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출장은 순조로웠다
STX 법무감사팀으로 이직한 후 처음 맡은, 단독 해외 업무였기 때문에 A 과장은 출장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관례처럼 진행하는 해외 법인장과의 식사자리도 잊지 않았다. 본사 내부 사정을 베트남 법인장에게 가볍게 건넸다.
식사가 끝나고, 베트남 법인장은 A 과장의 부서장인 윤아무개 씨에게 곧장 연락했다. 대화에 강제 소환된 사람은 법무감사팀의 A 과장이었다. 그때부터 베트남 법인장은 법무감사팀 윤 팀장과 낯뜨거운 대화를 이어갔다.
베트남 법인장은
‘끈적한’ 농담(?)을
법무감사 팀장에게 쏟아냈다
“더우니까 (그 여직원에게) 스타킹 벗으라고 얘기할 뻔 했잖아.”
‘아재’들의 성(姓)찬에 숟가락을 얹은 건 인도네시아 법인장이었다. 베트남 법인장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몰라도, 인도네시아 법인장은 여자 직원을 ‘왕 시중을 드는 시녀’ 취급했다. ‘예쁘고 젊은 여직원’을 보내달라는 식의 부적절한 농담을 던졌다.
“윤 팀장. 그런 직원 있으면 여기도 한 번 출장 보내주라.”
불똥은
이상한 곳으로 튀었다
윤 팀장은 이 말을 들은 직후, A 과장의 직속 상사인 이 차장을 불러들여 A 과장에 대한 훈계를 지시했다. 베트남 현지 일정이 까닭없이 변경된 것을 마치 A 과장 잘못인 것처럼 말했다. 정상적으로 모든 업무를 마쳤음에도 ‘일은 제쳐 두고, 법인장과 놀아났다’는 식으로 몰고갔다.
“이 차장, 도대체 A 과장이 베트남에서 뭘 어떻게 하고 다녔길래 이상한 말이 나오는 거야? 좀 알아봐.”
출장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온 A 과장은 회사 분위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출근 후 자리에 앉은 A 과장을 이 차장은 곧장 구내식당으로 불러 고압적인 자세로 화를 내기 시작했다.
문제의 발언을 한 남자 법인장들에 대한 지적은 없었다.
설교의 요점은
‘여자로서 처신을 제대로 해라’였다
“너 나이가 몇 살이야? 출장을 보냈더니 법인장이랑 술 마시고 놀아났냐? 얼굴이 예쁘고 남자들이 관심을 많이 가지면 본인이 알아서 조심을 해야지.”
A 과장은 당황스러워 말문이 막혔다. 현지 법인장과 단 둘이 만난 것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현지 직원이 동석한, 업무적인 자리었다. 하지만 이 차장은 사전에 약속된 식사자리를 두고 ‘법인장이랑 놀아 났냐’는 말로 폄하했다.
2015년 12월, 입사한 지 반년도 채 안 된 시점에 벌어진 이 일로 A 씨는 매일 밤을 분노로 가슴을 쳤다. 이 차장은 그 후로 “여자 직원이랑 일하기 힘들다”는 폭언을 자주 퍼부었다. 어디에 하소연 할 곳도 없었다. ‘이 차장에게 이상한 말을 듣지 않았을까’란 염려 때문에 동료들을 대하는 게 무서워졌다. 외로움도 커졌다.
‘여자로 보인다’ 말하는 성희롱 상사
A 씨는 주식회사 STX에 2015년 7월 입사했다. 대학원에서 법을 공부한 A 씨는 경력사원으로 STX 법무감사팀에 들어갔다. STX로 이직해오면서 금융에서 무역으로 업무를 바꿨기에 회사 생활은 A 씨에게 다르게 다가왔다. ‘잘해야 한다’는 강박과 ‘빨리 적응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컸다.
유일한 보고 창구이자, 직속 상사인 이 차장의 지시가 절대적이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부서 특성상 재판이나 외부 회의가 많아 이 차장과 단 둘이 있는 시간이 많은 게 불편했지만, 변호사인 이 차장에게 배우는 게 많을 것이라 믿고 견뎠다.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만연한 직장 내 성희롱이었다. 습관처럼 반복되는 이 차장의 부적절한 언사는 A 씨의 직장생활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베트남 출장 추문 사건 외에도 성희롱은 숱하게 벌어졌다.
