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 바랜 분홍 보따리는 깨끗하지 않았다. 손때 묻은 보따리 매듭을 풀자 수백 장에 이르는 A4 서류 뭉치가 나왔다. 고문서처럼 누렇게 변한 종이는 만지면 부서질 듯했다. 한 장 한 장, 조심스럽게 종이를 넘길 때마다 눅눅한 냄새가 났다.
“주먹 만한 돌로 여자 머리를 한 번 내리 찍었습니다.”
오래된 종이에 새겨진 글에서는 피 냄새가 났다. 두개골이 함몰된 채 낙동강에서 발견된 한 여성의 죽음. 살인범으로 지목된 두 남자 장동익-최인철의 자백과 수사, 재판 기록. 두 남자에게 적용된 죄명에서는 공포의 냄새가 났다.
‘강도살인, 강도상해, 강도강간, 특수강도, 특수감금.’
약 20년간 분홍 보따리에 묶여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누런 종이의 내용은 놀랍다. 훗날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는 두 남자의 이름도 나온다. 노무현과 문재인이다. 윤관 전 대법원장, 김외숙 현 법제처장 이름도 있다.
보따리의 주인이자, 종이에 살인범으로 나오는 장동익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이 보따리가 어떻게 선생님께 전해진 겁니까?
“저희 어머니가 간직하던 겁니다. 문재인 대통령께서 변호사 시절에 줬다고 합니다.”
- 어머니 좀 같이 뵈러 갈 수 있을까요?
“언제요? 당장 내일 가자고요?”
어머니 만나러 장동익과 함께 경북 영천으로 향한 2017년 9월 2일 오후.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이 눈부셨다. 장동익은 승용차 뒷좌석에 앉았다. 그에게 “날씨가 참 좋다, 구름이 예쁘다”고 말했다.
“네.. 날씨가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장동익은 차창에 눈을 가까이 대고 하늘을 보면서 눈을 껌뻑였다. 순간, 그에게 미안했다. 장동익은 1급 시각장애인으로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저희 엄마는 제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렇게 앞을 볼 수 없으니, 얼마나 엄마 속이 탔겠습니까. 제가 옥살이를 하니까 또 속이 타들어 가고. 재가 돼서 속에 남은 게 없었을 겁니다.”
장동익 어머니는 2003년 11월 2일 사망했다. 향년 73세. 아버지는 이듬해 눈을 감았다. 장동익은 두 분 죽음을 지키지 못했다. 그는 진주교도소에서 복역중이었다. 그의 부모님은 영천호국원 납골당에 안장돼 있다. 장동익의 부친 장재윤(1928년생)은 한국전쟁 때 국군으로 참전했다.
“기자님, 사람 속 타는 냄새 맡아 보셨습니까? 그게 어떤 냄새인지 아십니까?”
장동익은 많은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자신이 어쩌다 살인누명을 쓰고 무기수가 됐는지, 어머니가 아들의 누명을 벗기려 어떻게 홀로 세상과 싸웠는지, 대한민국이 참전용사 가족을 어떻게 무너뜨렸는지, 문재인 변호사가 자신의 무죄 입증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얽힌 실타래 같은 장동익의 인생은 제 기능을 잃은 두 눈을 제외하고 설명할 수 없다. 그의 꼬인 삶을 풀어줄 핵심 열쇠 중 하나 역시 그의 눈이다.
장동익(1959년생)은 자신에게 시각장애가 있다는 걸 늦게 알았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칠판에 적힌 글자가 흐릿하게 퍼져 보였다. 서울 금호초등학교 4학년 때, 시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교실 맨 앞에 앉아도 소용없었다. 혼자 등하교 하는 일도 버거웠다. 친구들과 뛰어 놀 수도 없었다.
6학년 교과서를 받아놓고 더는 학교에 갈 수 없었다.
“눈도 안 보이고, 학교도 못 다니고.. 어린 마음에 얼마나 실망이 크던지요. 한동안 밖에 나가지도 않고 불 꺼진 방안에서 울면서 웅크리고 살았어요. ‘내가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하나..’ 이런 생각밖에 안 했습니다.”
시력은 이때부터 장동익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엄마는 장동익의 손목을 잡고 이 병원, 저 한의원에 부지런히 다녔다. “용한 뜸쟁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저 멀리 서울 구파발 넘어 고양시 쪽으로 가 쑥뜸을 받기도 했다.
