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첫 소변을 받은 플라스틱 통을 들고 병원으로 가는 길. 피 검사 때문에 아침도 거른 채 엄마와 평택 집을 나섰다. 아버지와 여동생이 잠에서 깨지 않은 오전 6시였다.
지금까지 이런 아침을 몇 번 반복했을까. 병원이 있는 서울까지는 멀고, 완치의 길은 그보다 더 멀어 보인다.
김민준(가명, 18세) 군은 왼쪽 신장 없이 태어났다. 남은 오른쪽 신장도 lgA신증을 앓고 있다. 사구체(모세혈관 다발)에서 단백질과 적혈구가 빠져나가 단백뇨와 혈뇨가 발생하는 염증성 신장 질환이다. 그의 오른쪽 신장은 제 기능을 10% 밖에 하지 못한다.
김 군과 엄마 김혜주(가명, 44세) 씨는 매달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서울대학교 어린이병원을 방문한다. 건강이 나빠지면 2주에 한 번으로 그 주기가 짧아진다. 지난 7월 13일, 기자는 이들과 함께 병원을 찾았다.
김 군이 병원에 도착했을 땐 오전 8시, 곧바로 소변통을 제출하고 피를 뽑았다. 처치실로 이동해 혈압을 재고, 측정실에서 키와 몸무게도 체크했다. 검사와 대기만 약 1시간 걸렸다. 이어 김 군은 소아청소년과에서 신장 진료를 봤다.
“의사 선생님이 ‘다행히 신장 기능이 더 나빠지진 않았다‘고 하시네요. 단백뇨와 요산(통풍의 원인이 되는 물질) 수치가 줄었다고 해요. 요즘 부쩍 아이 컨디션이 안 좋아 걱정을 많이했는데, 한시름 놓았습니다.”
엄마 김 씨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날은 특별히 이비인후과 진료도 봤다. 김 군은 오는 8월에 편도선 절제 수술을 받아야 한다. 편도선염 때문에 신장 질환이 악화되는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김 군은 다시 채혈을 하고, X-ray 촬영, 청각 측정, 심전도 검사를 받았다.
모든 진료는 오전 10시 30분께에 끝났다. 평택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엄마 김 씨가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이들은 오후 2시경 평택 집에 도착했다.
“너무 어렸을 적부터 병원을 다녀서요. 이젠 익숙해요.”
김 군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유아기 시절부터 병원을 자주 다녔다. 생식기에 식염수를 넣고 소변 역류 여부를 판단하는 검사를 주로 받았다. 돌 지날 무렵, 김 군은 선천적으로 앓던 방광 요관역류 문제로 수술을 받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열을 동반한 갈색 소변을 봤다. 초등학교 3학년때까지 혈뇨가 이어졌다. 김 군은 그때까지 정확한 병명을 알지 못했다. 개복을 하고 조직검사를 해야 진단을 내릴 수 있는데, 신장 하나가 없는 김 군에겐 그 과정 자체가 위험했다.
여름만 되면 열이 올라 일주일씩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반복됐다. 결국 김 군은 10살 때 개복 수술을 했다. 이때 lgA신증을 진단받았다.
치료에는 많은 돈이 들었다. 김 군은 혈압 약을 매일 먹어야 했다. 신장치료용 신약을 먹을 때는 비급여(건강보험 미적용) 처방이어서, 약 값으로만 매달 150만 원~200만 원 썼다. 아이가 힘들게 병과 싸울 때마다 김 씨는 하늘을 원망했다.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답답한 시간을 보내던 김 씨는 전 직장 동료들의 직업병 소식을 들었다. 많은 직원들이 직업병을 앓자, 회사는 이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했다. 여기에는 선천적 자녀 질환도 포함됐다. 돌이켜보니, 사무직 근무 이후 태어난 둘째 아이는 아프지 않았다.
“엄마가 일한 작업환경 때문에 아이가 아플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못했어요. 노동자가 아파도 회사는 직업병 인정을 잘 안 하잖아요. 아이가 선천적으로 아픈 다른 직원들 사례를 보면서 ‘회사 탓일 수 있겠구나’ 생각했죠.”
김혜주 씨는 삼성반도체 노동자였다. 1995년 만 17살에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 입사했다. 약 12년간 공장에서 일하다, 2007년경 사무직으로 업무를 바꿨다. 20년 근무하고 2015년에 명예퇴직했다. 그때 그의 나이 38세였다.
삼성반도체에서 김 씨는 ‘마스크’를 생산하는 라인에 배치됐다. 마스크는 설계된 전자회로를 그려놓은 유리판을 말한다.
그는 해당 라인에서 ‘포토 및 식각 공정‘을 맡았다. 포토 공정은 마스크를 통해 반도체에 회로를 그려넣는 과정을, 식각 공정은 그려진 회로 외에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내는 과정을 말한다.
김 씨는 입사 4년차 때부터 피부가려움증을 겪었다. 약을 먹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생리 주기도 40일 정도로 길어지고, 생리통도 유난히 심해졌다.
고용노동부 산하 ‘안전보건공단‘이 2012년에 발간한 <반도체산업 근로자를 위한 건강관리 길잡이>에 따르면, 포토 공정에서 사용된 화학물질과 부산물이 피부 자극이나, 생리불순, 자연유산 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포토와 식각 공정에서 다루는 벤젠, 불소, 일산화탄소 등의 유해 화학물질이 선천성 기형을 유발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김 씨는 마스크가 든 ‘런 캐리어’를 꺼내 다음 공정에 넣는 일을 주로 했다. 원칙상 설비 가동이 끝난 후 충분한 쿨링 타임(cooling time)을 갖고 ‘런 캐리어‘를 빼내야 했지만, 대체로 지켜지지 않았다.
