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에서 김나나 작성

필 스크래턴 교수는 영국 형사법 권위자이면서 힐스보로 독립조사위원회 패널 멤버다. 그는 최종 리포트의 저자이기도 하다.

청문회에서 만난 한 변호사는 스크래턴 교수를 두고 “영국에서 힐스보로 사건을 스크래턴 교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방대한 조사 내용을 총괄한 저자로서 누구보다 사건의 진실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사람이다. 그런 필 스크래턴 교수가 본 연재의 취지를 듣고 독립조사위원회의 개념을 직접 알려주겠노라며 만남에 응했다.

영국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퀸스대학.

스크래턴 교수는 2009년 의회가 정부문서 공개 결정을 내린 후 영국 정부가 가장 먼저 연락한 전문가이다. 진상조사 결과에 따라 관련자들이 형사 처벌될 여지도 있으므로, 영국 정부는 그에게 객관적, 독립적으로 사건을 조사할 수 있는 모델을 고안하기 위해 조언을 구했다.

그는 과거 여러 비슷한 사건에서 피해자들을 도왔던 경력으로 국민의 신뢰를 받았다. 정부는 그의 의견을 반영한 모델을 힐스보로 유가족도 받아들일 거라 여겼다.

스크래턴 교수는 정부의 의뢰를 받고, 힐스보로 유가족 의사는 물론 각 분야 전문가 의견을 취합해 독립조사위원회 모델을 제시했다. 영국에서도 최초로 시도된 방식이었다.  

무엇보다 이는 정파적인 관점을 떠나서 독립성과 전문성을 갖춘 조사기구를 만드는 데 정부, 전문가, 시민사회가 동의하고 실현해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독립조사위원회가 승인된 뒤 스크래턴 교수는 패널 멤버와 리포트의 저자로 임명됐다.

형사법 분야의 권위자라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가 힐스보로 유가족의 지지를 받았고, 객관적인 진상조사를 진행할 인물로 정부로부터 신뢰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양쪽 모두 만족시킬 인물이었다.

스크래턴 교수는 다른 패널 멤버를 정부에 추천하고 협의를 벌여 독립조사위원회를 꾸렸다. 위원회 패널은 유가족, 사우스 요크셔 경찰서, 응급의료기관, 정부, 언론 등 관련자들을 모두 반영할 수 있는 각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되었다. 

독립조사위원회가 중립적인 기관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독립조사위원회는 반정부성향의 기관이 아니었다. 패널 맴버 누구도 정부를 비난할 의도가 없었으며, 반대로 유가족을 대변한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물론 정권과 유착관계에 있지도 않았다.

핵심은 조사기관에 어느 편 사람을 더 넣느냐가 아니었다. 중립적이며 누구나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라는 점이 패널 멤버 선택 기준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진보, 보수가 모두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했다.

이런 면에서 한국의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구성은 아쉬움이 크다. 정부 인사가 포함되었다는 분명한 오류 말고도 위원회 멤버 전체 구성에서 문제점이 보인다. 중립성과 전문성을 우선 고려하기보다 여야 간 나눠 먹기 식으로 위원회가 구성된 탓이다.

영국은 독립조사위원회의 공정성을 위해 현직이 아닌 은퇴한 전문가를 위주로 구성했으며, 정치적 중립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종교계 인사를 포함하기도 했다. (하단부 독립조사위원회 패널 멤버 소개 참조)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도 이러한 구성이 필요하다. 국내에서 중립적, 객관적 조사를 할 인물을 찾기 힘들다면 외국 전문가에게 진상조사를 맡기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  독립조사위원회가 의회의 정부문서 결정에 따라 얻게 된 정보접근권의 규정은 ‘관련문서전부’였다. 숫자로 따지면 정부기관 문서 200만 개가 대상이었다.

독립조사위원회 멤버들은 각 정부기관별 문서 제공 방법, 최종리포트의 구성 내용, 대중에 공개되지 말아야 할 사항(논의 끝에 피해자의 사생활과 관련된 부분은 제외되었다) 등을 포함한 업무의 범위, 그리고 독립조사위원회가 가지는 권한을 놓고 정부와 협의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독립조사위원회의 5가지 역할을 발표한다.

1. 관련기관의 문서 공개 과정 감독 
2. 희생자가족 상담 
3. 진상조사 내용 대중 공개과정 감독 
4. 조사를 위한 관련 문서내용 분석 및 연구 작업 
5. 위원회의 진상조사 내용을 패널 리포트를 통해 공개

독립조사위원회는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특별 기구로서, 진상조사를 위해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독립조사위원회에서 관련문서로 분류해 요구한 문서는 어느 정부기관이든 제출해야 했다.

