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리버풀에 도착한 날, 편도선이 심하게 부었다. 취재를 못하고 숙소에서 끙끙 앓으며 하루를 보냈다. 해질 무렵, 결국 리버풀대학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중년의 여자 의사는 내 입속을 유심히 살폈다.
“약을 줄게요. 그거 먹으면 통증이 많이 약해질 겁니다. 근데, 리버풀은 왜 왔어요?”
“힐스보로 참사 취재하러 왔습니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한국에서 왔다고 했죠? 세월호 참사 소식을 들었어요. 정말 끔찍한 참사입니다. 당신들도 쉽지 않은 싸움을 해야 할 겁니다. 정의는 쉽게 구현되지 않아요. 취재하다 보면 알게 될 거예요. 많은 사람이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진료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영국의 병원은 이방인에게도 진료비를 받지 않았다. 병원에서 나와 바로 숙소로 돌아가지 않았다. 직접 알아보고 싶은 게 있었다. 리버풀에 오기 전, 여러 사람이 말했다. 리버풀에서는 영국 일간지 <더 선>을 구경하기도 힘들 거라고 말이다. 병원 앞 한 가게에 들렀다.
“<더 선> 있어요? 한 부만 주세요?“
머리가 벗겨진 남자 주인이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관광객이에요? 한 가지 알아 두세요. 리버풀에서는 <더 선>을 구하는 게 불가능 할 겁니다. 꼭 읽고 싶다면 다른 도시로 가세요.”
뒤끝(?)은 확실했다 리버풀 시민들은 <더 선>에 감정이 좋지 않다. 1989년 4월 15일 힐스보로 참사 이후부터다. 그날 힐스보로 경기장에서 열린 축구팀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의 FA컵 4강 경기에서 참사가 발생했다.
압사 등으로 리버풀 팬 96명이 사망했다. 희생자 중 절반은 10대였다. 진상조사 결과 참사의 원인은 경찰의 무능, 판단 착오, 대처 미흡이었다.
<더 선>은 진실을 왜곡했다. 이 신문은 참사 직후 “술 취한 훌리건이 난동을 불렸다” “관중이 경찰의 구조 활동을 방해했다” 식으로 보도했다.
이 직후부터 <더 선>은 리버풀을 떠나야 했다. 절대 다수의 리버풀 시민은 여전히 <더 선>을 사지도 읽지도 않는다.
뒤끝만 확실한 게 아니다. 진실 규명을 위한 노력도 확실했다. 리버풀 시민은 힐스보로 참사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과 함께 진실을 위해 약 25년을 싸웠다. 지금까지 힐스보로 참사 원인 규명을 위한 진상조사위원회가 세 번이나 출범했는데, 여기에는 리버풀 시민의 지지와 요구가 큰 힘을 발휘했다.
리버풀에서 힐스보로 참사 추모 공간 찾기는 쉽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리버풀 도심에 설치된 추모비를 찾는다. 참사가 발생한, 리버풀에서 조금 떨어진 셰필드의 힐스보로 구장 한 켠에도 추모 공간이 마련돼 있다.
축구팀 리버풀 홈구장인 안필드에 마련된 공간은 인상적이다. 경기장 2층에 자리한 일종의 ‘홍보관’에는 리버풀 팀의 역사와 영광의 순간이 모두 집약돼 있다. 홍보관에서 ‘리버풀의 상처’는 배제 대상이 아니다. 여기에도 힐스보로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공간이 있다.
리버풀 팀의 경기 장면이 나오는 ‘작은 상영관’은 감동적이다. 고단한 일을 마친 노동자가 허름한 옷을 입고 축구경기 보는 모습을 재현해 놓았는데, 리버풀의 응원가 ‘You will never walk alone’이 계속 흘러나온다.
이 곡은 행진곡 풍의 힘찬 노래가 아니다. 가사와 느린 멜로디 모두 애잔하다. 한 대목은 이렇다.
“바람 속을 걸어요. 빗속을 걸어요. 비록 당신의 꿈이 날아가고 빗나갔더라도, 당신의 희망을 가슴속에 품고 계속 걸으세요. 그러면 당신은 결코 혼자 걷는 것이 아니에요. 당신은 결코 혼자 걷는 것이 아니에요.“
이 노래는 축구장에서만 울려 퍼지지 않는다. ‘You will never walk alone’은 힐스보로 참사를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세월호 참사를 상징하는 “잊지 않을게”의 영국 버전은 ‘You will never walk alone’이다. 리버풀 시민은 힐스보로 참사 희생자 유가족이 혼자 빗속을 걷게 하지 않았다. 함께 싸웠고, 함께 진실의 끝을 봤다.
2015년 9월, 안산에 갔다. 영국의 리버풀처럼 안산은 노동자의 도시다. 리버풀에서는 축구 보러 떠난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안산에서는 수학여행 간 자식들이 돌아오지 않았다.