안경을 써도 교정되지 않은 시력은 쑥뜸으로도 다스려지지 않았다. 장동익의 나쁜 시력 원인은 치료가 불가능한 시신경위축, 일종의 유전이었다. 알고 보니 장동익의 외삼촌, 이모는 물론이고 외사촌도 시력이 좋지 않았다. 엄마 쪽 유전으로 보였다.
엄마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했다. 아들 인생 망쳤다고 생각한 엄마는 쑥뜸보다 진하고 독한 담배를 많이 피우기 시작했다. 장동익은 18세 때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참전용사였지만, 장동익은 눈 때문에 군대도 못 갔다. 장동익이 20대 중반이 됐을 때, 그의 엄마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부산 중구 메리놀병원, 부산지역 최초로 안은행 개설!’
엄마는 장동익의 손목을 잡고 메리놀병원으로 향했다.
“나는 그동안 좋은 거 많이 보고 살았으니까, 더는 안 봐도 괜찮아. 볼 거 다 봤어. 나보다 네가 살날이 많이 남았잖아. 어차피 늙어 죽으면 다 썩어 없어지는 거니까.”
각막이식이든, 안구교체든 엄마는 자기 눈을 아들에게 주려 했다. 의학적으로 가능하든, 불가능하든 엄마는 일단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가 엄마의 희망을 꺾었다.
“아드님의 시신경위축 증상은요, 안구나 각막을 바꾼다고 치료가 되는 게 아닙니다. 뇌와 눈을 연결하는 신경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눈을 교체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병원을 나오면서 장동익과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은 서로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내 눈으로 네 앞길을 좀 밝혀주고 싶었는데, 이것도 안 되는구나. 엄마는 이제 너한테 뭘 해줘야 하냐. 내가 자식 인생을 망친 것 같구나.”
엄마는 다시 독한 담배를 피웠다. 그때 장동익이 맡은 건 담배 냄새가 아니었다. 사람 속 타들어가는 냄새였다. 그때 장동익은 더는 웅크려 좌절하지 말고 자신있게 살자고 다짐했다. 그게 엄마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다짐처럼 한동안 삶은 순탄하게 나아갔다. 장동익은 1989년 신발공장에서 만난 아내와 결혼했다. 이듬해 4월 4일 딸 장경현(가명)를 낳았다. 장동익 엄마는 물론 모든 가족이 좋아했다. 기쁨과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1991년 11월 8일 저녁, 어떤 남자가 “잠깐 이야기 좀 하자”며 장동익을 불렀다. 이로써 장동익의 짧은 화양연화(花樣年華)도 끝났다.
장동익이 끌려간 곳은 부산 사하경찰서. 친구 최인철이 먼저 와 있었다. 경찰이 장동익에게 물었다.
“낙동강 을숙도에서 공무원 사칭하면서 시민에게 돈 3만 원 받은 적 있지?”
“그게 뭔 소립니까?”
장동익은 며칠 전 최인철의 승용차를 타고 을숙도에 간 일을 떠올렸다. 을숙도에 도착했을 때, 최인철은 잠시 기다리라며 밖으로 나갔다. 장동익은 승용차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당시 최인철은 을숙도 철새도래지를 관리하는 활동을 했다. 최인철은 금방 돌아왔다. 그는 장동익에게 어묵 한 그릇을 사줬다. 이게 장동익이 기억하는 ‘을숙도의 추억’ 전부다. 최인철이 시민에게 돈을 받았다고는 생각도 못했다.
어쨌든 장동익은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금방 풀려날 걸로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날인 9일 장동익, 최인철은 구속됐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부산 영도 남항동에 살던 장동익의 어머니도 아들이 곧 나올 거라 생각했다. ‘나쁜 짓도 눈 좋은 놈들이나 할 수 있지, 앞도 제대로 못 보는 내 아들이 뭔 짓을 했겠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웃이 다급하게 자신을 불렀다.
“보소, 동익 엄마! 얼른 집에 들어가 TV 뉴스 좀 보소! 뉴스에 아들 나오네!”
엄마는 급하게 집으로 들어가 TV를 켰다. 장동익은 수갑을 차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앵커가 아들에 대해서 이런 취지로 설명했다.
“부산 사하경찰서는 낙동강에서 잔혹한 방법으로 부녀자를 강간살인한 범인 두 명을 체포했습니다.”