위원회는 어떠한 수정이나 은폐, 조작도 허용하지 않았으며 끈질긴 추적으로 원하는 문서의 원본을 찾아내곤 했다.

유가족에 대한 배려는 언제나 결정의 중심에 있었다. 정부는 ‘유가족 상담’을 독립조사위원회의 주요 업무로 지정함으로써, 조사가 이루어지는 2년 동안 유가족에게 지난 20년간 하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를 할 기회를 주었다.

유가족의 관점과 의견은 충분히 반영되었으며 이는 독립조사위원회의 결과물을 유가족들이 받아들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최종 리포트는 유가족에게 우선 공개한 뒤 대중에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진상조사의 핵심은 유가족에게 참사 관련 의문을 풀고 그들을 위로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근엄한 영국 법원 판사도 청문회 시작 전에 유가족에게 먼저 다가와 안부를 물으며 그들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애썼다.

반면 사건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세월호 유가족에게 금전적 배상부터 먼저 꺼낸 한국 정부는 위로의 기능을 실현할 의지도 방법도 없어 보인다.

2012년 9월 12일, 독립조사위원회 패널 멤버들은 약속된 대로 500여 명의 유가족과 사건 관련자 앞에서 가장 먼저 독립조사위원회 최종 리포트 내용을 발표했다.

최종 리포트는 결과적으로 힐스보로 참사는 막을 수 있었으며, 96명의 희생자 중 41명이 경찰의 초기대응 실패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힐스보로 독립조사위원회는 수정되고 폐기된 문서의 원본을 찾아 알려졌던 내용과 일일이 대조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사건 직후 벌어진 정부, 경찰, 언론의 조작과 20년간 이뤄진 은폐 과정을 낱낱이 밝혔다.

유가족은 1시간 30분가량 이어진 최종리포트의 각 챕터 내용을 들으며 눈물과 환호로 답했다.  발표가 끝난 뒤 패널 멤버들에게 약 5분간 기립박수를 보냈다. 유가족들은 그들의 노고에 감사했으며 영국에서도 전례가 없는 진상조사를 해낸 멤버 하나하나에게 경의를 표했다.

같은 날 395페이지에 달하는 최종 리포트의 내용은 영국 시민 누구나 열람이 가능하도록 온라인으로 공개되었다.

독립조사위원회가 2년간 검토한 문서 200만 건 중 최종보고서에 반영되거나 발췌된 정부 문서는 지금도 온라인상에서 리포트의 해당 부분을 클릭하면 원본을 볼 수 있다. 대중에 진상조사 결과를 알리고 그 내용을 역사에 남기려는 정부의 뜻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최종 리포트 공개 후 리버풀 시민들은 독립조사위원회 패널 멤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기 위한 특별한 자리를 마련했다.

세인트 조지 홀(Saint Goerge’s Hall. 리버풀 시내에 위치한 유서 깊은 대형 건축물로 각종 전시회와 연회, 축제 등의 행사에 사용된다)에서 열린 행사에 수만 명의 리버풀 시민들이 참석했다. 리버풀 시는 행사를 위해 세인트 조지 홀 주변 주요 도로 운행을 일시 폐쇄했다.

행사에서 리버풀 시민들은 희생자들을 위한 96개의 초를 밝히는 기념식을 열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패널 멤버 한 명씩 시민들에게 소개됐고, 시민들은 눈물과 환호로 그들을 맞이했다.

여러 형사 사건에서 유가족들을 도와온 스크래턴 교수는 이날을 인생에서 가장 인상 깊은 순간으로 기억한다.

2012년 9월 12일 독립조사위원회 패널 멤버들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세인트 조지 홀 앞에 모인 리버풀 시민들.
희생자 추모를 위해 밝혀진 초.

독립조사위원회의 역할은 관련자 처벌이 아니었다. 독립조사위원회에는 사건 기소와 같은 사법적 권한이 없었다.

독립조사위원회는 진상조사를 위한 기관이었고 ‘조사한 사실을 나열한다(investigate and arrange the facts)’는 과제를 충실히 해냈다. 어떠한 의견이나 평가도 배제한 채 사실조사만을 해냈고 이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사법 절차가 개시되었다.  

최종 리포트를 근거로 하여 과거의 청문회(본 연재에서 청문회로 번역한 ‘Inquest’는 사법 절차 안에서 이루어지며 향후 형사재판에서의 기소명을 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결과를 파기하고, 새롭게 2차 청문회가 열리고 있다. (2015년 8월 기준)

이 결과에 따라 내년, 사건 발생 27년 만에 책임자들에 대한 형사처벌이 진행될 예정이다.

