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자는 검은색 구형 SM5 승용차를 타고 부산 초량시장 입구에 나타났다. 주차장이 좁아 차 대기가 쉽지 않았다. 승용차 뒤에서 “오라이!”를 외치며 주차를 도왔다. 운전석 창문이 내려가고 둥그런 얼굴이 밖으로 나왔다.
“괜찮습니다. 저 운전 잘합니다.”
얼굴이 둥글고 덩치 좋은 남자, 최인철이다. 그에 반해 마른 체형의 남자가 조수석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시각장애인 장동익이다. 두 남자와 함께 초량시장 안쪽에 있는 허름한 횟집에 들어갔다.
최인철은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듯이, 생선회를 입으로 가져갔다. 젓가락질 한 번으로 많은 회를 집는 기술도 탁월했다. 최인철은 스스로 “회 귀신”이라고 했다. 그에게 간장과 와사비(고추냉이)를 건넸다.
“됐습니다. 와사비 못 먹습니다. 예전엔 좋아했는지만, 이젠 냄새도 맡기 싫습니다.”
장동익은 말없이 소주를 들이켰다. 눈앞의 회도 제대로 집을 수 없는 장동익. 그의 앞접시에 최인철이 회를 올려줬다.
“저는 어묵이랑, 김을 안 먹습니다.”
김공장에서 일한 장동익은 어묵과 김을 안 먹고, 바닷일을 했다는 회 귀신 최인철은 고추냉이를 못 먹는다니. 게다가 둘은 부산 사람 아닌가. 가짜 살인범 ‘낙동강 2인조’와의 2년 전 첫 만남은 이상한(?) 식성 파악으로 시작됐다.
두 남자가 거부하는 음식, 부산 낙동강변에서 발견된 한 여인의 시신과 관련 있다.
여인의 두개골은 함몰된 상태였다. 시신에서 약 50미터 떨어진 곳엔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있었다. 차 안팎에서 많은 핏자국이 발견됐다.
두 친구 장동익-최인철의 인연과 삶은 승용차, 낙동강, 두개골이 함몰된 여인, 김, 어묵, 와사비를 빼고 설명할 수 없다.
최인철(1962년생)은 부산에서 나고 자랐다. 오형제 중 첫째다. 엄마는 초등학교 시절 사망했다. 그 후 두 엄마가 새로 생겼으나, 모두 떠났다. 아버지 역시 최인철 10대 때 사망했다. 가난한 최인철은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했다.
장동익(1959년생)은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참전용사였으나 글을 쓸 줄 몰랐다. 그 탓인지 아버지는 소심했고, 대신 엄마의 생활력이 강했다. 시각장애로 앞을 잘 볼 수 없는 장동익은 초등학교를 5학년까지만 다녔다.
1970년대 후반, 장동익의 가족은 부산으로 이사했다. 그의 삶이 낙동강, 최인철과 많이 가까워졌다.
장동익과 최인철은 1986년 무렵에 처음 만났다. 장동익의 먼 친척이 최인철과 잘 알았는데, 그게 인연의 시작이다. 누구나 그렇듯, 처음엔 서로 존대를 하며 데면데면했다. 만날수록 서로 말은 짧아졌고, 관계도 가까워졌다.
장동익은 1987년 4월 18일부터 부산에 있는 한 신발공장에 다녔다. 발 모양의 틀에 신발외피를 씌우는 일로, 익숙해지면 시각장애인 장동익도 기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장동익은 이 공장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최인철도 1987년 6월, 같은 신발공장에 입사했다. 그는 금방 일을 그만뒀다. 친척이 운영하는 김 양식장에서 일을 했다.
시간은 낙동강처럼 꾸준히 흘렀다. 장동익, 최인철에겐 삶의 변곡점이자 운명의 물길이 급격히 방향을 트는 1990년이 밝아왔다. 우연처럼 아무 상관이 없지만, 훗날 쓰나미처럼 두 사람을 집어 삼키는 여러 일이 모두 이 해에 벌어졌다.
1990년 1월 4일, 달도 없는 검은 새벽에 부산 엄궁동 낙동강변에서 한 여인이 살해됐다. 같은 해 4월 4일, 장동익의 딸이 태어났다. 역시 같은 해 6월, 최인철은 중고 흰색 스텔라를 구입했다.