장동익도 경찰서 유치장에서 이 뉴스를 들었다. 유치장에 있던 누군가가 장동익의 어깨를 툭툭 치며 “어이, TV에 당신 나오네”라고 이야기 해줬다. 철창 밖 저 멀리 TV를 볼 수 없는 장동익은 뉴스를 귀로 들으며 혼잣말을 했다.
“저게.. 뭔 소리야.. 누가 누구를 죽였다는 거야..”
옆 유치장에 있던 친구 최인철은 이미 경찰에게 물고문 당하며 허위자백을 강요받은 걸 장동익은 모르고 있었다. 이제 장동익이 차례다.
사하경찰서로 끌려온 지 나흘째인 11월 12일, 경찰이 장동익을 밖으로 불렀다. 경찰서 본관 바로 옆 별관 사무실 소파에 장동익을 앉히고 홍OO 경찰이 물었다.
“낙동강에서 여자 죽였어? 안 죽였어?”
“그게 뭔 소립니까?”
홍OO은 장동익의 뺨을 때리고, 발로 툭툭 차면서 똑같은 물었다. 장동익의 답변도 똑같았다. 경찰은 본격적인 ‘공사(고문)’를 시작했다. 은빛 쇠파이프를 이용해 장동익을 통닭처럼 거꾸로 매달았다. 경찰은 장동익 얼굴에 수건을 씌우고 물을 붓기 시작했다. 친구 최인철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장동익에게 속삭였다.
“낙동강에서 여자 죽였어, 안 죽였어? 인정하면 왼손 검지 까딱까딱 움직여.”
물고문은 ‘고통의 신세계’였다. 그래도 장동익은 끝내 왼손 검지를 움직이지 않았다. 고문은 오래 이어졌다. 장동익은 경찰이 원하는 답을 하지 않았다.
“이 새끼, 이거 의외로 독하네.”
장동익은 늦은 밤, 유치장으로 돌아갔다. 다음날인 13일 오후, 경찰은 장동익을 사하경찰서 형사과장실로 끌고 갔다. 친구 최인철도 불려왔다. 사하경찰서 형사7반 주임 허OO이 대질을 시작했다. 장동익에 앞서 몇차례 물고문을 당해 기선이 제압된 최인철에게 허OO이 물었다.
“낙동강에서 너랑 장동익이랑 여자 때려 죽인 거 맞지?”
고개를 푹 숙인 최인철은 작은 목소리로 짧게 “네”라고 답했다. 장동익이 소리쳤다.
“그게 뭔 소리야? 사실 대로 이야기 해. 우리가 언제 사람을 죽였어!”
“동익아, 내가 벌 많이 받고, 너는 적게 받고.. 그렇게 하자. 그냥 시인하자.”
장동익의 눈이 뒤집혔다.
“야, 인마! 그때 우린 만나지도 않았는데, 시인하긴 뭘 시인해! 그냥 사실대로 말을 해.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날 밤, 경찰은 아직 허위자백을 하지 않은 장동익을 상대로 다시 ‘공사’를 시작했다. 이번엔 장동익의 두 눈에 테이프를 붙였다. 경찰은 장동익의 웃옷을 벗기고 찬 수건으로 천천히 가슴을 닦았다. 그 뒤 또 장동익을 거꾸로 매달아 얼굴에 찬물을 부었다.
“사람 죽였다고 자백할 거면, 신호를 보내 왼손 검지 까딱까딱, 알지?”
독한 장동익도 여기까지였다. 고문을 이기는 사람, 이 세상에 없다. 왼손 검지 까딱까딱, 정신을 몇 번 잃고 죽을 것만 같은 순간에 장동익은 신호를 보냈다. 드디어 ‘통닭’ 신세에서 벗어났다.
이제는 받아쓰기 시간. 경찰은 장동익이 최인철과 함께 여자를 죽였다는 내용을 불러줬다. 장동익은 초등학생 1학년처럼 받아 적었다. 열이 맞지 않고 삐뚤빼뚤, 정말 초등학교 1학년이 쓴 듯한 자술서가 탄생했다. 시각장애인 장동익에겐 그런 글쓰기가 최선이었다.
장동익과 최인철은 11월 18일 검찰에 송치됐다. 부산구치소에 구속된 상태로 검찰 수사를 받기 시작했다. 장동익은 다시 힘을 냈다. 그는 “경찰의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했다”고 검사에게 진실을 말했다.
이번엔 최인철 차례. 고문 경찰의 감시 아래에 있던 최인철은 검찰에서의 1차 피의자 진술에서도 허위자백을 했다. 이 내용은 고스란히 녹화됐다.