이 차장의 말에는
꼭 성적인 내용이 들어갔다.
“네가 차려 입고 오면 예뻐서 이상한 기분이 들어. 여자로 보여.”
무엇보다 자신을 ‘부하 직원’이 아닌 ‘여자’로 대하는 일이 잦았다. 승인이 필요한 업무에 힘을 쓰고 싶을 땐 A 씨의 여성성을 업무수행 수단으로 활용했다.
“A 과장이 가서 미인계 좀 써봐. 이 건은 어떻게든 승인 받아야 한다니까.”
‘유부남과 불륜관계에 있다’는 소문을 만들기도 했다. 남자 직원과 밥만 먹으러 가도 이 차장은 걱정이랍시고 주변이 오해할 수 있는 말을 하곤 했다.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확인을 해줘도 반복됐다. 남자 직원과 대화를 나누면 “거봐”라면서 관계를 의심했고,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 “둘이 틀어졌나 보다”며 비웃었다.
음란한 사진을
강제로 보여준 것도
성희롱이었다
가슴 골이 드러나는 연예인의 사진을 들이밀며
“당신과 밥을 먹은 그 남자 직원이 보낸 사진이다.”
“그 남자는 육체적으로 목이 마른 사람이니 조심하라.”
고 경고했다. 묻지 않았음에도 룸싸롱, 성매매에 대한 얘기를 꺼내서 A 씨를 불편하게 했다. 사내 남자 직원에 대한 얘기로 대화를 시작해 낯뜨거운 얘기로 끝이 나는 일이 거듭됐다. 회사에서 실력으로 인정받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최선을 다해 일을 해도 이 차장은 A 씨를 성적 존재로만 소비했다.
특히 남자 상급자가 동석하는 술자리에 A 과장을 ‘상납’하고 ‘대접’하는 모습을 자주 연출했다. 이 차장은 게다가
“내가 변호사지 채홍사(조선 연산군 때 미녀와 좋은 말을 구하기 위해 지방에 파견한 관리)냐?”
라는 말을 던져서 이런 모양새를 강화했다.
결국 A 씨는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를 먹어야만 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불안 증세가 날로 심해졌다. 부적절한 말과 행동을 그만하라고 이 차장에게 부탁해도 잠시 뿐이었다. 사과 후 며칠 뒤면 “둘이 영화 보러 가자”며 추근댔다. A 씨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제는 ‘여자로서 처신을 잘하라’고 하더니, 남들 없을 때는 자신을 여자로 대하는 이 차장이 싫었다.
피해자는 ‘꽃뱀’으로 몰렸다
2016년 4월 15일, A 씨는 고민 끝에 원칙대로 싸워 보기로 마음 먹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인사팀장에게 그간의 얘기를 쏟아냈다. 성적 모욕과 성적 차별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말하며 피해 사실을 분명히 전했다.
그로부터 나흘이 지난 4월 19일, 부서장인 윤 팀장은 이 차장과 A 씨를 불렀다. 윤 팀장이 문제를 해결하리라 기대하지 않았지만 피해 사실만큼은 들어줄 거라 믿었다. 부서 팀장이라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은 이상하게 흘러갔다.
팀장은 성희롱을 확인하지 않고,
피해자를 업무에서 밀어냈다
“A 과장, 성희롱이 업무보다 중요하면 그만 두고 정식으로 고소해.”
그 후로 A 씨는 잡무나 다름 없는 일을 맡았다. 종합상사 회사의 법무 업무 커리어를 쌓고 싶어 STX로 이직했는데 주요 업무에서 배제된 것이다. 그 후에도 업무는 몇 번 바뀌었다. ‘잘못은 이 차장이 했는데, 피해는 내가 떠맡는 느낌’이 들어 A 씨는 화가 났다.
사내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A 씨는 6월 30일, 노동청과 국가인권위에 진정서를 냈다. 사내에서는 해결이 안 되니 달리 방법이 없었다. 회사에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 좋을 듯했다 다음날 대표이사와 그 비서, 법무감사 팀장만 볼 수 있는 신문고에 피해 사실을 접수했다.