그해 8월, 장동익의 어머니는 환갑을 맞았다. 약 두 달 뒤인 10월 13일, 노태우 대통령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1990년에 장동익과 최인철은 한층 더 가까워졌다. 둘은 부산 해운대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최인철은 정면을 보면서 웃고 있고, 장동익은 무표정의 얼굴을 왼편으로 돌렸다. 그해에 둘은 ‘친구’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은 관계가 됐다.
최인철의 승용차가 큰 역할(?)을 한다. 장동익은 이렇게 회상했다.
“1990년 그땐, 승용차 가진 사람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습니다. 제 친구 중에선 인철이가 제일 처음 차를 산 겁니다. 정말 대단해 보였죠. 게다가 저는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으니까, 운전을 못 하잖아요. 차를 소유하고 운전을 한다는 건, 저에겐 정말 꿈같은 미지의 일이었죠.”
최인철이 부러워서, 그가 가진 게 좋아서 친구가 된 게 아니다. 최인철이 시각장애인 장동익을 많이 배려했다. 최인철의 추억은 이렇다.
“동익이는 눈 때문에 외출을 잘 못 하니까, 제가 중고차를 산 이후에 여기저기 같이 다녔죠. 동익이 어머니 환갑 생신 때도 제가 해운대 모시고 갔거든요. 서로 돕고, 바람도 쐬고 좋았죠.”
장동익 어머니가 환갑을 맞은 날은 1990년 8월 25일. 다음날, 장동익은 부모님과 친척 어르신들을 초대해 점심 식사를 대접했다.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자기 때문에 그동안 속을 많이 태운 어머니를 위해 자리였다. 장동익은 이날 돈을 많이 썼다. 친구 최인철도 나섰다.
“제 어머니 생신이라고, 인철이가 차를 끌고 왔더라고요. 바람 쐬러 가까운 곳이라도 같이 가자고요. 그렇게 함께 해운대를 가게 된 겁니다. 어른신들 자기 차로 모신다고 와줬으니, 저로서는 친구 인철이가 많이 고마웠죠.”
장동익, 최인철의 ‘해운대 스틸컷’은 이렇게 탄생했다. 친구의 우정이 빛을 발한 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두 친구를 고통의 수렁에 빠트린 것도 바로 승용차였다.
장동익은 이듬해인 1991년 10월 15일 신발공장을 그만뒀다. 공장 쪽이 그의 나쁜 눈을 좋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젖먹이 딸이 자라는 이때, 빨리 직장을 구해야 했다. 이때도 최인철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저희 친척이 운영하는 김공장에서 일해보지 않겠냐고, 제가 동익이한테 제안을 했죠. 저는 김양식장이 있는 바다에서 일하고, 눈이 안 좋은 동익이는 김 포장 등을 하는 공장에서 일하고. 서로 같은 회사에서 일을 하는 겁니다.”
장동익은 취업까지 돕는 친구가 고마웠다. 그해 11월 6일, 장동익은 부산 감전동에서 김공장이 있는 명지동으로 이사했다. 최인철은 명지동에서 살고 있었으니, 친구는 이제 이웃사촌이기도 했다.
친구의 호의와 우정은 여기까지. 이사한 지 고작 이틀 뒤인 11월 8일, 장동익은 부산 사하경찰서로 끌려간다. 최인철은 먼저 끌려와 있었다. 경찰이 장동익에게 물었다.
“을숙도에서 어떤 남자에게 돈 3만 원 받은 적 있지?”
장동익은 “그런 적 없다”고 사실 대로 말했다. 경찰은 손과 발로 툭툭 치면서 장동익에게 자백을 강요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백할 게 떠오르지 않았다. 문득, 며칠 전 최인철이 사준 어묵 한 그릇이 생각났다. 내용은 이렇다.
명지동으로 집을 옮긴 그 즈음, 최인철이 “바람 쐬러 가자”며 장동익을 찾아왔다. 장동익은 최인철의 새로운 승용차 조수석에 앉았다. 당시 최인철은 검은색 중고 소나타로 차를 바꿨다. 최인철은 낙동강 을숙도로 차를 몰았다.
“잠깐 기다리고 있어.”
