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여주시로 향하는 차 안, 창밖 풍경이 논으로 가득 찰 즈음 가방에서 ‘농업경영계획서’를 꺼냈다. 한 대목을 반복해서 읽었다.
‘연령 – (당시) 28세
직업 – 자영업
농지 총 면적 – 4,541㎡,
노동력 확보 방안 – 자기노동력’
28세 ‘초보 농부’가 총 면적 4,541㎡(약 1376평)의 농지를 온전히 자기노동력으로 경작하겠다니. 농구장 11개를 합친 면적과 맞먹는 크기 아닌가. 이상한 대목은 또 있다.
‘영농거리 – 86km, 주재배 예정 작목 – 고구마, 배추, 잡곡
영농착수 시기-2020년 7월.’
거주지에서 농지까지 86km. 도로 여건상 그의 집에서 차로 약 1시간 30분 걸리는 거리다. 이쯤 되면 초보 농부의 진정성이 의심된다.
장거리 농사를 짓겠다며 농지를 구입한 28세 청년은 정선재 서울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의 장녀 정OO 씨(93년생)다.
정 수석부장판사는 2022년 3월 현재 서울고등법원 내 부장판사 중 법조경력이 가장 오래된 인물이다. 수석부장판사는 해당 법원에서 법원장 다음으로 높은 자리다. 그는 2016년 2월부터 2021년 4월까지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를 맡기도 했다.
고법 부장판사는 잠재적인 대법관 후보군으로 ‘법관의 꽃’이라 불린다. 과거엔 3000cc급 세단과 운전기사를 지원받는 등 차관급 대우를 받았다.
정 수석부장판사는 본인과 그의 가족(배우자, 직계존속, 직계비속) 소유로 된 재산을 ‘공직자윤리법’에 따라 대한민국 <관보>에 공개해야 하는 고위공직자다. 그의 딸은 적법하게 농지를 구입해 제대로 농사를 짓고 있을까?
헌법 제121조에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이 명시돼 있다. 자경(自耕)하는 사람, 말 그대로 직접 농사를 짓는 자만이 농지를 소유할 수 있다는 규정이다. 농지를 취득하려는 사람은 농지 소재지 관할 관청에 농지취득자격증명을 반드시 발급받아야 한다.
정 수석부장판사 딸이 소유한 농지에 지난 2월 15일 직접 가봤다. 해당 농지는 경기도 여주시 가남읍 심석리에 있다. 기자가 사는 경기도 고양시에서 차로 약 2시간이 걸렸다.
약 1376평 크기의 밭에 도착했을 때 눈발이 날렸다. 찬 날씨 탓인지, 밭에는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았다. 밭은 전문 농부의 손길을 거친 듯 열을 맞춰 정갈하게 갈려 있었다. 수확 안 된 고구마 몇 개가 보였다.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정선재 수석부장판사 장녀 정 씨는 지난 2020년 6월 30일 경기도 여주시 가남읍 심석리에 있는 4필지 총 4541㎡ 규모의 논과 밭을 외할머니로부터 3억700만 원에 매입했다. 평당 매입 가격은 약 23만 원. 외할머니 이OO은 2019년 5월경 남편 김OO으로부터 해당 농지를 상속받았다.
정 수석부장판사 배우자 김OO 씨도 딸이 소유한 농지와 붙어 있는 밭을 2020년 6월 30일 매입했다. 김 씨는 남동생에게 1억4000만 원을 주고 농지 한 필지 2413㎡를 매입했다. 남동생 김OO은 2019년 5월 아버지 김OO으로부터 해당 농지를 상속받았다.
<셜록>은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정 판사의 딸 정 씨와 배우자 김 씨가 제출한 농지취득자격증명 관련 자료를 확보했다.
2020년 매입 당시 장녀 정 씨의 주소지는 서울시 동대문구였다. 해당 농지와 약 86km 떨어진 곳이다. 당시 배우자 김 씨의 주소지는 서울시 강남구. 해당 농지와 약 67km 떨어져 거리다.
이들 모두 농지취득자격증명신청서상 ‘농지 취득 목적’에 ‘농업경영’을 적었다. 농업경영계획서에는 2020년 7월부터 ‘자기노동력’으로 직접 고구마, 배추, 잡곡을 심겠다고 기재했다. 즉, 모녀는 자경하겠다고 관할 관청에 신고하고 농지 취득 자격을 인정받아 농지를 소유했다.
