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비게이션에 물고문 기술자가 일하는 곳을 찍으니 바로 결과가 나왔다.
‘거리 4km, 걸리는 시간 10분.’
고문으로 살인범을 조작한 경찰과 살인 누명을 쓴 사람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다니. 자신이 만들어낸 살인범이 수십 년 뒤 세상 밖으로 나와 지척에 있다는 걸, 그 경찰은 알까?
“당연히 알겠죠. 모르긴 해도, 서로 몇 번 마주쳤을 겁니다. 나는 눈이 안 보여 어쩔 수 없지만, 그 양반은 저를 알아보고 놀라지 않았을까요? 지들이 고문으로 나를 살인범으로 만들어 놓고, 이제와서 모른다고 하면 사람도 아니죠.”
가짜 살인범 장동익이 차 뒷좌석에서 말했다. 시각장애인 장동익은 지난 1991년 11월, 부산 사하경찰서에서 나흘 동안 물고문을 당했다. 몇 번 정신을 잃은 뒤 죽음의 문턱에서 “낙동강에서 여자 한 명을 죽였다”고 허위자백했다.
경찰이 ‘주먹’으로 창조한 가짜 살인범에게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다. 법원은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내가 살아 나온 걸 알고 깜짝 놀랐을 겁니다. 경찰 허OO, 홍OO, 박OO. 날 고문한 세 사람은 경찰이 아니라 가정파괴범입니다!“
장동익이 지칭한 셋 중 누군가는 살인범을 조작하고 특진을 했다. 이 중 둘은 은퇴했고, 한 명은 아직 경찰로 일한다. 그 경찰이 바로 장동익과 같은 섬에서 생활한다. 부산 영도, 장동익의 집에서 차로 10분 달리면 닿는 곳에서 말이다.
누명을 쓰고 무기수가 된 사람의 심정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죄 없이 감옥에 가 21년 5개월 20일 만에 세상에 나온 사람의 삶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시각장애인 장동익이 사하경찰서로 끌려간 날은 1991년 11월 8일 저녁. 그의 아내 송선주(가명. 당시 26세)는 부엌에서 저녁을 차리는 중이었다. 장동익은 18개월 된 딸 장경현(가명)을 무릎에 앉히고 방안에 있었다. 밖에서 어떤 남자가 장동익을 불렀다.
“여보,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아내 송선주는 남편 말을 믿고 계속 저녁상을 차렸다. 남편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저녁상에 올려진 밥과 찌개가 천천히 식어갔다. 아내는 남편의 밥을 따뜻한 아랫목에 묻었다. 아기를 엎고 밤새 남편을 기다렸다. 남편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다음 날, 그 다음 날, 또 그 다음날에도 남편은 오지 않았다.
남편 장동익은 귀가할 수 없었다. 그는 사하경찰서 사무실에서 통닭처럼 거꾸로 매달린 채 물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나흘에 걸친 고문 끝에 그는 ‘낙동강 2인조 살인범’ 중 한 명으로 다시 태어났다.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어 맛있는 음식을 해줘도 바로 앞에 있는 반찬만 먹는 남편이 여자를 때려 죽였다니. 대낮에도 길을 걷다가 전봇대와 부딪히는 남편이 캄캄한 새벽에 낙동강에서 여자를 죽이고 갈대밭에 시신을 유기했다니.
아내는 남편이 범인이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아내 송선주는 사하경찰서로 찾아갔지만, 경찰은 딱 한 번만 면회를 허용했다. 경찰은 자기들 마음대로 남편을 거꾸로 매달아 얼굴에 물을 부으며 살인범을 창조했다.
장동익이 검찰에 송치된 11월 18일 이후에는 면회라도 편히 할 수 있을까. 아내는 부산구치소로 찾아갔다. 남편은 그곳에 없었다. 장동익은 날마다 이른 아침 검찰에 불려가 저녁에 돌아왔다. 검찰청으로 가면 남편을 만날 거라 기대하며 가난하고 힘 없는 아내는 나름대로 작전을 짰다.