참사의 충격과 이념의 갈등 속에서도 민주주의 국가의 삼권분립 체계를 흔들지 않으며 철저히 각 기관의 권한 내 기능에 근거해 문제를 풀어나가고, 결과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이 선진 시스템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힐스보로 독립조사위원회의 이런 성과에 대해 일부 사람들은 ‘영국이니까 가능했겠지’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세월호 유가족과 그들을 돕는 사람들에게 영국의 사례를 통해 알리고자 하는 바는 ‘이것은 게임이다’라는 슬픈 현실이다.  그들은 이제 거대하고 강력한 조직인 정부를 상대로, 정부만이 경험이 있는 협상을 해야 한다. 영국에서도 그러했다.

정부의 실패에 대해 이성적인 반성을 이끌어내는 건 어느 사회에서나 쉽지 않다. 영국에서도 1989년 힐스보로 사건 발생 이후 2009년 정부문서 공개 결정까지 20년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비이성적인 과정이 벌어졌다.

정부는 전 국민이 생방송으로 지켜본 경찰의 과실을 부인했고, 언론은 사실을 조작하며 은폐했다. 힐스보로 사건과 관련해 영국 언론의 저널리즘은 2009년까지 죽어 있었다. 하지만 유가족은 포기하지 않았고 시민의 지지가 이어졌다.

영국은 여러 진통을 겪으며 조금씩 전진했다. 한 용기 있는 국회의원의 결단이 결국 물꼬를 텄고, ‘공정하고 중립적으로 제대로 조사할 기구를 만들자’라는 정부의 결심을 이끌어냈다.

독립조사위원회라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한 스크래턴 교수를 포함한 패널 멤버들은 세금낭비 아니냐는 비난과 유명해지고 싶어서 그러느냐는 조롱 속에서도 객관적, 과학적, 민주적 진상조사라는 성취를 이뤄냈다.

힐스보로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언론의 주목을 노리며 스타가 되고자 했던 정치인, 변호사, 언론인, 전문가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2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일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스크래턴 교수와 같은 패널 멤버들, 끈질기게 진실을 추적했던 <데일리 미러>의 브라이언 리드(Brian Reade) 기자, 그리고 현재 힐스보로 유가족의 변호사들을 꼽을 수 있다.

26년이 지나고 언론의 관심도 사그라들어 모두가 떠나간 지금까지도 유가족 곁에 남아 있는 힐스보로 유가족의 변호사들은 힐스보로 사건을 가리켜 “내가 죽기 전까지, 아니면 죽은 후라도 진실을 밝힐 사건’이라 부르곤 했다.

서로 “관련자 처벌 전에 내가 먼저 죽거든 사건파일은 A캐비닛에 있고 비밀번호는 XXXX야”라고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패널 멤버들은 지금도 힐스보로 청문회 동안 사건과 관련해 분야별 조언을 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많은 멤버들이 아무 보수 없이 오랜 기간 봉사하고 있다.

스크래턴 교수 또한 “경제적 수입은 교수 월급으로 얻으며 수업과 연구활동 외 개인적으로 하고 있는 피해자 가족 원조 활동은 본인의 재능을 사회에 돌려주는 선물”이라 표현했다. 이러한 희생 없이는 독립조사위원회의 성과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스크래턴 교수를 처음 만난 날이었다. 1971년 북아일랜드에서 자행된 영국군의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인 Ballymurphy 사건의 유가족을 돕고 있었던 그는 IRA(북아일랜드 독립군) 투쟁의 역사의 현장인 ‘International Wall(각국의 민주주의 투쟁과 인권, 독립을 위한 투쟁의 모습을 남기는 구교도 커뮤니티에 있는 대형 벽화들로 이어진 벽)’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약속을 잡기 위해 연락처를 확인하는데 스크래턴 교수는 휴대폰이 없고 지금까지 당신에게 받은 전화는 모두 발신자 번호 제한으로 왔다고 하자 그는 말했다.

“아, 맞아. 내가 집 전화 설정을 그리 해놨지. 집으로 살해 협박 전화가 너무 많이 와서..” 

이메일로 집 번호를 남기겠다는 말을 남기고 소형차를 타고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를 가진 영국 사회는 얼마나 행운인가.

(2015년 카카오 스토리펀딩에 연재했던 기획입니다. 해당 기사를 2021년 <셜록> 홈페이지에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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