모녀의 자경 여부를 확인하고자, 해당 농지 인근에서 약 20년째 살고 있는 주민 A 씨를 만났다. “농지 주인 정 씨와 김 씨가 직접 농사를 짓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작년에(2020년 의미) 여기 땅을 묵혀서 풀밭이 됐어요. 뵈기 싫으니까, 땅 주인이 인근 주민 B 씨한테 경작해 먹으라고 (농지를) 빌려줬어요.”
A 씨의 말은 이렇게 이어졌다.
“나는 땅 주인들(모녀 지칭)을 본 적 없어요. 서울에 사는 30대가 왜 경기도 여주까지 와서 매꼬자(밀집모자) 쓰고 농사를 짓겠습니까? 그 사람은 (농지를 보면) 자기 땅이 어디인 줄이나 알겠어요? 돈 되는 땅들은 죄다 서울 사람들이 갖고 있고, 실질적으로 농사 짓는 사람들만 돈 안 되는 땅 갖고 농사 짓는 거예요.”
직접 농사를 짓겠다는 모녀의 신고와 달리, “땅 주인이 직접 자경하지 않는다”는 마을 주민의 증언이 나온 상황. A 씨가 실제 경작자로 지목한 농업인 B 씨는 <셜록>과의 전화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땅 주인(김 씨 지칭)의 부탁을 받고 2021년 한 해 동안 (해당 필지 5곳을) 무상으로 빌려 고구마 농사를 지었습니다.“
누구든지 법률에 정한 경우 외에는 농지를 사용대할 수 없는데, 이를 위반하고 소유 농지를 무상사용하게 한 사람은 2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현행 농지법 제6조는 “농지는 자기의 농업경영에 이용하거나 이용할 자가 아니면 소유하지 못한다”고 자경 원칙을 못 박고 있다.
이를 어기고 거짓이나 부정한 방법으로 농지취득자격증명을 발급받을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해당 토지의 개별공시지가에 따른 토지가액에 해당하는 금액 이하의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
판사 남편과 아버지를 둔 모녀는 농지법 위반이 겁나지 않았던 걸까? 모녀는 한층 더 대담해졌다. LH 직원들의 농지를 이용한 땅 투기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작년 3월 이후에도, 이들은 부정행위를 이어갔다.
배우자 김 씨는 2021년 4월 15일 경기도 여주시 가남읍 심석리에 있는 필지 1곳 250㎡ 규모의 논을 7200만 원 주고 남동생으로부터 매입했다.
농지취득 관련 서류를 확인해보니, 이때도 김 씨는 ‘농지 취득 목적’에 ‘농업경영’을, ‘노동력 확보 방안’에는 ‘자기노동력’을 기재했다. 김 씨는 이미 소유 중인 농지의 ‘자경여부’를 묻는 문항에도 “예”라고 적었다.
판사 가족은 실제로 농사를 짓지 않으면서 거짓말로 농지취득자격증명서를 발급받은 것이다.
정 판사의 배우자 김 씨가 남동생으로부터 새로 논을 매입한 그날(2021년 4월 15일), 장녀 정 씨도 농지를 거래했다. 정 씨는 여주시 가남읍 심석리 소재 1982㎡ 규모의 밭(일부 분할)을 타인에게 3억2000만 원에 매도했다.
평당 매매가는 약 53만 원. 매입 당시 평당 23만 원을 고려하면 약 1년 만에 두 배 이상 오른 가격으로 판 것이다. 자경도 하지 않은 20대 청년이 농지 거래로 단기간에 큰 시세 차익을 얻은 셈이다.