검사는 장동익을 다시 불러 범행을 인정하는 최인철의 모습이 담긴 비디오를 보게 했다. 그의 어머니도 검찰로 와서 함께 비디오를 봤다. 엄마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 크게 낙심했다.
“아이고, 동익아.. 텄구나 텄어. 저거 때문에 일이 힘들겠구나..”
어머니는 울듯이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동익은 이후에도 계속 결백을 호소하며 경찰의 허위자백을 뒤집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검찰은 믿어주지 않았다. 장동익은 하소연했다.
“어떻게 해야 제 말을 인정해 주겠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말을 해야 믿어줄지 모르겠습니다.” – 1991년 11월 25일 검찰이 작성한 장동익 3차 피의자 신문조서.
장동익은 거의 날마다 이른 아침 검찰로 불려와 저녁에야 부산구치소로 돌아갔다. 혹시라도 아들을 만날 수 있을까, 그의 어머니는 매일 검찰청으로 왔다. 면회는 금지였다.
검찰 수사를 마친 장동익이 다른 재소자와 함께 굴비처럼 줄줄이 묶여 구치소로 향하는 호송차에 오르는 그 순간. 바로 이때가 아들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엄마는 이 순간을 위해 장동익이 검찰 수사를 받는 그 겨울 내내 검찰청 밖에서 대기했다.
“동익아! 엄마 여기 있다! 몸은 괜찮냐?”
엄마는 아들을 볼 수 있었도, 시각장애인 아들에겐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아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지만, 경비들이 막아서며 뒤로 밀어냈다. 실랑이가 벌어져 아수라장이 된 현장. 장동익은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두리번거리며 허공에 외쳤다.
“엄마, 추운데 얼른 집에 들어가!”
그런 아들 모습에 엄마의 가슴은 또 탔다. 엄마는 다음날, 그 다음날도 이 짧은 순간을 위해 검찰청을 찾았다. 아들이 보이면 엄마는 “동익아!” 외쳤고, 아들은 “추운데 얼른 들어가!”라고 다시 허공에 외쳤다.
한동안 둘은 이렇게 도돌이표 같은 짧은 대화를 나눴다. 추운 겨울 어느날, 구치소로 검찰의 공소장이 도착했다. 구치소 방마다 일명 ‘대빵’이 한 명씩 있었다. 이들은 거의 조폭이었다. 대빵이 장동익의 공소장을 읽었다.
“강도살인, 강도상해, 강도강간.. 이야, 장동익 끝내주네! (다른 재소자들에게) 이제부터 장동익에게 잘해줘라.”
살인범을 표시하는 붉은색 수번이 장동익 왼쪽 가슴에 붙었다. 이제 장동익이 믿고 의지할 사람은 판사뿐이었다. 장동익은 재판 과정 내내 범행을 부인하고 결백을 주장했다. 그는 동료 재소자에게 부탁해 판사에게 보내는 긴 탄원서를 썼다. 1992년 3월 28일 보낸 탄원서에 장동익은 이런 말을 적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내내 만수무강하세요.”
검사는 “스스로 인간이기를 저버리고 약수의 길을 택한 이들에게 관용과 동정을 베풀 여지가 없다”며 장동익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1심 법원은 1992년 8월 11일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장동익은 항소했다.
그의 어머니는 변호사를 바꿔 2심 재판을 준비하겠다고 면회 때 말했다. 장동익은 같은 변호사가 맡아야 한다고 만류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따르지 않고 인권변호사를 찾아 나섰다.
문재인 변호사가 2심 때부터 장동익-최인철의 변호인으로 활동했다.
엄마는 거의 날마다 부산구치소로 아들 면회를 갔다. 앞도 제대로 못 보는 아들이 수감을 어떻게 할지, 엄마의 속은 탔다. 장동익은 날마다 찾아오는 어머니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엄마, 나 잘 지내니까 면회 그만 와. 죄책감 때문에 내 마음이 아파서 그래.”
“이놈아, 오지 말라는 소리 좀 하지 마. 그 말 들으면 엄마 마음이 더 아파.”
엄마는 떠날 때면 “엄마 간다, 내일 또 올게”라는 남기고 돌아섰다. 그러고는 그 다음날 또 왔다.