“검찰청으로 찾아가도 남편을 안 보여주더라고요. 두 살 된 딸을 업고 가서 불쌍하게 보이면, 통할 줄 알고 애를 데려 가기 시작했어요. 검찰 앞에서 애도 울고, 나도 울면서 남편 좀 만나게 해달라고 애원을 했거든요. 등에 업힌 아이 얼굴도 보여주면서 부탁을 해도.. 그 양반들 참 독하대요.”
작전은 통하지 않았다. 남편이 딸 얼굴을 보면 힘을 낼 거라 기대했지만, 그 마저도 빗나갔다. 검찰 조사를 마치고 호송차에 오르는 짧은 순간에 남편을 향해 “경현 아빠!”를 외쳤지만, 정작 장동익은 딸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시각장애인 장동익은 자기 코앞으로 딸을 데려 가야만 얼굴을 볼 수 있다.
아내는 남편의 무사귀가를 의심하지 않았다. ‘죄 없는 사람은 감옥에 가지 않는다’는 건 초등학교만 다닌 송선주도 아는 상식이었다. 약자 중에 약자인 남편을 법이 지켜줄 거라 믿었다. 상식도, 믿음도 깨졌다.
“남편과 제가 많이 못 배우고, 가난해서 그랬을까요? 우리 말은 하나도 안 믿어주고 판사님이 남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는데, 기절할 뻔했어요. 많이 배운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수가 있습니까?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린 딸을 혼자 어떻게 키우나.. 미치는 줄 알았어요.“
법은 남편과 자신, 아이를 버렸지만 아내는 계속 밥을 해야만 했다. 살아야 하니까, 살아서 남편을 다시 만나야 하니까. 밥상을 차리면, 남편 몫의 밥 한 공기를 늘 아랫목에 묻었다. 아이는 밥심으로 꾸준히 자랐다.
아내는 어린 딸을 품에 안고 진주교도소로 남편 면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면회실로 들어가면 투명플라스틱 건너편에 남편이 있었다. 앞을 잘 볼 수 없는 남편이 아이 윤곽이라도 볼 수 있게 딸 얼굴을 투명 플라스틱에 바짝 갖다 댔다. 아내는 플라스틱을 똑똑 두드리면서 말했다.
“경현아, 아빠 여기 있네. 아빠 보이지? ‘아빠’라고 불러봐.”
그러길 몇 번째, 딸이 말을 하기 시작할 무렵 투명 플라스틱 건너편의 남편을 보고 딸이 말하기 시작했다.
“아빠.. 아빠..”
장동익은 그날의 그 목소리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딸이 플라스틱 건너편에서 ‘아빠, 아빠..’ 하는데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보이지 않는 눈으로 어떻게든 딸 얼굴을 보려고 플라스틱에 눈을 바짝 갖다 댔죠. 아.. 정말 주먹으로 투명 플라스틱을깨 부수고 싶었습니다.”
그날 장동익은 밤새 뒤척였다. 감옥 밖의 아내도 잠들지 못했다. 불면의 밤이 1년, 2년 이어졌다. 아내 품에 안겨 오던 딸이 자라서 이젠 엄마 등에 업혀 왔다. 아버지는 딸을 만져보고 싶었지만 투명 플라스틱이 손을 막았다.
다시 1년, 2년이 지났다. 등에 업혀 오던 딸이 이젠 엄마 손을 잡고 걸어서 면회실로 들어섰다. 아버지 장동익은 “경현아.. 경현아..” 몇 번 불렀다. 앞을 볼 수 없어 감옥에 오기 전에도 제대로 안아주지 못한 딸이 이젠 자기 발로 걸어서 오다니.