회사는 그제야 관련 조사를 인사팀에 지시했다. 인사팀은 A 씨와 이 차장을 비롯한 팀원들과 면담했고, 관련자들에게 사실확인서를 받았다. 대표이사는 구두로 “처리해주겠다” 약속했고, A 씨는 이를 믿고 국가인권위의 진정을 취하했다.
하지만 징계위원회를 앞두고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확신했다. 부서장인 윤 팀장과 성희롱을 한 이 차장은 ‘문제 소지를 만든 건 A 과장이었다’는 식의 논리를 내세웠다.
“A 과장의 회사생활이 원만하지 않았고, 이직한 남자 직원과 부적절한 관계였다”
는 근거 없는 말을 해댔다.
쉽게 말해 남자들에게
꼬리치고 다니는 ‘꽃뱀’이라고
음해한 것이다
“워크숍 때에는 몸에 달라붙는 레깅스를 입고 남자직원들이 다 보는 앞에서 허벅지를 들고 엉덩이를 과도하게 노출시키는 요가 자세를 취했습니다.” – 이 차장이 회사에 제출한 소명서의 일부
“A 씨는 회사에서도 기분과 행동이 매우 불안정하고 감정의 기복이 매우 심했습니다.” – 윤 팀장이 추후 남대문경찰서에 제출한 진술서의 일부
회사는 가해자 편이었다
7월 12일, 오랜 기다림 끝에 인사위원회가 열렸다. 그 무렵 A 씨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팀 내 유일한 여자, 강 모 과장 또한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을 하지 말라고 충고해줬더니 대들더라”는 식의 유언비어를 다른 부서 직원들에게 전했다.
인사위원회에는 피해자인 A 씨만 참석했다. 성희롱을 일삼은 이 차장은 일을 핑계삼아 인사위원회에 오지 않았다. 대표이사와 전무 두 명, 인사팀장이 A 씨와 마주 앉았다. 성희롱 사건 특성상 뚜렷한 물증은 없지만, A 씨는 피해 사실을 충분히 소명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임원의 첫 질문을 듣고 직감했다.
회사는 성희롱 피해자 편이 아니다
마치 이 차장의 소명서를 질문지로 만들어 되묻는 듯했다. 일단 회사는 외부 기관에 신고한 사실을 불편하게 여겼다. 노동청과 국가인권위에 진정한 걸 못마땅하게 여기는 감정이 한 임원의 질문에 묻어났다.
“성희롱 관계는 판정이 쉽지 않아서 외부 국가기관에 판단을 맡기기 위해 그 쪽으로 의뢰(진정)을 한 겁니까?” – 인사위원회 의사록 중 김 전무의 발언
엉뚱한 일을 성희롱 사건과 연결하기도 했다. “동료와 잘 지내겠다”는 A 씨 입사 당시의 포부를 되짚더니, 근무를 성실하게 했는지 따져 물었다.
“STX에 입사할 당시에 동료들과 원만하게 잘 지내겠다고 했었는데, 회사경영 여건이 어려운 가운데 본인이 근무를 성실히 잘 했다고 생각하나요?” – 인사위원회 의사록 중 김 전무의 발언
남녀고용평등법에 따라 성희롱 피해를 노사협의회에 신고할 수 있음에도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주변에 소문 냈다’는 듯 A 씨를 질책하기도 했다.
“이 내용을 노사협의회에도 보냈나요? 의도가 뭐였나요?” – 인사위원회 의사록 중 서 전 대표의 발언
남녀고용평등법 제25조(분쟁의 자율적 해결)
사업주는 근로자가 성희롱 등의 고충을 신고하였을 때에는 ‘근로자참여 및 협력증진에 관한 법률’에 따라 해당 사업장에 설치된 노사협의회에 고충의 처리를 위임하는 등 자율적인 해결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무엇보다 인사위원 중 한 명은 성희롱 가해자인 이 차장을 두둔하는 발언도 했다. 성희롱 교육을 받았는데, 왜 성희롱을 당했냐는 식으로 쏘아붙였다.
“성희롱 신고를 당하는 사람도 창피하고 고통스러워요. 성희롱 교육 받은 적 있지요? 성희롱 발언을 들으면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게 거절하는 게 좋아요. 선배로서 충고하는 거예요..” – 인사위원회 의사록 중 김 전무의 발언
심의 결과는
‘성희롱 가해자 피해자 모두 경징계’
이 차장에게는 견책 처분이, A 과장에게는 경고 징계가 나왔다. 심의 결정문 어디에도 ‘성희롱’ 얘기는 없었다. 성희롱 의혹에 대해 관계자들 주장이 상반되고, 명백한 입증 자료가 없기 때문에 성희롱 유무를 판단할 수 없다고 회사는 판단했다.