문재인 변호사는 두 사람의 무죄를 확신했다. 사건 기록만 읽어봐도 두 사람이 허위자백한 정황이 쉽게 보였다. 문 변호사는 1심 선고를 뒤집을 수 있는 근거에 집중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장동익의 눈이었다. 장동익의 발목을 잡기만 했던 눈이 이제 그의 앞길을 터 줄 것으로 보였다.
경찰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사건이 발생한 1990년 1월 4일 새벽 여성 박수경(가명. 당시 30세)은 살해되기 전 직장 동료 정현덕(가명. 당시 35세)과 함께 승용차를 차고 낙동강변에 있었다. 남자 두 명이 차를 덮쳤고, 그 중 마른 남자가 정현덕을 낙동강으로 끌고 가 물속에서 격투를 벌였다. 여기서 마른 남자는 장동익이란 게 경찰-검찰의 주장이다.
문재인 변호사는 이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판단했다. 사건이 벌어진 시각엔 달이 없었다. 현장은 가로등도 없는 곳이었다. 문 변호사는 장동익의 눈을 전문의에게 감정 받게 해달라고 재판부를 설득했다. 인제대학교 부속 부산 백병원 안과 전문의 신성균이 감정을 맡았다. 결과는 이렇다.
“시신경위축으로 우안 0.04, 좌안 0.02. 검사 자체가 불가능, 교정 불능으로 렌즈도 도움 안 됨. 밝은 곳에서도 극히 가까운 물체만 구별. 3~4m만 떨어져도 물체를 구분하지 못함.”
문 변호사는 이를 근거로 “장동익의 시력으로는 달빛과 불빛이 없는 어두운 밤에 거친 강변 돌밭 길에서 이런 범행을 한다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장동익은 무죄 선고를 기대했다. 2심 법원마저 1993년 1월 7일 장동익, 최인철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장동익은 고개를 방청석 쪽으로 돌렸다. 혹시라도 엄마가 쓰러지는 건 아닌가 걱정했다. 대법원마저 그해 4월 27일 무기징역을 확정했다.
장동익은 크게 낙심했다. 진주교도소 감방에 웅크려 누운 채 초등학교를 그만 뒀을 때와 같은 생각을 했다.
‘내가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하나..’
장동익은 약 9개월간 출역도 거부하고 타인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를 일으켜 세운 건 동료 재소자였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밖으로 나가 진실을 밝힐 수 있지 않겠냐고, 장동익을 설득했다. 장동익도 조금씩 마음을 바꿨다.
‘그래.. 내가 여기서 죽으면 물고문으로 날 살인범 만든 놈들만 좋겠지. 내가 살아 나가야 진실을 밝히겠지.’
엄마는 아들 만나기 위해 거의 매주 진주교도소를 찾았다. 아들 관련 모든 수사, 재판기록도 모았다. 문재인 변호사는 갖고 있던 모든 기록을 장동익의 가족이 복사하게 했다. 문 변호사 본인도 사건 기록을 27년이 지난 지금까지 보존하였다.
이때부터 엄마는 이 기록을 분홍 보따리에 꽁꽁 묶어 들고는 경찰, 검찰, 법원, 언론사, 사건 피해자의 집 등을 찾아 다녔다. “이것만 봐도 내 아들이 살인범이 아닌 걸 알 수 있다”며 국가에 호소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을 설득하고 다녔다.
엄마는 교도소 교화활동을 하며 ‘사형수의 대부’로 불린 삼중스님이 있는 부산 자비사를 매주 찾기도 했다. 삼중스님이 “아들의 억울함을 풀 뚜렷한 방법이 내게 없다”고 말해도 엄마는 포기하지 않았다. 법회가 있을 때면 늘 보따리를 들고 절을 찾아 기도했다. 안타까웠지만 삼중스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루는 엄마가 애지중지 하는 그 보따리를 스님에게 집어 던졌다.
“스님, 사람 차별합니까!?”
삼중스님은 엄마의 답답한 마음을 이해했다. ‘죄 없는 무기수’ 장동익과 아들을 석방시키려 노력하는 엄마의 모습은 스님에게도 아픔이었다. 삼중스님은 책 <지상에서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장동익이 진짜 범인이라면 저는 어떤 처벌도 대신 받을 자신이 있습니다. (중략) 저는 최대한 힘 닿는 데까지 그의 누명이 벗겨지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중략) 왜냐하면 너무 억울하기 때문에, 그리고 매번 저를 찾아오는 그의 어머니를 위해….”
