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로 불려온 뒤부터 하루의 시작과 끝을 가늠할 수 없었다. 뜨고 지는 저 하늘의 태양은 아무 힘이 없었다. 오라, 가라 명령하는 경찰이 하루를 지배했다. 경찰이 불러 유치장 문이 열리면 하루가 시작됐다.
“낙동강에서 여자 죽였어, 안 죽였어?”
경험하지 않은, 듣도 보도 못한 일을 물어보는 경찰의 물음은 어제처럼 반복됐다. 이 지긋지긋한 질문이 언제까지 이어질 지 짐작할 수 없었다. 하루를 장악한 경찰은 육체마저 지배했다.자신들이 원하는 대답을 못하면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무릎을 감싸 안게 했다. 그 상태에서 무릎 뒤쪽으로 쇠파이프를 가로로 꽂아 번쩍 들어 책상과 책상 사이에 걸었다.
다리는 하늘로, 머리는 땅으로 떨어진 ‘통닭구이’ 신세. 경찰은 수건으로 얼굴을 덮고 물을 부었다. 물고문은 캄캄한 밤이나 새벽에 끝났다. 고문은 끝나도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유치장으로 돌아오면 손목, 발목이 아파 끙끙 앓았다. 참다 못해 유치장을 지키는 경찰서 직원에게 호소했다.
“아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안티프라민 같은 약이라도 좀 있습니까?”
경찰서 직원은 고통을 호소하는 남자에게 연민을 느꼈는지, 종종 약을 갖다줬다. 철창 사이로 약을 건네 받은 남자는 어두운 유치장 바닥에 쪼그려 앉아 아픈 부위에 약을 발랐다. 앞을 잘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 장동익은 26년 전 그때의 일을 지금도 그림처럼 기억한다.
물고문이 진행된 사하경찰서 별관, 없는 죄를 인정하라는 경찰의 끈질긴 질문, 약 좀 달라고 요청했던 자신의 목소리, 손목과 발목에 발랐던 안티프라민의 느낌, 고문을 견디지 못해 말한 허위자백.. 장동익은 사하경찰서에서 열흘을 보낸 뒤 전혀 다른 사람으로 태어났다.
‘친구 최인철과 1990년 1월 4일 새벽 낙동강에서 부녀자를 강간살인한 흉악범.’
장동익은 사하경찰서 경찰들의 손에서 벗어나면 누명을 벗을 거라 기대했다. 자신이 겪은 물고문을 말하면 검사가 믿어 줄 거라 생각했다.
장동익은 검찰이 송치된 1991년 11월 18일부터 일관되게 범행을 부인하면서 경찰의 강압수사로 허위자백을 했다고 검사에게 말했다. 기대는 빗나갔다. 검사는 믿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험한 꼴만 당했다.
“사람 죽인 적 없다고 억울하다고 하니까, 검사실 계장이라는 사람이 ‘너같이 더러운 놈들한테는 손도 대기 싫다’면서 슬리퍼를 벗어 그걸로 뺨을 때리더라고요.”
장동익은 재판 과정에서도 계속 범행을 부인하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앞을 잘 볼 수 없어 글을 제대로 쓸 수 없는 그는 부산구치소 동료 재소자의 도움을 받아 판사에게 탄원서도 보냈다.
“형사들이 수갑을 채워 저를 거꾸로 매달아 얼굴에 수건을 덮고 물고문을 했습니다. 모진 고문 끝에 홍OO 형사가 하자는 대로 강도살인, 강도강간의 누명을 쓰고 조사를 받았습니다. 인간 이하의 고문을 받고 어느 사람이 허위자백을 안 하겠습니까. (중략)
경찰에서 받은 고문으로 아직도 구치소 의무과에서 약을 받아 계속 복용하고 있습니다. 저의 억울한 누명을 꼭 밝혀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께 탄원의 글을 올립니다. 내내 만수무강하세요.” – 1992년 3월 28일 장동익 작성 탄원서.
검찰에 이어 부산지방법원 재판부마저 장동익의 호소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장동익이 만수무강을 기원한 판사는 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장동익이 당했다는 물고문을 믿을 수 없고, 경찰의 강압 수사를 입증할 근거도 없다는 취지다.
과연 그럴까? 1심 법원은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는 판단을 했을까?
이 사건 재심을 추진하는 박준영 변호사는 지난 1월 29일 중요한 사람을 만났다. 지난 1991년 11월 11일부터 18일까지 사하경찰서 유치장에서 장동익과 함께 생활했다는 김수환(가명. 51세) 씨다.
김 씨는 박 변호사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저희 (유치장에 있는 사람들은) 원래 오후 9시면 취침시간인데, (중략) 장동익 씨는 일찍 (조사 받으러) 나가 자정이 넘어서 들어올 때도 있고, 늦은 시간에 들어오는 경우가 다반사하였습니다. (유치장에 돌아오면) 팔, 발목 같은 데가 많이 아프다고 하시더라고요. 특히 발목에 살짝 멍이 든 상태였고, 볼이 부어 있었어요.”