회사가 밝힌 이 차장의 징계 사유는 ‘복무 수칙 및 품의 유지 위반’이다. 상위 직급자는 하위 직급자를 성실로 지도해야 하는데, 제대로 감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경징계에 나온 것도 황당한데 ‘못난 후배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게 징계 사유인 것이 A 씨는 불편했다.
A 씨의 징계 사유는 더 황당하다. 이 차장의 성희롱 가해와 접대비 유용에 대해 노사협의회에 문제 제기한 것을 두고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유포했다”며 문제 삼았다. 근무 태도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다. 출입증을 집에 두고 출근한 날을 문제 삼으며 근태가 좋지 않은 불성실 직원이라고 낙인 찍었다.
회사, 퇴사한 가해 상사에게 자문 수임 맡겨
A 씨는 휴직을 신청했고, 다시는 회사로 돌아가지 못했다. A 씨는 끝내 퇴사를 선택했다. 납득할 수 없는 회사의 징계와 직장 내 따돌림으로 회사를 다닐 수 없어 9월 25일 사직서를 냈다. 적응장애를 판정 받을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했다. 그 사이에 노동청의 성희롱 조사결과가 나왔다. 회사의 결과와 정반대였다.
노동청은 이 차장의
성희롱 사실을 인정했다
“이 차장이 진정인에게 직장 내 성희롱을 행한 사실이 확인된 바, 지체없이 행위자인 이 차장에 대한 징계나 그밖에 이에 준하는 조치를 한 후 그 결과를 제출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시정지시에 불응한 경우, 귀사에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습니다.” – 2016년 10월 13일 서울지방고용노동청
하지만 이 차장이 그 사이에 이직을 해서 노동청의 시정명령은 없던 일이 됐다. 이 차장은 로펌에 재취업했다. 회사는 손 대지 않고 코 푼 격이다.
이 차장 입장에서는 오히려 잘된 일일지 모른다. 회사는 수백 만 원에 달하는 자문 수임료를 이 차장에게 매달 월급처럼 주면서 퇴사 이후에도 STX의 법무 업무를 맡겼다. 쫓겨나듯 떠난 A 씨와는 판이했다.
성희롱 피해자 10명 중 7명 ‘퇴사’
“직장 내 성희롱의 손해는, 직업인으로 훈련시킨 여성들을 일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사회에서 제거하는 겁니다.”
A 씨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여성 직장인이다
변호사의 도움을 크게 받지 않아도, 법적 대응이 가능한 직업인이라는 점이 좀 특별할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력에도 A 씨는 성희롱 피해 구제절차 과정에서 ‘꽃뱀’ ‘사회부적응자’로 취급돼 회사를 떠나야만 했다.
악몽은 퇴사 이후로도 계속됐다. 가해 상사는 A 씨를 무고와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회사는 노동청에 관련 사실을 신고했다는 이유로 A 씨를 적으로 돌렸다. 동료들은 회사 측에 서서 A 씨를 모욕하는 진술서를 썼다. A씨 편은 피해가 발생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없다.
사실을 말하는 건 성희롱 피해자 손을 들어준 법원 판결문뿐이었다. 법원은 ‘직장 내 성희롱에 사업주의 책임도 있다’고 선고했다. A 씨는 회사와 가해 상사를 상대로 지금까지 법정 다툼을 하고 있다. 노동청에서도 성희롱 피해를 인정했음에도 회사가 이를 인정하기 않았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해결됐다면 법정까지 가지 않았을 겁니다. 아무도 피해 사실을 책임지려 하지 않아서, 밝히려 하지 않아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
10명 중 7명이
결국 회사를 떠난다
얼마나 더 많은 여성 직장인들이 성희롱 피해를 당하고도 떠나야 할까.
직장 내에서 성희롱 문제를 해결하는 건 여전히 아득한 일이다.
서울여성노동자회가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10명 중 7명 가량이 결국 회사를 떠난다. (2013~2016년 상담한 성희롱 피해 상담자 대상으로 설문 집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