만나서 인생이 꼬였다고 합니다. 그는 지난 연말 <오마이뉴스>에 사직서를 냈습니다. 박 기자는 자유롭게 글을 쓰고 싶다고 했습니다. 실력은 일천하지만 관심 있는 아이템을 오랫동안 취재해 땀냄새 진동하는 기사를 쓰고 싶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도 백수생활은 두렵고, 떨리고, 무섭고, 쓸쓸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저는 김신혜를 만난 이후 인생이 꼬였습니다. 그녀는 15년 동안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아버지를 죽이고도 이런 주장을 한다면, 그녀는 악마입니다. 하지만, 저는 인간의 존엄성 그리고 자존감으로 15년을 버텨 온 ‘사람’을 봤습니다.
갑자기 멍해졌습니다. 따뜻한 밥을 먹고 편히 잠 자는 생활이 부끄러웠습니다. 변호사 사무실을 내놨습니다. 비용을 줄이고 김신혜 사건에 모든 걸 걸어야 했습니다. 집도 월세, 사무실도 월세이니 모든 상황이 불안했습니다. 저도 두렵고, 떨리고, 무섭고, 쓸쓸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만났습니다.
김신혜 사건 기록을 보니 앞이 캄캄했습니다. 김신혜 얼굴을 보면 무죄, 기록을 보면 유죄 느낌이 들었습니다. 박상규 기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감이라도 얻고 싶었는지 그가 물었습니다.
“변호사님, (김신혜를) 어디까지 믿으세요?”
저는 호기롭게 말했습니다.
“<오마이뉴스> 10년 다니면서 뭘 배웠어요? 안전한 것은 누구나 해요. 위험한 일에 도전을 해야지!”
우리는 기록만 봐서는 알 수 없는 사건의 이면을 보기 위해 발로 뛰었습니다. 그러면서 기록의 문제점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습니다. 물론 김신혜에게도 잘못은 있었습니다.
헌법 제27조 제4항은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라고 하여 무죄추정의 원칙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저는 변호사 생활을 10년 가까이 했지만, ‘무죄추정의 원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기획 ‘그녀는 정말 아버지를 죽였나’ 아홉 번째 기사를 통해 밝힌 대로 김신혜는 알리바이를 입증할 수 없었습니다. 혼자 차 안에서 잤다는 그녀의 주장을 경찰은 믿지 않았습니다. 김신혜는 아버지가 사망한 시각에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고 해야 경찰의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신혜는 2000년 3월 13일 유치장으로 면회를 온 동생에게 만화책 한 권을 건넸습니다. 거기에는 그녀의 자필 메모가 있었습니다.
“OO 오빠(전 남자친구)한테 도와달라고 해. (아버지가 사망한) 그날 밤 1시 20분쯤 (내가) 오빠 집 근처에 있었다고. 근데 그 알리바이를 증명할 방법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중략) 말 정확하게 맞춰서 오빠랑 잘 상의해 봐. 나는 결백해. 오빠 연락처는 전화번호 책에 있다. 더 이상은 못 버틸 거 같애. 경찰한테 머리를 맞기도 하고, (경찰이) 사람 취급을 안 한다.”
이렇게 김신혜는 알리바이를 조작하려 했습니다. 김신혜의 혐의를 입증할 책임은 수사기관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신혜는 스스로 알리바이를 밝히고 무죄를 적극적으로 입증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수사기관은 무죄추정의 원칙이 뭔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국가는 법으로 보장된 개인의 권리, 인권을 제대로 설명해줘야 합니다. 이 사회는 법치국가이기 때문입니다. 공평한 법 적용, 그것이 바로 정의입니다. 김신혜는 폭행, 모욕 등 강압수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당시 국가의 폭력에 저항할 수단은 알리바이를 만드는 방법밖에 없었다고 말합니다.
“(불법으로 날 압박하는) 경찰에게 감금된 상황을 벗어나려는 과정에서 전 남자친구에게 알리바이를 부탁했습니다. 나 그거 인정합니다. 비난 수용하고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으라면 받을 거예요. 하지만, 그 전에 나와 내 가족을 폭행하고 유린한 국가가 그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김신혜에게 알리바이 부탁을 받았던 김영철(가명)씨를 지난 3월 8일 완도에서 만났습니다. 그는 한동안 ‘김신혜와 함께 아버지를 살해한 공범’으로 몰리기도 했습니다.
김씨는 “2000년 3월 당시, 각목을 들고 온 경찰들에게 집에서 체포되었다”며 “경찰서에서 욕설을 들으며 공범으로 단정짓는 수사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김신혜의 재심이 열린다면, 자신이 겪은 일을 있는 그대로 법정에서 진술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동영상 촬영에 응했고, 그 영상을 증거로 제출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김신혜 사건을 맡은 경찰은 반인권적인 수사를 했습니다. 경찰수사권 독립을 반대하는 검찰의 논리는 “경찰에 대한 수사지휘를 통해 절차의 적정성과 국민의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김신혜를 수사했던 검사는 기록상 압수수색의 문제점, 현장검증의 문제점이 확연히 드러남에도 침묵했습니다.
2006년 9월 19일, 당시 이용훈 대법원장은 대전고등법원을 방문한 자리에서 “검사들이 사무실에서, 밀실에서 비공개 진술을 받아놓은 조서를 어떻게 공개된 법정에서 나온 진술보다 우위에 놓느냐, 법원이 재판 모습을 제대로 갖추려면 검사의 수사기록을 던져버려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수사과정에서의 인권침해를 경계하고 법정에서 행해지는 피고인의 주장을 제대로 경청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입니다. 수사기록이 증거가 되려면, 그 전제로 적법한 절차에 따라 인권적인 수사가 이뤄졌다는 게 확인되어야 합니다.
‘춘천 파출소장 딸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무려 36년간 성폭행, 살인 누명을 썼던 정원섭 목사. 그는 2008년 재심을 통해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 재심 판결문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신의 눈을 갖지 못한 재판부로서는 감히 이 사건의 진실에 도달하였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중략) 다만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와 적법절차를 보장받지 못한 채 고통을 겪었던 피고인이 마지막 희망으로 기대었던 법원마저 적법절차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부족하였고, 그 결과 피고인의 호소를 충분히 경청할 수 없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없다고 하겠다.”
신의 눈을 갖지 못한 인간은 다른 사람을 재판할 때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실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김신혜 사건을 맡았던 2000년 당시의 재판부는 이 점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판사는 김신혜의 알리바이를 입증하기 위해 증인으로 나온 친구들에게 “그렇게 할 일이 없냐, 여자들이 왜 그리 밤 늦게 돌아다니냐”고 부적절한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오로지 ‘김신혜 무죄’를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재심 이유를 규정하는 형사소송법 420조대로, 수사과정에서 위법과 조작 등이 있었으니, 그녀를 법의 심판대에 다시 세우자는 겁니다. 김신혜는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적법절차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김신혜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박상규 기자, 신윤경 변호사와 저는 무엇도 바라지 않고, 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김신혜의 재심’만을 바랍니다. 김신혜는 “나도 대한민국 국민이 맞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법원은 답을 줘야 합니다.
(박상규 기자가 2015년 카카오 스토리펀딩에 연재했던 기획입니다. <셜록>에 다시 옮겼다는 걸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