늦은 밤까지 거꾸로 매달린 채 물고문을 당해 팔목, 발목이 아팠다는 장동익의 진술과 거의 일치. 김 씨 이야기는 이어진다.
“자백을 안 하면 고문이 조금 심하게 이뤄졌고, 구타도 있었다고 (당시 장동익 씨가) 말씀하시더라고요. 저희들 사이에서 ‘통닭구이’라고 하는데, 다리를 꼬아 위에 매달고 얼굴에 수건 같은 걸 덮어 씌워 물을 붓는다는 식이었습니다.”
장동익의 말과 계속 일치하는 진술. 김 씨는 좀 더 자세한 상황까지 기억해냈다.
“(유치장 직원에게) 안티프라민이라도 있으면 좀 달라고 장동익 씨가 말했는데요. 자꾸 이야기 하니까 (직원이) 마지못해 주는 일도 있었습니다.”
약 이름까지 동일. 박 변호사가 물었다.
“약 25년 전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기억하십니까?”
“(당시) 장동익 씨와 이야기를 많이 나눴습니다. 저도 그런 건(물고문 진술) 처음이었지만, 이건 뭔가 잘못됐다,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혹시 김 씨의 기억이 윤색된 건 아닐까? 김 씨는 25년 전, 이 사건 재판 때 증인으로 출석한 적이 있다. 당시 그는 위증을 하면 처벌 받겠다는 선서를 하고 이렇게 진술했다.
“(경찰이 장동익의) 양손을 묶고 다리도 꼬아서 묶은 뒤 그 사이에 막대기 같은 걸 넣어 매달아서 돌린다고 하였으며, 얼굴은 수건을 덮은 채 물을 붓는다고 (장동익 씨가 당시 말)했습니다. 경찰관들이 말하는 대로 사람을 죽였다고 하면 풀어주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 고문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장동익 씨는) 거의 매일 통증을 호소했으며, 통증 때문에 잠을 못 이루고 너무 억울하다며 집안 사정 이야기도 했습니다. 장동익 씨가 (유치장) 근무자에게 안티프라민을 달라고 했고, 경찰관은 상관의 눈을 피해 약을 갖다 주곤 하였습니다.” – 1992년 5월 6일 부산지방법원 증인 진술
김 씨의 25년 전 법정 증언, 그가 2017년 1월 박 변호사에게 한 이야기, 장동익의 오랜 호소는 거의 일치한다. 이게 끝이 아니다.
이 사건 2심, 3심 변론은 맡았던 문재인 변호사는 장동익의 팔목, 발목에 안티프라민을 발라준 사람을 찾아내기도 했다. 박명현(가명. 53세) 씨가 그 당사자다. 그는 1991년 11월 당시, 사하경찰서 유치장에서 장동익과 함께 생활했다.
박 씨는 1992년 11월 19일 부산고등법원에서 열린 재판 증인으로 출석해, 장동익-최인철이 경찰에게 폭행당한 이야기를 자신에게 했다고 증언했다. 또 박 씨는 자신이 당시 유치장 근무자에게 안티프라민을 얻어 장동익의 팔목, 발목에 발라준 적이 있다고 밝혔다.
자, 이번엔 장동익과 함께 여자를 죽인 공범으로 지목된 최인철의 상황을 보자.
최인철 역시 장동익처럼 검찰에 송치된 후 두 번째 조사가 실시된 1991년 11월 22일부터 범행을 부인하면서 경찰에게 물고문을 당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고통을 못 참아서 억지로 꾸며” 허위자백을 했다고 검사에게 말했다.
검사는 최인철의 말을 믿지 않았다. 최인철 역시 장동익처럼 검사실 계장에게 슬러퍼로 뺨을 맞기도 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법원에서도 범행을 부인했다. 대법원이 무기징역을 확정한 뒤에도 최인철은 자신을 폭행한 경찰을 부산지방검찰청에 고소하기도 했다. 그의 말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그가 재판부에 보낸 탄원서의 내용을 보자.
“범행을 부인하니까, (사하경찰서 경찰이) 포승줄로 손을 묶어 책상 위에 눕게 한 후 제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다음 코에 물을 붓는 말 못할 고문을 가했습니다. 사람의 체력에는 참을 수 있는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약 일주일 정도 계속되는 고문에 못 이겨 저희들은 허위자백을 했습니다. 제 왼쪽 팔은 사회에서 일을 하다가 다쳐 수술을 했는데, 그때 보드심(나사 등으로 뼈를 고정하는 장치)을 했습니다.” – 1992년 1월 14일 1심 재판부에 보낸 탄원서
경찰의 고문으로 과거 수술했던 왼쪽 팔을 크게 다쳤다는 이야기. 사실일까? 최인철의 말을 뒷받침하는 인물이 있다. 류호성(가명. 46세) 씨는 1991년 11월 9일부터 17일까지 사하경찰서 유치장에서 최인철과 함께 생활했다.