을숙도에 도착하자 최인철은 차에서 내렸다. 앞을 잘 볼 수 없는 장동익은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최인철은 당시 마을 청년들과 을숙도 철새도래지 보호 활동을 했다. 최인철은 금방 차로 돌아왔다.
둘은 을숙도 매점으로 가 어묵 한 그릇을 먹었다. 이게 장동익이 기억하는 ‘을숙도 어묵의 추억’ 시작과 끝이다. 최인철이 한 시민에게 3만 원을 받았는지 여부는 알지 못했다.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상황. 1년 10개월 전 벌어진 낙동강 부녀자 살인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부산 경찰은 압박을 느낀 걸까? 사하경찰서 쪽은 ‘3만 원 수수 의혹’으로 체포한 두 사람에게 엉뚱한 걸 추궁하기 시작했다.
“작년에 낙동강에서 죽은 여자, 너희 둘이 때려 죽였지?”
경찰은 최인철을 거꾸로 매달아 11월 11일부터 물고문을 하기 시작했다. 최인철은 한동안 물고문을 견뎠다. 하지만 끝까지 버틸 수는 없었다. 그는 “친구 장동익과 함께 여자를 죽이고 유기했다”고 허위로 자백했다.
이게 끝이 아니다. 최대한 사건 당시 정황에 맞게 자백을 조작해야 했다. 경찰은 11일부터 15일까지 최인철 얼굴에 수건을 씌우고 물을 부었다. 최인철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 고문의 강도를 높였다.
어느날부터 물에 고추냉이를 푼 듯했다.
“얼굴에 물을 부으면 숨을 쉴 수 없거든요. 코로 물이 들어가고, 입에도 들어 갑니다. 어느날에는, 입과 코로 들어온 물이 엄청 맵더라고요. 눈도 따갑고, 피부도 후끈 거리고. 얼핏 느껴지는 맛과 향이 와사비(고추냉이)더라고요. 제가 바닷일 하면서 회를 엄청 먹었거든요. 만날 와사비 찍어 먹었으니 그걸 단박에 알죠.”
고추냉이 푼 물은 강력했다. 최인철은 항복하고 또 항복했다. 범행을 부인하는 장동익에게 경찰은 이런 질문을 하면서 물고문을 시작했다.
“야, 최인철이 너랑 여자 죽였다고 다 자백했는데, 넌 왜 자꾸 부인하는 거야!”
도대체 무슨 말인지 답답했다. 경찰은 장동익도 거꾸로 매달아 물고문을 시작했다. 조금씩 친구 최인철이 미워졌다. 물고문은 두 친구를 갈라놨다. 경찰은 당연히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친구도 원망스러웠다.
장동익도 끝내 친구 최인철처럼 물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거짓 자백을 했다. 둘은 물고문이 만든 허위자백을 검찰, 법원에서도 뒤집지 못했다. 사람을 죽인 적 없는 장동익, 최인철은 무기수가 됐다. 장동익은 친구에게 이를 갈았다.
‘내가 왜 그 놈의 차를 타고 을숙도에 갔을까, 내가 왜 그 놈이 소개한 김공장에서 일을 했을까.’
최인철의 차는 지옥으로 가는 급행열차처럼 느껴졌고, 김공장은 불지옥의 한복판으로 생각됐다. 장동익은 친구를 원망하고, 스스로를 자책하고, 자기 인생이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때 정말 인철이가 너무 미웠어요. 친구 하나 잘못 만나서 인생 망쳤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음식 하나가 생각났다. 을숙도에서 먹은 그 어묵!
“내 잘못이 있다면, 그 어묵 한 그릇 먹은 게 전부입니다. 친구에게 어묵 하나 얻어 먹은 대가로 무기징역을 살게 되다니.. 정말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어묵 때문에 인생이 꼬였다고 생각해 보세요. 사람 팔자 참 초라하게 느껴지고 비참합니다.”
장동익은 친구 최인철만큼, 어묵과 김을 증오했다. 절대로 입에 대지 않았고 냄새도 맡기 싫어했다. 세월이 흘러도 그 원망과 증오는 무뎌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장동익이 복역하는 진주교도소에서 일이 벌어졌다. 광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친구 최인철이 결핵 치료를 위해 진주교도소로 왔다는 소식이 장동익에게 전해졌다. 1996년 가을께 일이다. 진주교도소에는 몸 아픈 수감자를 치료하는 병동이 있었다.