“설비 가동이 끝났는데, ‘런 캐리어’를 안 꺼내고 가만히 있으면 선배들한테 한소리 들었어요. 눈치가 보이니까, 쿨링 타임을 지키지 않고 바로 런 캐리어를 뺐죠. 그냥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했어요.”
김 씨가 근무하던 라인은 일반 라인보다 근무 환경이 더 열악했다. 화학물질이 담긴 30cm 짜리 플라스틱 통을 들어 직접 기계에 붓는 일도 김 씨의 업무였다.
그때마다 시너보다 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호스 등을 사용하지 않아 화학물질이 그에게 튀기도 했다. 이런 작업이 매일 이어졌다. 그는 자주 두통을 앓았다.
김 씨는 이런 업무를 임신 8개월 중순때까지 했다. 출산 45일 만에 업무에 복귀했다.
김 씨는 올해 5월 20일 시민단체 반올림의 도움을 받아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엄마가 일한 회사의 작업환경 문제로 인해 선천적으로 장애나 질병을 갖고 태어난 아이에 대한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라“는 취지다.
반올림은 반도체, 전자산업체 노동자들의 인권과 노동권을 위해 연대 활동을 하는 시민단체다.
“사실 아이가 마음에 걸렸어요. 아이가 산재를 인정받으면, 나중에 커서 일을 할 때 혹시나 불이익이 있을까 싶어서요. 하지만 솔직히 저희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요. 태아 산재가 인정되는 게 아이한테만 좋은 일이라면, 그걸로 됐어요.”
근로복지공단이 어떻게 판단할지는 알 수 없다. 현행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는 임신 중 업무상 재해로 인한 태아의 선천적 질병을 보상하는 규정이 없다.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약 10년 전부터 나왔다.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이 자녀에 대한 산업재해를 근로복지공단에 신청한 2012년이 그 시작이다. 당시 제주의료원 간호사 4명은 선천성심장 질환아를 출생했다. 하지만 자녀의 질환은 엄마 ‘본인의 재해‘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산재가 인정되지 않았다.
엄마들은 약 10년 간의 행정소송 끝에 ‘아이의 치료비를 근로자인 엄마가 보상받을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대법원 판결은 근거가 부재한 현행 산재법 안에서 이뤄진 한정적 결론이다.
현행법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는 ‘태아를 수급 주체로 인정‘하는 산재법 개정이 필요하다. 태아도 법적으로 근로자와 똑같은 지위를 인정받아야 선천적 질병에 대한 적절한 보험급여를 보상받을 수 있다.
이런 법 개정의 논리가 민법에는 일부 포함돼 있다. 민법상 태아는 사람으로서 권리능력이 인정되지 않는다. 다만, 손해배상 청구권에 관해서는 엄마 뱃속에 있을지라도 이미 출생한 걸로 본다. 즉, 태아를 손해배상 청구 주체로 인정하고 있다.
산재법에서도 태아를 권리 주체로 인정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보험급여 수급권자와 청구권자가 같지 않으면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산재 급여를 태아가 아닌 여성노동자에게 지급하는 경우를 따져보자. 해당 노동자가 사망하면 수급권이 아예 상실된다. 또 이혼 등으로 자녀를 돌보지 않을 때에도 노동자에게 산재급여가 지급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현주 우송대 간호학과 교수는 “태아가 보험급여 수급권과 청구권을 모두 갖는 게 산재법 개정안의 핵심“이라며 “보험급여의 주인은 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2019년 고용노동부의 용역보고서인 ‘자녀 건강손상에 대한 산재보험 급여 지급기준에 관한 연구‘를 맡았던 총 연구책임자다.
이런 지적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산재법 개정안 관련 ‘검토 보고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보험급여를 근로자에게 지급한다면, 근로자의 사망으로 수급권이 상실되거나 이혼 등으로 친생자와 생활을 할 수 없는 경우 보험급여를 지급하지 못하는 사례가 발생할 수 있다.”
태아를 수급 주체로 인정하자는 논의는 국회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물론 법안 통과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김민준 군은 편도선 절제 수술을 앞두고 건강 관리에 들어갔다. 매일 복용하는 혈압약, 요산약도 조금씩 줄이는 중이다. 수술 후 빠른 회복을 위해 체중도 관리해야 한다. 엄마 김 씨는 잔소리를 줄일 수 없다.
“민준이만 보면, 뭐든 ‘안돼!‘부터 말하니까 속상해요. 신장이 안 좋으니 짠 걸 먹으면 안 되거든요. 애가 운동도 좋아하는데, 몸에 무리가 가면 또 혈뇨를 볼 수 있으니까 자제하라고 자주 말하죠. 민준이한테 늘 미안한 마음뿐이에요.”
나이 열여덟 김 군에겐 이번 수술이 벌써 네 번째다. 막 걷기 시작할 때 받은 방광요관역류 수술과 세살 무렵 받은 선천성 지방종 제거 수술, 초등학생 때 받은 신장 조직검사를 위한 개복 수술, 8월에 잡힌 편도 절제 수술까지.
이 모든 고통과 비용을 오직 김 군과 가족이 짊어졌다. 근본적인 질문을 해보자.
‘김민준 군은 왜 아플까.’
엄마의 노동환경 탓으로 보는 게 합당하다면, 산재보험이라는 사회보장으로 아이를 책임지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엄마 김 씨가 태아 산재라는 동아줄을 놓지 못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