“정말 기가 막히는 거죠. 내가 빨리 나가야 할 텐데, 저 어린 걸 ‘살인자의 딸’로 살게 하면 안 되는데.. 그런 생각밖에 안 들었죠. 딸이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할지도 걱정이었고..”
어느 날, 아내는 아이 없이 혼자 면회를 왔다. 장동익이 물었다.
“경현이 보고 싶은데, 왜 혼자 왔어?”
“뭐 좋은 곳이라고 자꾸 데리고 와요..”
아내는 말끝을 흐렸다. 눈이 안 좋은 장동익은 귀가 밝다. 목소리로 사람 마음을 어느 정도 파악할 줄 안다. 그날 따라 아내 목소리가 슬펐다. 장동익은 두 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작업을 하다 오른손 검지를 다쳐 밴드가 붙어 있었다.
“손 다쳤어요? 조심하시지.. 많이 아팠겠네요.”
장동익은 손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그날 밤 장동익은 고민 끝에 결심을 했다. 아내는 자신보다 6살이나 어렸다. 결혼 2년 만에 남편은 무기수가 됐고, 그 후 벌써 5년이 지났다. 아내는 이제 겨우 30대 초반, 장동익은 언제 세상 밖으로 나갈 지 기약할 수 없는 상황. 장동익은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여보,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당신이 더 잘 알 거야. 난 죄가 없으니까, 꼭 살아서 다시 밖으로 나갈 거야. 당신에겐 미안해서 그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을 못하겠어. 여보, 지금이라도 새출발을 해. 좋은 남자 만나서 꼭 행복하게 살길 기도할게.“
장동익은 편지 말미에 “이혼 서류 준비해 교도소로 보내라”고 적었다. 그 편지를 받고 아내는 밤새 엉엉 울었다. 7살이 된 어린 딸은 엄마가 왜 우는지 알지 못했다.
아내 송선주는 이혼 서류를 준비해 답장으로 보냈다. 교도소에서 장동익은 그 서류에 도장을 찍어 다시 아내에게 보냈다. 장동익은 아내에게 딱 하나를 부탁했다.
“여보, 경현이는 할머니가 키울 수 있게 해주면 안 될까?”
이로써 살인 누명을 써 청춘을 잃은 장동익은 아내마저 잃었다. 아내 송선주는 남편과 아이를 잃었다.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지, 왜 자신들이 이 고통을 짊어져야 하는지, 둘은 오랜 세월 묻고 또 물었다.
아버지에 이어 엄마를 잃은 딸 장경현은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들과 함께 살았다. 부모 없이 입학하고, 졸업을 했다. 오래된 앨범 속, 장경현 곁에는 부모가 없다. 혹시라도 딸이 아버지를 진짜 살인범으로 알까, 떠난 엄마를 원망할까, 할머니는 늘 손녀에게 말했다.
“네 아버지는 죄 없이 누명 쓰고 잡혀 간 거야. 떠난 엄마도 원망하지 마. 좋은 날 오면 만날 테니까, 부모님 미워하지 마.”
이제 딸은 할머니와 함께 면회를 오기 시작했다. 딸 처지에서 아버지는 언제나 투명 플라스틱 건너편의 존재였다. 아버지가 손을 잡아준 적도, 자신을 안아준 기억도 없다. 면회를 해도 딸과 아버지 사이에 대화는 점점 줄어들었다. 아버지는 하나를 묻고 또 물었다.
“경현아, 너 눈 괜찮아? 앞 제대로 보는 거 맞지?”
장동익은 자신의 시각장애가 딸에게 유전되는 건 아닌지, 많이 걱정했다. 다행히 딸 눈에는 문제가 없었다. 아버지는 당시에 그 누구도 믿지 않을 말을 딸에게 했다.
“경현아, 아버지 곧 나가니까 건강하게 잘 지내야 한다. 알았지?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아버지는 나오지 못했다. 딸과 할머니의 면회도 뜸해졌다. 2003년 어느 날, 중학생 딸이 교도소로 편지를 보냈다.