류 씨는 1992년 10월 29일 부산고등법원에서 열린 이 사건 2심 재판 때 증인으로 출석했다. 그는 당시 문재인 변호사의 질의에 이렇게 답했다.
“최인철로부터 의자에 묶인 채 (경찰에게) 구타당하고 겨자 섞인 물로 고문을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중략) 최인철의 (왼쪽) 팔 철심 박힌 부분에서 나사가 돌아 팔이 부었으며, 그의 광대뼈가 시퍼렇게 멍이 들었습니다.”
박준영 변호사도 지난 2월 5일 류 씨를 직접 만났다. 류 씨는 당시 자신이 겪은 일을 박 변호사에게 자세히 말했다.
“최인철 씨는 (유치장에서 조사 받으러) 나갈 때는 멀쩡한데, 들어오면 사람이 정신을 못차렸습니다. (유치장 안에서) 쭈그려 바르르 떨었습니다. 옷도 다 젖어 있었고요. (왼 손목 위쪽을 비비면서) 손에 쇠를 박아 넣은 자리가 있는데, 나사가 막 움직였습니다. (최인철 씨가) 수갑을 찬 채 고문을 당했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최인철 씨) 바로 옆에 있었는데 주무실 때 이불을 덮어준 적도 있습니다.”
류 씨의 말은 최인철이 지난 26년간 호소한 말과 일치한다. 사하경찰서 경찰들의 물고문에 관한 장동익, 최인철의 진술은 매우 구체적이고 일관적이다. 둘은 물고문을 당한 장소, 일시, 고문 가해 경찰의 이름 등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위에서 서술한 대로 두 사람의 진술을 뒷받침하는 정황 목격자도 셋이나 있다.
세 목격자는 “과거 법정에서 한 진술은 모두 진실이며 재심이 열리면 다시 법정에 나가 있는 그대로 증언할 뜻이 있다”고 박 변호사에게 밝혔다.
자 그렇다면, 물고문으로 장동익-최인철을 강간살인범으로 제작한 당시 사하경찰서 경찰들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때 사건을 수사하며 물고문에 많이 가담한 경찰은 세 명이다. 이 중 한 명은 여전히 현직 경찰이다.
지난 10월 23일, 세 고문 경찰을 만나기 위해 부산으로 향했다. 우선 홍OO 경찰. 그는 은퇴해 현재 다른 일을 하고 있다. 그의 직장에서 약 20분간 대화를 나눴다.
“물고문?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 당시 저는 두 사람을 경찰서로 데려만 왔지, 수사 책임자도 아닙니다. 우리가 수사했을 때 두 사람의 범행을 입증할 물증을 못 찾았어요. 그래서 검찰이 불기소 할 줄 알았어요. 저는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물증은 없고, 자백만 있는 사건이어서 언젠가는 재심하는 날이 올 거라고 예상했어요. 책임? 그 사건으로 특진한 사람에게 가서 물어보세요! 저는 경찰 생활에 염증을 느껴 오래전에 그만뒀습니다.”
그의 말대로 살인범을 조작하고 특진한 전직 사하경찰서 허OO 경찰에게 연락을 했다. 경찰에서 은퇴한 그는 후배에게 책임을 넘기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밑에 있던 후배들이 다 알아서 한 일이고 저는 모릅니다. 연락하지 마세요! 뭐, 물고문? 이 사람이 지금 나하고 장난하나!”
현직에 있는 박OO 경찰. 그는 현재 부산 영도의 한 지구대에서 일한다. 그는 “기억나지 않고, 나는 모르는 일”이라며 자리를 피했다.
과거 유치장에 있던 사람들은 “안티프라민을 발라줬다” “왼쪽 팔에서 움직이는 나사를 만졌다” “조사를 받으면 물에 젖어서 왔다” 등 구체적으로 진술하는데, 수사를 했던 경찰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모른다”며 말을 피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신고 있던 슬리퍼로 자신들의 뺨을 때렸다고 장동익-최인철이 지목한 전직 검찰 수사관을 찾아갔다.
“당시 경찰에서 범인들 머리 좀 때리고 그런 건 있었던 걸로 아는데, 우리 검찰에서는 그렇게 안 하죠. 어떻게 사람 얼굴을 슬리퍼로 때릴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장동익-최인철 두 분은 사실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할 줄 알았어요. 명확한 물증이 없으니까. 만약 두 사람에게 죄가 없다면 법원 책임 아니겠어요? 그때 무죄를 선고했어야죠.”
이런저런 혐의로 유치장에 있던 사람들은 장동익-최인철에게 약을 발라주고 이불을 덮어줬다. 탄원서를 대신 써 주기도 했다 .
엉터리로 수사하고 물고문으로 살인범을 제작한 경찰은 지금 자기들끼리 서로를 탓하고 있다. 당시 검사와 수사관은 법원으로 책임을 돌렸다. 오판으로 두 사람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 판사 중 한 명은 얼마 후 대법원장이 됐다.
살인 누명을 쓰고 21년을 복역한 두 사람에게 그 누구도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실수, 오판을 인정한 사람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