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 함영주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서울서부지방법원 형사4단독(박보미 판사)은 하나은행 신입사원 채용 과정에서 업무방해와 남녀고용평등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함영주 하나금융지주 부회장에게 지난 11일 무죄를 선고했다.
선고 직후 서울서부지법 308호 법정은 하나은행 관계자의 박수와 웃음소리로 채워졌다.
“저는 이럴 줄 알았습니다. 축하합니다”
법정을 찾은 20여 명의 관계자들이 함 부회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축제 분위기였다. 함 부회장은 검은색 양복 차림의 사람들에 둘러싸여 308호를 빠져 나갔다.
함 부회장은 2013년부터 2016년까지 하나은행장으로 일했다. 그는 2015, 2016년 하나은행 공개 채용 과정에서 점수 조작을 지시하는 등 업무방해 혐의 등으로 2018년 6월에 기소됐다.
그는 신입 사원 공개 채용 때 합격자 남녀 성비를 4대1로 맞추고, 일명 ‘SKY 대학’ 출신들에게 특혜를 주는 등 ‘하나은행 채용비리의 정점‘이란 혐의를 받았다.
4년을 끈 1심 재판에서 무죄를 받은 함 부회장은 “재판장님께서 현명하게 잘 판단해주신 부분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법원 앞에서 소감을 밝혔다.
함영주가 은행장으로 있던 시절, 하나은행에는 ‘장(長) 리스트‘가 따로 있을 정도로 채용비리가 조직적으로 벌어졌다. 은행장과 임직원 등이 추천한 사람을 정리한 ‘장 리스트’ 속 멤버들은 채용에서 특혜를 받았다.
이런 사정으로 하나은행 부행장, 인사부장, 인사팀장 등은 모두 유죄를 선고 받았다. 은행장 함영주에게만 ‘선택적 무죄‘가 떨어졌다. 박보미 판사는 정말 현명하게 잘 판단했는지, 지금부터 따져보자.
먼저 박 판사가 밝힌 함영주 무죄 논리를 보자.
“지원자 소OO, 서OO, 박OO에 관하여, 피고인(함영주)이 채용에 관한 청탁을 받아 인사부에 위 지원자들의 인적사항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추천한 사실을 자인하고 있기는 하나, 이를 넘어서서 피고인이 지원자들에 대한 심사 경과를 확인하는 등 적극적인 개입행위를 하였음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
은행장이 특정 인물 세 명을 추천한 건 맞지만 적극적으로 개입한 증거는 없다는 게 박 판사의 판단이다. 이번엔 일명 ‘장 리스트‘에 대한 박 판사의 논리를 보자.
“피고인(함영주)과 관련이 있다고 본 지원자에 대하여서도 추천리스트 ‘長’으로 표시한 경우가 있다는 것으로, 추천리스트의 ‘長’ 표시가 곧 ‘피고인이 추천하였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속단할 수 없는 점, 추천리스트 상 추천자 기재 부분에 그 자체로 오류가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점 등에 비추어 보면 (중략) 위와 같이 단편적이고 개괄적인 진술만으로 위 지원자들에 대한 심사 경과 확인 내지 보고하는 구체적인 정황을 인정하기는 어렵다.”
‘장 리스트’ 중 특정 인물 이름 옆에 정말 ‘長’이 적혀 있지만, 정말로 함영주가 추천했는지 믿을 수 없다는 논리다. 지금부터 검찰 공소장과 부은행장-인사부장에게 유죄를 선고한 판결문을 토대로 하나은행에서 어떤 식으로 부정한 채용이 진행됐는지, 함영주에겐 정말 죄가 없는지 살펴보자.
함영주 하나은행장은 2015년 9월, 국민은행 서아무개 지점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가 함영주에게 말했다.
“우리 아들이 하나은행 공채에 지원했으니 잘 봐주세요.”
함영주는 하나은행 인사부장 송OO에게 말했다.
“(국민은행 지점장 아들) 서OO 잘 좀 살펴보세요.”
비슷한 시기, K기업을 운영하는 소아무개 씨도, 함영주에게 연락을 했다.
“조카가 하나은행에 지원했으니, 잘 좀 봐주세요.”
함영주는 다시 송 부장을 불러 공채 지원자 소OO의 인적사항을 알려주면서 “잘 살펴보라“고 말했다. 은행장의 지시가 어떻게 실행됐는지는 판결문에 자세히 나온다.