“아버지, 할머니 위암으로 병원 치료 받고 있어요. 얼마 사시지 못 한대요.”
할머니는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이듬해 눈을 감으셨다. 이로써 장동익은 자기 청춘, 아내에 이어 부모님을 잃었다. 이제 그에겐 딸 하나가 남았다.
장동익은 감형을 받아 2013년 4월 26일 0시께 출소했다. 기대와 달리 딸은 마중을 나오지 않았다. 친구와 막내 동생이 진주교도소 앞에서 장동익을 맞이했다. 오랜만에 나온 세상은 신세계였다. 먼저 라면 한 그릇이 그를 충격에 빠트렸다.
“집으로 오면서 장유휴게소에서 라면 한 그릇을 먹었거든요. 근데 무슨 라면이 3000원씩이나 하는 겁니다. 처음엔 라면 파는 분이 강도인 줄 알았어요.”
할머니, 할아버지 사망 이후 딸은 셋째 삼촌과 함께 살았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장동익의 입이 자꾸 탔다. 딸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라면 하나에 놀란 자신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새벽 3시, 드디어 집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 20대 중반이 된 딸이 서 있을 줄 알았는데, 놀란 강아지 세 마리가 나와서 크게 짖어댔다. 딸은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영화 같은 상봉은 정말 영화에나 있는 거였다. 현실의 장동익은 그래서 더 슬펐다.
한동안 딸은 이른 아침이면 “갈게”라며 출근을 하고, 늦은 저녁에 퇴근하면 “왔어”라는 말만 남기고 자기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와 딸 사이엔 보이지 않지만 넘을 수도 없는 큰 장벽이 있는 듯했다.
“두 살 때 떠난 아버지가 수십 년 만에 돌아왔으니, 당연히 어색했겠죠. 함께 경험한 추억도 없고.. 아쉽고 슬펐지만, 달리 방법이 없더라고요.”
그러던 딸이 드디어 “시장에 같이 가자”고 먼저 말을 걸었다. 장동익은 기분 좋게 따라 나섰다. 장을 보고 딸이 말했다.
“아버지, 나 결혼해도 돼?”
다른 사람이었으면 기뻐했을 이 말이 장동익에겐 더없이 서러웠다.
“갓난아기 때 헤어진 딸을 가까스로 만났는데, 결혼을 한다니까.. 슬프고 서러웠죠. 같이 살아보지도 않았는데, 또 떠난다고 하니까 아버지로서 섭섭하더라고요.”
라면 값에 놀랐는데, 결혼 같은 큰 행사를 치러야 한다니. 장동익은 “네 엄마가 없으니, 사촌 누나와 함께 상견례에 나가겠다”고 말했다. 딸 장경현은 “결혼식 때 엄마 부르면 안 되느냐”고 말했다. 장동익은 버럭했다.
“경현아, 네 엄마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결혼식에 부르냐!”
그날 딸은 엄마와 연락하고 지낸다고 아버지에게 고백했다. 장동익의 가슴이 철렁했다. 딸은 엄마 전화번호를 아버지에게 건넸다. 장동익의 손은 가슴처럼 덜덜 떨렸다. 얼마 뒤, 장동익은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주야..”
“누구세요?”
“나야, 경현이 아빠.”
“……“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한참 뒤에 아내가 울먹이며 말했다.
“나왔습니까?”
“그래.. 나왔다.”
“.. 이렇게 나올 줄 알았으면, 내가 안 떠났을 텐데요.. 내가 떠나지 않게, 좀 일찍 나오지 그랬어요.”
“……”
아내는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그 남편 사이에서 딸도 하나 낳았다. 도대체 어디서 누가 자기 운명을 조정하는지, 아내는 큰 소리로 따지고 싶었다.
“운명의 장난도 아니고, 내가 무슨 큰 죄를 진 것도 아닌데.. 사람 인생 참 기구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내가 나쁜 X이 된 기분이 들더라고요.”