장동익은 병동에서 일하는 수감자에게 부탁했다. 그 수감자가 병상에 누워 있는 최인철에게 말했다.
“장동익이라는 분 아십니까? 그 분이 좀 보자고 하네요.”
장동익은 병동의 한 공간에서 최인철을 기다렸다. 드디어 이를 갈며 원망하고 기다린 최인철이 들어왔다.
“너.. 나한테 할 말 없냐? 왜 나를 물고 늘어진 거야! 내 인생 어떻게 책임질 거야?”
장동익은 주먹질을 퍼부었다. 장동익보다 키 크고 덩치 좋은 최인철은 맞기만 했다. 저항하지 않고 피하지도 않았다. 친구의 원망과 미움이 조금이라도 풀릴 수 있도록, 최인철은 가만히 맞기만 했다. 장동익은 마음 놓고 최인철을 때렸다.
얼마나 때렸을까. 때리는 장동익이 먼저 울어 버렸다. 최인철의 멱살을 잡고 엉엉 울었다. 최인철도 서럽게 울었다.
“인철아.. 너도 어쩔 수 없었겠지. 너도 고문당하고 많이 힘들어서 그랬겠지. 때려서 미안하다.”
“아니다.. 내가 너한테 많이 미안하다. 더 때리고 싶으면 때려라.”
장동익과 최인철은 한동안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만 훔쳤다. 교도소 직원이 와서 둘을 끌고 갔다. 며칠 뒤 장동익은 병동에 누워 있는 최인철에게 선물 하나를 보냈다.
최인철의 수인번호 ‘2267’이 적힌 흰색 천이었다.
“그때 동익이는 출역으로 인쇄 일을 했거든요. 흰색천에 검은색으로 깨끗하게 제 수번 2267을 새겨 보냈더라고요. 밖에 있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교도소에서는 수번이 깨끗하게 박혀 있으면, 그게 참 좋고 폼나는 일입니다. 동익이가 보낸 선물을 받고 고맙고 미안해서 옷에 달지도 못하고 한동안 책 사이에 끼워놨습니다.”
그렇다고 둘이 완전히 화해를 한 건 아니다. 장동익, 최인철은 2003년 8.15 특사로 감형이 됐다. 둘 다 21년여를 교도소에서 보내고 2013년 세상에 나왔다. 장동익이 먼저 나왔다. 몇 개월 뒤, 친구 최인철의 근황이 궁금했다.
오래전, 그와 최인철이 살던 명지동으로 무작정 찾아갔다. 자신과 부인, 돌 지난 딸이 함께 살던 집은 사라졌다. 친구 최인철 집은 물론이고 동네 자체가 없어졌다. 여기저기서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었다. 대파밭 투성이던 명지동은 ‘명지국제신도시’로 바뀌고 있었다.
21년, 강산이 두 번 변할 시간 아닌가. 서른 초반에 누명을 쓰고 교도소로 끌려가 50대가 되어 세상에 나온자신처럼, 모든 게 달라졌다.
‘어디서 최인철을 찾을 수 있을까..‘
장동익은 명지국제신도시 한복판에서 길을 잃었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오래된 식당에 들어가 “이 동네 출신 최인철이라는 사람 아느냐”고 물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아니면 운명인지 그 식당 주인은 최인철의 먼 친척이었다.
그렇게 둘은 세상 밖에서 21년여 만에 다시 만났다. 화해가 없었으니 반가운 악수도 없었다. 장동익은 친구를 보자마자 다시 주먹부터 날렸다. 그래야 화가 풀릴 듯했다. 최인철이 다시 말했다.
“동익아, 내가 또 사과할게. 미안하다. 내가 많이 밉겠지만, 이젠 같이 힘을 합쳐서 진실을 밝혀야하지 않겠냐?”