“송OO은 ‘잘 살펴보라‘는 피고인(함영주)의 지시를 오OO (인사팀장)에게 알려주면서 관리하게 하였고, 오OO은 피고인을 비롯한 하나은행 임원들의 채용 추천을 정리하여 관리하는 채용 추천리스트 위 소OO, 서OO의 인적사항, 수험번호 등과 함께 추천자를 ‘長’으로 기재하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2015년 공채 1차 관문인 서류 전형에서 탈락했다. 그러자 송OO 인사부장은 오 팀장을 불러 지시했다.
“(추천) 리스트에 기재된 지원자들은 서류심사에 탈락했더라도 큰 문제가 없으면 다음 전형으로 올려.”
소OO, 서OO은 기사회생했다. 공소장에는 “송 부장이 서류전형 합격자 결과 등을 함영주에게 보고하여 승인 받았다“고 나온다. 이후 합숙면접, 임원면접에서도 함영주는 특정 지원자들을 언급하며 “잘 살펴보라“고 지시하고, 송 부장-오 팀장은 실행-보고하고 결재 받기를 반복했다.
이듬해인 2016년 공채에서도 함영주 은행장은 일부 지원자를 추천했다. 그러면 인사부 간부와 직원은 작년과 비슷한 패턴으로 지시를 따랐다. 하나은행의 ‘長’ 답게 함영주는 이래라 저래라 길게 지시하지 않았다.
“잘 살펴보라.”
이 한마디면 모든 게 일사천리였다는 게 검찰 수사 결과다. 박보미 판사는 이런 함영주 은행장의 지시에 대해 “구체적 정황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함영주는 특정 지원자의 인적사항을 인사부에 전달하며 추천한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추천 이후 함영주가 전형별 합격-불합격에 개입한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추천은 했지만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논리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건, 함영주의 지시를 받고 움직인 인사부 직원들에 대한 법원 선고다. 지난달 14일 서울서부지법 형사항소 1-3부(정계선 부장판사)는 송OO 인사부장과 오OO 인사팀장 등 전직 인사담당자 4명에게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유죄를 선고했다. 1심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사건에서 결정권 없는 직원들은 유죄, 최고 책임자에겐 무죄가 나온 것이다. 함 부회장의 남녀평등고용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도 박보미 판사는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판결문의 한 대목을 보자.
“피고인(함영주) 등이 (당시 인사부장) 송OO에게 ‘전체적인 인원 비가 남성이 많이 부족하니 남성을 많이 뽑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한 바 (중략) 피고인이 인사에 관한 의사결정자 지위에서 성비 불균형 해소의 필요성을 피력하였다고 볼 수는 있다.”
박 판사는 남자를 많이 뽑아야 한다는 함영주의 지시를 남녀차별 조장이 아닌 “성비 불균형 해소“로 봤다. 다음 대목을 보자.
“위와 같은 하나은행의 채용 방식은 (중략) 적어도 10년 이상 지속되어 왔고 (중략) 은행장들의 의사결정과 무관하게 하나은행 인사부 내부적으로 전승되어 온 지침에 의하여 관행적으로 이루어져 왔던 것으로 보이고..”
한마디로 10년 이상 지속된 하나은행의 ‘남성 특혜 채용’은 관행이란 의미다. “남성을 많이 뽑아야 한다“라는 함영주의 지시를 성비 불균형 해소로 본 것과 앞뒤가 맞지 않는다.
어쨌든 관행대로 한 함영주 은행장은 남녀평등고용법 위반 혐의도 벗었다. 법인 하나은행에게만 벌금 700만 원이 선고됐다. ‘남녀 4대1 비율 채용‘은 은행장이 아닌 기업탓이라는 결론이다.
금융정의연대 등 시민단체는 “사법부가 이번 판결에서 직접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책임자인 은행장의 위력’을 인정하지 않는 궤변을 또다시 펼치면서, 채용비리 행위를 단죄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한 셈”이라고 지난 15일 성명서를 통해 비판했다.
은행권 채용비리 사건에서 ‘직원들은 유죄 – 은행장은 무죄’ 사례는 이번이 처음 아니다.
신한은행 채용비리 사건 때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조용병 전 신한은행장도 서울고등법원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기사 보기 – “상위 대학 출신이면..”) 서울고등법원은 같은 혐의로 기소된 윤OO 신한은행 전 부행장과 김OO 신한은행 전 인사부장 등 인사부 직원들에겐 유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함 부회장의 1심 무죄 판결에 불복해 지난 18일 항소장을 접수했다.
한 가지 사실을 덧붙이고 싶다. 2015년, 하나은행 ‘장 리스트’에 등재돼 공채 과정에서 특별 관리를 받은 인물은 총 95명. 은행장 추천 인물, 임직원 자녀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이들 중 자력으로 서류전형에 합격한 사람은 17명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