하승수 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 변호사는 “정 씨가 애초에 외할머니로부터 농지를 매입할 때 유독 싸게 샀거나, 아니면 1년 후 농지를 되팔 때 시세에 비해 비싸게 팔았거나, 이 두 가지 가능성을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하 변호사는 “농사 지을 목적이 없는 사람이 농지를 매입해 다른 사람에게 경작을 맡겼다면 농지법 위반에 해당한다”면서 “사법부 소속 고위 법관의 가족들이 농지법을 위반한 상황에 대해 법관 당사자도 도의적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자는 시세차익 내용이 궁금해 정 판사 가족과 농지를 거래한 당사자들을 수소문했다. C 씨는 2020년 4월 모녀가 소유한 농지와 붙어 있는 4744㎡ 규모의 논을 정 판사 배우자 남동생 김 씨로부터 4억8000만 원에 매입한 인물이다. 그가 논을 매입한 시기는 모녀가 농지를 거래한 날짜(2020년 6월 30일)보다 두 달 더 빠르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C씨는 지난 2월 22일 기자를 만나 “평당 농지 매입 가격은 약 35만원이었다”고 밝혔다. 즉, C 씨는 본인보다 뒤늦게 거래한 모녀보다 더 비싼 가격에 농지를 매입한 셈이다.
기자는 반론을 듣기 위해 지난 2월 24일 배우자 김 씨의 자택을 찾았다. 아파트에 설치된 인터폰을 통해 김 씨와 대화를 나눴다.
– 소유 중인 경기도 여주시 가남읍에 위치한 농지에서 직접 자경을 합니까?
“네, 저희가 주말에 가서 농사 짓고 있어요.”
기자가 현장 방문으로 마을 주민의 ‘대리경작’ 확인했는데도, 김 씨는 “자경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 마을 주민이 대신 고구마 경작을 하고 있지 않나요?
“(작은 목소리로) 그런 적 없는데요.”
김 씨가 수화기를 내렸는지 인터폰이 뚝 끊겼다. 다시 인터폰으로 호출을 눌렀다. 격앙된 목소리가 스피커로 흘러 나왔다.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땅이라서 투기가 아니에요. 저희도 골치 아파서 괴로워하고 있는데 어쩌라고요! 제가 (농지를) 산 것도 아니에요.”
기자가 “해당 필지의 등기부등본에선 가족 간 매매로 기재되어 있다”고 말하자, 김 씨는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협의 하에 제가 동생한테 (농지를) 받은 거고, 기본적으로 상속으로 봐야하는 거예요. 제가 세금도 다 냈는데 어쩌라고요. 기자님이 (농지) 팔아주던가요. 왜 이렇게 따지고 드는 거예요. 도대체 어쩌라고요.”
기자는 같은 날 정 씨의 집도 찾아갔지만, 만날 수 없었다. 자택 우편함에 질문지를 남겼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정 씨에게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
고위공직자인 정선재 수석부장판사는 지난 3일 서울고등법원 공보판사를 통해 서면으로 입장을 전해왔다.
“정선재 부장판사의 가족은 ‘상속재산을 취득하여 정리’하기 위해 위와 같이 공동상속인으로부터 상속재산 중 일부였던 토지를 취득한 것으로 현재 취득한 토지를 조속히 매도하여 정리하고자 하나 현재까지 매도가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매도가 조속히 이루어지지 않는 등 불가피한 경우에는 영농하거나 한국농어촌공사에 위탁하여 임대하는 방안도 염두에 두었습니다.“
정 판사는 농업인 B 씨의 대리 경작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농지취득자격증명서를 발급해 준 여주시 가남읍 사무소 산업팀 담당자 D 씨는 3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지자체는 (당사자가) 농지를 취득할 때 작성한 서류 내용을 믿고 발급해주는 것이지 (위법성을) 미리 지레짐작해서 취득자격을 반려할 수는 없다”고 해명했다.
이어 D 씨는 농지법 위반 혐의가 발견된 농지 관련해서 “고발이나 민원이 접수될 경우 처분 명령 등 지자체에서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설명했다.
경자유전의 원칙이 헌법에 명시된 국가에서, 판사 가족마저 농지법을 쉽게 무시하는 현실. 어쩌면, 농지법 위반은 고위공직자들 사이에서 이미 보편적인 일인지 모른다.
전국 곳곳의 개발 정보를 이용해 농지를 사들인 LH 직원, 부친의 농지법 위반 혐의로 의원직을 사퇴한 국회의원, 투기 목적으로 농지를 취득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받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장모까지.
농지 투기를 당연하게 사회에서, 비농업인의 불법 농지 소유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까? <셜록>은 이 사안을 끝까지 추적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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