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카카오 스토리펀딩에 연재했던 기획입니다. 2021년 <셜록> 홈페이지에 옮겼다는 걸 밝힙니다.)
‘줄푸세’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당시 박근혜 후보가 내건 핵심 구호다. 간단히 말해, 세금과 정부 규모를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2012년 대선 TV토론회에서도 박근혜 후보는 집권하면 줄푸세를 국정운영의 골간으로 삼는다고 밝혔다. 공언한 대로 줄푸세는 여전히 정부와 여당의 중요한 화두로 보인다.
‘줄푸세’가 선명한 목표는 아니다. 세금은 어떤 식으로든 수치화될 수 있다고 해도, 규제를 완화하고 법 집행을 강화한다는 건 쉽게 도식화되지 않는다. 더구나 규제 완화와 법질서 강화는 종종 충돌하는 개념이다. 규제는 대개 법령이기 때문이다. 규제 완화는 법령을 없애 푼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뜻을 풀어보면 법을 완화하면서 동시에 법을 강화한다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자기모순을 해결하려면 규제와 법 앞에 수식어가 반드시 필요하다. ‘불필요한’ 규제를 풀고 ‘필요한’ 법을 세운다고 해야 일단 말이 된다. 더 제대로 된 구호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 규제이고 어떤 규제가 불필요한지를 나눌 기준과 가치를 제시해야 한다.
좋은 정부가 되려면 그냥 열심히 한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을 어떻게 열심히 할 것인지 비전을 보여야 한다. 좋은 사회가 되려면 어떤 규제를 풀고 어떤 규제를 바로 세울 것인지 바른 합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세 가지 틀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떤 권리를 규제하는지, 왜 규제하는지, 어떤 방법으로 규제하는지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 규제 대상은 정신적 권리와 물질적인 권리로 나눠볼 수 있다. 거칠게 표현하면 ‘생각할 자유, 그 생각을 표현할 권리’와 ‘돈을 벌고 지킬 권리’로 구분된다.
규제의 목적은 더 여러 갈래로 나뉜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규제하기도 하고, 사회 혼란을 막기 위해 규제하기도 한다. 규제의 방법은 훨씬 더 다양하다. 대표적으로는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이른바 포지티스(positive) 방식’과 ‘원칙적으로 허용하고 예외적으로 금지하는 네거티브(negative) 방식’이 있다.
무엇을, 왜, 어떻게 규제하는지 위 세 가지 기준이 얽히면서 만들어내는 조합은 꽤나 복잡다기하다. 정치 구호로는 줄푸세와 같이 간단할수록 좋겠지만, 복잡한 세상을 단 세 마디로 규정하려는 건 비극의 씨앗을 심는 일일지 모른다.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라 건강을 위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원칙을 찾아야 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 원칙은 개개 국민의 생명과 건강, 안전을 지키는 것이 될 수 있다. 개별 시민의 생명과 건강을 위한 규제라면 쉽게 풀지 말아야 한다. 생명과 안전을 위한 법이라면 더 바로 세우길 바란다. 단 한 사람이라도 사람이 먼저라는 가치를 양보하지 않는다는 합의가 전제되기를 소망한다.
반대로, 시민들의 생명과 신체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지 않는 표현의 자유, 말과 글로 생각을 드러낼 자유에 대한 규제라면 더 완화되면 좋겠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 설령 우리 사회의 주류적 견해와 다른 불온한 생각이더라도 민주주의 이상에 배치되는 건 아니다. 민주주의는 다원주의 가치관을 전제로 한다. 민주주의는 난립하는 생각들을 용인하고 불편한 느낌까지 감수하는 게 결국 사회에 이득이 된다고 믿는 가치다.
