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법정에 섰다.
“피고인은 피해자(아들)가 잠에서 깨어 칭얼거리자, 피해자를 키우는 것에 대한 부담감과 미래에 대한 절망감으로 인해 피해자를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하기로 마음먹고, 양손으로 피해자를….”
3월 2일 새벽 엄마가 한 일을 검사가 읊자, 얼굴을 가린 엄마의 두 손 사이로 눈물이 떨어졌다. 울음소리가 법정에 퍼졌다. 방청석엔 엄마의 가족이나 지인은 없었다. 기자 5~6명이 전부였다.
재판이 이어지는 7분 동안 엄마는 고개 한 번 들지 않았다. 지난 4월 6일 수원지방법원에서의 일이다.
‘장애 자녀 살해한 비정한 엄마’
여러 언론은 3월 2일 벌어진 일을 이런 제목으로 보도했다. <셜록>은 3월 말부터 엄마의 진짜 모습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엄마와 아들이 수원시 장안구 OO동 파란색 대문의 반지하 주택으로 이사온 건 작년 10월이었다. 이삿짐 트럭에 실려온 두 사람의 살림은 유난히 적어서 오히려 눈에 띄었다.
“짐 싣고 온 작은 트럭에 자리가 텅텅 남더라구요. 따로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이삿짐센터 일꾼 한 명이랑, 엄마, 아기 이렇게만 있었어요.”
주택 건너편에서 미용실을 하는 A 씨는 새 이웃을 ‘텅 빈 트럭’으로 기억했다.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는 20만 원, 볕이 잘 들지 않는 방 두 칸 14평 반지하 집. 엄마 이효린(가명. 81년생)과 아들 이태우(가명. 8세)의 새 거처였다.
효린 씨 집 바로 옆은 과일가게,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시장이 있다. 집에서 2분만 걸으면 OO주민센터, 여기서 다시 1분만 걸으면 초등학교다. 기자가 이 동네를 처음 찾은 날은 3월 22일 오전. 과일가게 문을 먼저 두드렸다.
“여기 바로 옆에 사는 이효린 씨라고….”
과일가게 주인은 모른다며 고개를 저었다. 대신 그는 동네 소식통을 알려줬다.
“저기 건강원 언니가 모르면, 이 동네 사람들 다 모른다고 봐야지. 저기가 이 동네 소식통이야.”
동네 정보 집결지답게 주민 네 명이 건강원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동네 소식통은 효린 씨와 태우를 몰랐다. 엄마와 아들을 조금이나마 기억하는 건 미장원 주인 A 씨였다.
효린 씨가 미는 유모차에 앉은 태우는 미용실 앞을 지날 때면 종종 어눌한 말로 엄마를 보챘다.
“강아지… 강아지…”
태우가 흥분해 팔다리를 흔들면 엄마는 잠시 유모차를 세웠다. 태우는 미용실 유리문에 얼굴을 바짝 대고 A 씨가 키우는 강아지 ‘도담이’를 보며 웃었다. A 씨는 미용실 안에서 유리문 밖 태우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말했다.
‘아이고… 저 아이 키우려면 엄마가 참 힘들겠네.’
이효린 씨는 아버지 직업을 따라 전국을 다니며 유년과 청소년기를 보냈다. 수원에서 고교를 다닐 때 아버지가 사망했다. 효린 씨가 고교를 졸업할 즈음, 엄마는 새 남자를 만났고 오빠는 공장 기숙사로 떠났다. 원래 가진 게 별로 없던 가족은 나눠 가진 것도 없이 뿔뿔이 흩어졌다.
효린 씨는 스무살 무렵부터 혼자 삶을 꾸렸다. 주로 식당에서 일하며 원룸에서 살았다. 수원시 한 고기뷔페 식당에서 일하던 2013년, 효린 씨는 남성 직원 권OO 씨와 연애를 하며 동거를 시작했다. 3개월 쯤 지난 어느 날 저녁, 효린 씨는 권 씨에게 임신 사실을 알렸다.
“나 잠깐 볼일 좀 보고 올게.”
권 씨는 이 말을 남기고 원룸을 나갔다. 그러곤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 문자메시지, 카카오톡.. 권 씨는 모든 연락에 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관계가 끝났다. 뱃속의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어느 날, 병원 의사가 말했다.
“아이한테 장애가 있습니다.”
주변에서 난리가 났다. 소식을 들은 오빠(79년생)가 전화통화로 말했다.
“애 아빠도 없는데 어떻게 혼자 낳아서 키우려고 그래. 지우거나 입양 보내자.“
효린 씨는 아이를 낳아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산부인과가 제시한 임신중절 수술비 ‘현금 150만 원’도 없었다. 효린 씨는 아이를 지우지 않고 지켰다.