장동익은 아내, 아니 이젠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송선주를 집으로 불렀다. 아내는 점심께 집에 도착했다. 어색했다.
“밥 안 먹었지? 내가 밥 차려줄게. 앉아 있어.“
송선주는 거실 소파에 앉았다. 어색한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방에 있던 딸이 거실로 나왔다. 송선주는 앞을 잘 볼 수 없는 장동익을 도와 함께 점심상을 차렸다. 잠시 뒤, 밥상을 가운데 두고 장동익, 송선주, 딸 장경현이 앉았다.
“잠깐 나갔다 올게”라던 남편이 21년여 만에 돌아와 드디어 세 식구가 밥상 앞에 앉은 거다. 송선주는 밥을 천천히 꼭꼭 씹었다. 아무리 잘게 씹어도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자꾸 목이 멨다.
“서러워서 밥이 안 넘어 가더라고요. 도대체 누가 우리 가족을 망쳐놨는지 따지고 싶었어요.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느냐고, 우리가 언제 남들 가슴 아프게 한 적 있느냐고, 왜 우리에게 이런 벌을 주느냐고, 막 소리치고 싶었어요.”
밥을 먹으며 세 식구는 서로에게 “그동안 고생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만나서 다행이다”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고통을 씹어 삼키듯 세 식구는 말없이 밥을 떠 넘겼다. 21년여 만에 찾아온 식사 자리는 어색하고도 서럽게 끝났다.
2013년 9월에 열린 딸의 결혼식. 장동익의 몸은 뻣뻣하게 굳었다. 딸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입장하는 순간,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안 그래도 안 보이는 눈이 더 흐릿해졌다. 딸이 작게 말했다.
“아버지, 떨려? 너무 빨리 걷지 말고 천천히 걸으면 돼.”
장동익은 딸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자신이 딸을 데리고 입장한 게 아니었다. 앞을 잘 볼 수 없는 아버지를 딸이 이끌고 들어갔다.
“결혼식 끝나니까, 뭐랄까요. 이젠 모든 걸 잃었구나 싶더라고요. 사위를 새 식구로 맞은 거지만, 그래도 아버지 입장에서는 왠지 딸이 떠났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의 말대로, 장동익은 모든 걸 잃었다. 부모, 아내, 딸, 자신의 청춘, 꿈, 희망.. 사하경찰서 경찰들이 저지른 나흘 동안의 물고문이 모든 걸 빼앗아 갔다.
장동익은 2017년 현재, 부산 영도에 있는 10평도 안 되는 임대아파트에 산다. 1층이어서 한낮에도 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 작은 집에서 장동익은 혼자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며 산다. 앞을 잘 볼 수 없는 그는 외출도 잘 하지 않는다. 종일 TV를 틀어놓고 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보낸다.
그의 집에는 외로움, 쓸쓸함, 고요함, 지루함만 출렁인다. 많은 게 하나 더 있다. 그의 집에는 바퀴벌레가 많다.
“이 놈의 바퀴벌레 때문에 이사를 가고 싶은데.. 그것도 뭐 제 맘대로 할 수 없네요.”
시각장애인 장동익은 바퀴벌레도 잡을 수 없다. 그의 흐린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그놈들은, 장동익보다 빠르기도 하다. 경찰의 조작으로 만들어진 무기수 장동익, 그는 여전히 감옥 아닌 감옥에서 살고 있다. 그에게 “이번 추석 때는 뭘 할 계획이냐”고 물었다.
“제가 갈 데가 어딨습니까? 그냥 집에 있어야죠.”
국가가 만든 살인범 장동익. 그는 이번 추석을 바퀴벌레와 함께 보낼 듯하다. 어제처럼, 그제처럼 말이다.
그의 집에서 4km 떨어진 OO지구대에는 물고문으로 장동익을 망친 사람이 경찰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