둘은 조금씩 예전의 관계를 회복했다. 다행히 장동익 어머니가 보관하던 사건기록이 분홍 보따리에 담겨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최인철은 아들에게 인터넷을 배워 자신들의 사연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교도소에서 나오고 얼마 뒤, 최인철은 친구를 만나러 거제도로 갔다. 친구는 그동안 고생 많았다며 돌아온 회 귀신 최인철에게 회를 샀다. 최인철은 회를 듬뿍 집어 고추냉이 간장에 푹 담근 뒤에 입에 넣었다. 천천히 회를 씹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씹으면 씹을수록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와사비(고추냉이) 맛이 느껴지니까, 갑자기 예전에 당한 물고문이 떠오르는 거예요. 저도 그럴 줄 몰랐거든요. 과거 아픔이 떠올라 정말 많이 울었어요. 얼마나 서럽던지요. 회를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하고 뱉어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와사비를 안 먹습니다. 일종의 트라우마지요.”
장동익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석방된 뒤, 장동익은 한동안 부산 영도의 한 공장 옆에서 살았다. 하필이면 주차장 옆이었다. 먼지가 집안으로 많이 들어와 살기 불편했다. 어느 날 공장 쪽 간부가 선물박스를 들고 장동익을 찾아왔다.
“먼지 때문에 살기 힘들죠? 많이 죄송합니다. 저희가 미안해서 작은 선물을 하나 들고 왔습니다. 조촐하지만 이거라도 좀 받아주십시오.”
그는 박스를 내려놓고 떠났다. 장동익은 박스를 열어봤다. 세상에나, 부산 어묵이었다. 그것도 한 박스! 장동익은 잊었던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어묵 박스를 들고 나가 이웃들에게 몽땅 나눠줬다. 내막을 모르는 이웃은 장동익을 향해 “착한 사람, 참 좋은 이웃”이라고 했다.
장동익은 김도 먹지 않았다. 김은 그에게 금기였다. 하지만 그 금기가 최근 우연한 일로 깨졌다. 그의 재심을 돕는 박준영 변호사 덕분(?)이다.
“박 변호사님이랑 함께 일하다가 점심을 먹으러 갔어요. 저는 비빔밥을 시켰는데, 제가 앞을 잘 못 보니까 박 변호사님이 제 밥을 비벼준 겁니다. 고맙게 한 술 딱 떠서 먹는데, 거기에 김가루가 있더라고요! 제 사정을 모르는 변호사님이 맛있게 먹으라고 김가루를 비빕밤에 뿌린 겁니다. (웃음) 그렇게 해서 김을 다시 먹기 시작했습니다.”
우연한 사고(?)였지만, 박 변호사가 길을 열어준 셈이다. 장동익은 최근 어묵도 먹기 시작했다.
“마음속에서 분노, 원망, 미움 다 내려놓고 ‘이건 그냥 음식이다..’ 생각하면서 먹습니다. (웃음) 이젠 뭐 다 먹을 만합니다.”
장동익, 최인철과 함께 최근 부산 다대포에 있는 한 횟집에 갔다. 최인철은 여전히 회 귀신이었다. 그에게 다시 고추냉이를 권했다. 최인철은 손을 내저었다. 아직 먹지 못하겠다고, 어쩌면 영원히 안 먹을 거라고 말했다. 그에게 장동익이 말했다.
“친구야, 괜찮아 이젠 먹어도 돼. 이젠 나도 어묵이랑 김 다 먹는다. 내가 예전처럼 너 원망하지 않아. 그냥 음식이구나.. 하면서 고추냉이 먹어봐.”
최인철은 고개를 흔들었다. 대신 그는 생선회를 듬뿍 집어 들어 숟가락 위에 얹었다. 그걸 장동익의 입 앞에 내밀었다. 장동익도 생선회를 좋아한다. 앞을 잘 볼 수 없어 마음대로 집어 먹을 수 없을 뿐이다. 오래전 승용차를 태워 줬듯이, 다시 최인철이 장동익을 배려한 거다.
장동익은 입을 크게 벌려 친구의 배려를 받아 천천히 씹어 먹었다.
“인철아, 네가 먹여주니까 회가 더 맛있다.”
이날 장동익은 소주를 몇 잔 마셨다. 운전을 해야 하는 최인철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가 장동익을 차에 태워 집까지 바래다 줬다. 장동익은 멀리 갈 일이 있으면 종종 최인철에게 전화해 차 태워 달라고 부탁한다. 최인철은 자주 장동익을 위해 운전대를 잡는다. 오래전, 자신의 ‘청춘시대’ 그때처럼 말이다.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두 남자는 같은 길을 걸으며 진실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