규제가 그 반대로 작동해서는 곤란하다. 시민 개개인의 건강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필요한 규제는 오히려 풀고, 다양한 생각을 표현할 자유에 대한 규제를 강화한다면 과연 우리 사회에 미래가 있을까. 눈 앞에 보이는 죽음과 질병에 눈 감은 채 규제를 완화하고, 도리어 귀에 거슬리는 의견을 유언비어로 치부하며 사회악으로 처벌하는 법을 강화한다면 미래가 없다. 자살률 최고, 출산율 최저라는 아픔은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최저라는 아픔은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규제의 방법을 찾을 때에도 생명과 안전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생명과 건강에 위해가 될 수 있다면 특정 요건을 충족해 인허가를 받은 경우에 허용되는 포지티스 방식이 바람직하다. 그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일 뿐이라면 원칙적으로 허용하되 특정한 방법과 내용만 한정해서 규제하는 네거티브 방식이 더 낫다.
이런 원칙에 어긋나는 대표적인 규제법이 공직선거법이다. 규제 덩어리다. 주권자가 직접 참여하기 어려운 현실 때문에 대표자를 뽑는 룰(Rule)을 정하는 법인데도, 마치 위법행위를 다루는 형사특별법처럼 보인다. 주권자인 국민들이 후보자들에게 대해 의견을 표현하는 것을 대단히 위험한 행동과 같이 취급한다.
허용되는 행위가 무엇인지, 금지되고 처벌받는 행위가 무엇인지 복잡하게 꼬아서 나열한다. 시민들의 생명과 안전에 위해를 가하는 게 아닌데도, 원칙적 금지, 예외적 허용 방식을 취한다.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시민들이 알기 어렵다. 심지어 선관위도 헷갈릴 때가 많다. 선관위와 검찰, 법원의 판단이 더러 달라지기도 한다.
선거사무소에서 자신들을 찾아오는 시민에게 김밥만 제공하면 다과여서 괜찮지만, 젓가락과 함께 제공하면 ‘불법 식사 제공’으로 불법이라는 선관위 유권 해석이 논란이 된다. 법을 지키는 모범시민이 되려면 손가락으로 김밥을 먹어야 한다.
가만히 있으라는 법이다. 유권자는 ‘나는 OOO 후보를 지지한다’는 글을 써서 자기 집 대문에 붙일 수도 없다. ‘OOO 후보를 찍지 맙시다’라고 적힌 유인물을 배포하면 큰일 난다. 사실을 논리적으로 펼쳐도 처벌될 수 있다. 선거기간에 특정 정책을 지지하는 집회도 열어도 문제 된다. 모두 수사기관에 불려가 처벌받을 수 있는 행위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규제중심의 선거법이다. 오랜 시간 규제의 틀 안에 갇혀 있다 보니 규제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규제에 익숙해져 대부분 가만히 있는다. 그런 규제가 없어지면 뭔가 혼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하기까지 한다.
돈을 벌고 재산을 지킬 권리에 대해 제한을 받는 주체들은 규제 완화를 꾸준히 주장한다. 연구하고 행동한다. 정부를, 국회를 움직인다. 규제를 완화해 낸다. 그물이 잘못됐다고 찢고 자유를 찾는다. 그러다 시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할 망이 찢어지기도 한다.
잘못 찢어진 망을 복구하려면 그물을 만들 권리를 위임하는 대표자들을 올바르게 뽑아야 한다. 그러려면 후보자를 선택하는 공론장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작은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이러 저리 살펴보고 다른 이들과 의견을 나눈다. 하물며 주권을 위임하는 대표를 뽑는데, 가만히 있다가 잘 알지도 못하는 채로 표만 줄 수는 없다.
이 프로젝트는 선거법에서 규제 덩어리를 떼 내고 자유를 찾으려는 시도다.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는다면, 족쇄를 풀고 자유를 찾을 수 있다. 잃어버린 축제를 자유로이 즐길 수 있다.
시민 행동에 대한 정부 간섭을 ‘줄이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규제를 ‘풀어’ 주권자의 권리를 ‘세우는’ 진정한 줄푸세. 지금 당장 선거법에 적용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