리버풀처럼, 안산에도 상처가 남았다. 안산에서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과 현수막은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속은 좀 복잡하다. 풀어야 할 숙제가 많은 듯하다. 여러 시민은 세월호 참사에 대해 말을 아꼈다.
“서로 상처 받지 않게, 잘 풀어야지요.“
여러 사람의 입에서 이런 비슷한 말이 나왔다. 특히 단원고의 고민은 깊어 보였다. 작년에 수학여행을 떠난 2학년 아이들은 내년 1월 혹은 2월이면 졸업이다. 몇 개월 남지 않았다.
학교로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의 자리는 아직 그대로다. 단원고 2학년 교실은 ‘명예 3학년’ 교실로 바뀌어 존치돼 있다. 이 교실에는 침묵과 노란색의 추모 마음이 출렁인다.
‘내년 2월이면, 이 교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교실을 치워야 하는가, 아니면 추모 공간으로 그대로 둬야 하는가.’
단원고는 지금 경계에 서 있다. 재학생 학부모들의 마음은 복잡하다. 크게 주장하지는 않지만, 교실이 정리되길 바라는 눈치다. 한 학부모는 아이들의 학습권을 이야기했다.
“추모하는 마음은 당연히 중요하죠. 하지만 아이들의 공부할 권리도 존중해야죠.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서로 잘 합의했으면 합니다. 희생자 가족 의견도 무시되지 않았으면 해요. 내 아들이 그렇게 희생됐으면, 저 역시 그들처럼 싸웠을 겁니다.“
민감한 주제다. 경기도교육청은 물론이고 단원고 역시 고민이 깊다. 확실한 답을 내리기 곤란한 눈치다.
경기도교육청 측은 “단원고-세월호 유가족-재학생과 학부모의 의견을 잘 듣고 일을 좋은 쪽으로 진행하겠다”는 원론적인 말을 했다.
문제는 교실만이 아니다. 세월호 분향소가 설치된 안산 화랑유원지 인근 상인들은 “영업 피해를 봤다”며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 경기도, 안산시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화랑유원지는 많은 시민이 즐기는 곳이었는데, 분향소 설치 이후 사람들 발길이 끊겨 장사가 안 된다는 주장이다. A식당 주인은 말했다.
“희생자 가족 마음을 왜 모르겠나. 하지만 우리는 어쩌란 말인가. 손님이 확실히 끊겼다. 뭔가 대책이 나와야하지 않나. 지자체는 언제까지 여론 눈치를 볼 작정인가. 분향소 이전이나 축소를 주장해도 지자체는 명확한 답을 하지 않는다.”
상인들은 유가족 측보다 지자체가 어떤 대응책을 마련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이렇게 안산은 명확하게 말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상처를 안은 공동체가 넘어야 할 고개다. 리버풀대학 의사가 말한 대로다.
“쉽지 않은 싸움을 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
사람 사는 세상에선 당연히 여러 의견이 존재한다. 각자의 이해관계도 다르다. 세월호 참사 이후 1년 6개월 여가 흐른 한국 사회. 지금 어디를 항해하고 있을까?
단원고와 안산은 무엇을 해야 할까?
이 기획에서 계속 말한 대로, 영국은 힐스보로 참사 해결을 위해 25년째 진실을 찾고 있다. 한국에서는 세월호 참사 몇 개월 만에 여기저기서 “이젠 지겹다”는 말이 터져 나왔다. 진실을 찾지 않고, 책임 묻기를 주저하기에 한국에서 대형 참사가 반복되는지도 모른다.
이런 사회에서 다음 희생자는 언제든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좁게는 안산과 단원고는 무엇을 해야 할까?
세월호의 오래된 미래, 힐스보로 참사를 풀어가는 영국 사회는 우리에게 방향을 알려준다. 지난 2012년 영국 캐머런 총리는 힐스보로 참사에 대해서 사과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23년이 지난 후에도 이 일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에 대해 정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이 일은 희생자 가족의 일일 뿐만 아니라 리버풀과 영국 전체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중략) 힐스보로 희생자 가족들과 정의를 향한 그들의 오랜 여정을 지지해 준 그 공동체의 놀라운 힘과 위엄에 경의를 표합니다.“
캐머런 총리가 언급한 ‘그 공동체의 놀라운 힘과 위엄’은 상처를 외면하지 않은 리버풀 시민을 뜻한다.
리버풀의 자존심은 축구선수 제라드, 전실이 된 비틀즈만이 아니다. 리버풀 시민은 이웃의 상처와 아픔에 눈감지 않은 지난 25년의 역사를 무엇보다 자랑스러워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1년 6개월, 이제 한국은 무엇을 해야 할까?
(2015년 카카오 스토리펀딩에 연재했던 기획입니다. 해당 기사를 2021년 <셜록> 홈페이지에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