장동익의 엄마는 사형수의 대부만 감동시킨 게 아니다. 먼저 허위자백을 해 자기 아들마저 힘들게 한, 엄마로서는 미울 수도 있는 친구 최인철마저 울게 만들었다.
“동익이 어머님이 제 면회도 자주 오셨어요. 원망하고 욕할 법도 한데, 그런 말씀은 전혀 안 하시고 ‘너도 얼마나 많은 고문을 당했으면 그랬겠냐, 몸은 아픈 데 없느냐, 건강하게 꼭 살아 나와서 진실을 밝히자’고 오히려 저를 위로하고 격려 했습니다. 저는 어머니 앞에서 울기만 했습니다.”
장동익이 누명을 쓴 이후, 이렇게 엄마의 일상은 거의 ‘면회-구명활동’으로만 채워졌다. 집에서는 식구들에게 “야, 일 꼬인다. 다리 풀어!”라며 다리도 꼬지 못하게 했다. 엄마의 꿈은 아들 석방뿐이었다.
부산 영도에서 아들이 있는 진주교도소까지 아무리 빨리 가도 3시간. 면회 시간은 길어봐야 10여분. 그래도 엄마는 거의 매주 이 길을 포기 하지 않았다. 한 번은 엄마가 아들 면회하러 오면서 신분증을 챙기지 않았다.
신분증이 없으면 재소자를 만날 수 없다. 엄마는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교도소 앞에 앉아 담배만 피우며 타는 속을 달랬다. 그렇게 몇 시간을 보냈을까. 보다 못한 교도소 직원이 밖으로 나와 엄마에게 물었다.
“누구 만나러 오셨습니까?”
엄마의 사정을 들은 직원은 면회를 허락했다. 엄마는 교도소 앞에서 얼마나 많은 담배를 피운 걸까. 목소리만 오가는 교도소 면회실 투명 플라스틱에 난 작은 구멍으로 엄마의 냄새가 장동익에게 전해졌다.
“그 작은 구멍으로 솔솔 담배 냄새가 들어오는데요. 아이고.. 미치겠더라고요. 그게 담배 냄새가 아니라 엄마 속 타들어가는 냄새였어요.”
장동익은 교도소 생활을 성실히 해 모범수가 됐다. 그는 2003년 8.15 특사 때 징역 20년으로 감형됐다. 앞으로 10년을 더 교도소에서 살아야 했지만, 날아갈 듯이 기뻤다. 엄마와 가족들 놀래키려 이 사실을 한동안 숨겼다. 엄마가 면회 오면 말하려 했다.
어찌된 일인지, 어느 순간부터 엄마의 면회가 뜸해졌다. 합동접견으로 엄마를 초정했지만 교도소 측은 “어머니가 다리에 깁스를 해 올 수 없다”고 말했다. 장동익은 그 말을 믿었다.
사실이 아니었다. 장동익의 엄마는 위암 투병중이었다. 엄마는 2003년 11월 2일 동아대학교에서 사망했다. 아들이 10년 뒤면 세상에 나온다는 소식도 듣지 못했다. 아들에게 자기 눈을 주지 못한 게 서러워서였을까, 풀려난 아들을 끝내 못 본 게 한이 됐을까.
엄마는 두 눈을 뜨고 허공을 응시한 채 사망했다.
엄마는 유산으로 분홍 보따리 하나를 남겼다. 이로써 자기 눈을 주지 못한 엄마는 기어코 아들의 앞길을 열어줬다. 보따리에 담긴 기록은 고스란히 재심 전문변호사 박준영에게 전해졌다. 문재인 변호사가 보관하던 기록도 보태졌다. 엄마의 유산 덕에 장동익은 지난 5월 8일 부산지방법원에 재심을 신청했다.
지난 2017년 9월 2일 장동익은 엄마에게 가면서 흰 국화 한 다발을 샀다. 납골당에 도착해서는 자신의 눈을 납골함에 바짝 붙였다. 그래야만 엄마 얼굴이 보인다. 장동익은 “엄마.. 엄마..” 소리만 반복했다. 떠날 때는 오래전 엄마가 자신에게 한 말을 똑같이 했다.
“엄마 나 갈게. 나중에 또 올게.”
영천호국원을 떠나기 전, 속에서 뭔가 올라 오는지 장동익은 담배 한 대만 피우고 가자고 했다. 그는 한숨을 쉬듯이 연기를 길게 뱉었다. 오래전 그의 엄마처럼 말이다.
그의 담배 연기에서는 사람 속 타는 냄새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