배가 많이 부르기 시작한 7~8개월 무렵부턴 식당에서 일 할 수 없었다. 아이를 지키자 생활이 무너졌다. 당장 원룸 월세를 밀리기 시작했다. 집주인은 인정사정 없었다. “월세 안 내면 열어 줄 수 없다”며 방문을 잠가 버렸다.
부른 몸의 효린 씨는 오갈 데 없어졌다. 노숙인처럼 수원의 어느 건물 계단에 쭈그려 앉아 밤을 보냈다. 견디기 힘든 시간이면 10여년간 만난 적 없는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효린 씨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효린 씨의 엄마 김혜숙(가명. 60년생)은 남해바다가 보이는 경남의 어느 시골마을 식당에서 먹고 자며 일하고 있었다. 손님 밥 식을까봐 열심히 쟁반 나르다 딸의 전화를 받은 그 순간을 엄마는 지금도 기억한다.
“효린이가 하는 말이.. (울먹) 배가 많이 불렀는데 잘 데가 없다고.. (울먹) 돈이야 당연히 없고.. 전화기 충전기도 없어서.. 방전되기 전에 엄마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 했다고.. (울먹) 지가 그렇게 힘들면 ‘엄마, 좀 도와줘’ 이렇게 말이라도 하든가.. 그런 말은 안 하고, 나한테 잘 지내냐고 묻고.. (울먹)”
효린 씨는 인천의 한 미혼모 시설로 향했다. 2014년 4월 21일, 아들 이태우가 태어났다. 태우는 다운증후군이었다. 효린 씨는 자신의 처지와 아이 미래를 생각해 입양을 추진했다. 하지만 모든 게 불발로 끝났다.
아이는 느리게 자랐다. 법적 나이는 2022년 기준 9세였지만, 정신-사회적 연령은 한 살 수준이었다. 체구도 작아 3~5세용 유모차를 탔다. 똥과 오줌을 가리지 못해 기저귀를 찼다. 24시간 양육과 돌봄을 효린 씨 혼자 맡았다.
태우에겐 심한 분리 불안이 있었다. 늘 엄마만 찾았다. 효린 씨는 8년 내내 샴쌍둥이처럼 태우와 붙어 지냈다. 개인 생활은 사라졌고, 모든 사회 관계도 끊겼다. 오래전부터 우울증을 앓았다. 효린 씨가 재판부에 낸 반성문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아이를 유치원 등 시설에 보내기도 했지만, 엄마를 찾으면서 소리를 지르는 등 난동을 부려 퇴소 됐습니다. 결국 온종일 제가 케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효린 씨는 기초생활수급자로 국가 지원을 받았다. 기초생계급여, 장애아동수당, 한부모 가정에게 지급되는 양육수당 등 월 160만 원을 국가로부터 받았다.
효린 씨는 좀처럼 밖에 나가지 않았다. 필요한 물건은 주로 택배로 주문했다. 집밖을 나설 땐 꼭 모자를 썼다.
“애를 참 잘 챙겼어요. 겨울에 외출할 때면 애가 혹시 감기라도 걸릴까 봐 모자에, 목도리에, 장갑에 하여간 몸에 두를 수 있는 건 다 입혀서 나왔어요. 근데… 사람을 안 만나. 뭐하나 싶어서 보면, 분명 집안에 있는데 불을 꺼 두고 살았어요.”
윗집에 거주한 집주인 신형섭(가명. 74세) 씨는 효린 씨가 의아했다. 효린 씨는 기초생활수급자여서 전기-수도세를 낼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효린 씨 집은 낮이나 밤이나 늘 어두컴컴했다. 좀처럼 불을 켜지 않았다.
이른 저녁, 안방에서 태우가 잠들면 효린 씨는 작은방으로 건너가 어둠 속에서 웅크려 지냈다. 어차피 만나는 사람은 없고, 찾아오는 이도 3~4개월에 한 번 오는 오빠가 전부였다. 지난 6월 22일 경남의 한 시골에서 만난 효린 씨의 모친 김혜숙 씨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임신 하자마자 아이 아빠한테 버림받은 뒤부터, 효린이는 세상과 담을 쌓은 거 같았어요. 가끔 전화오면 울면서 ‘힘들다.. 외롭다.. 막막하다..’ 이런 말만 하고, 이 세상에서 자기를 지워 없애버리는 것처럼 살았어요.”
사회적으로 고립된 채 반지하집 어둠 속에서 지낸 효린 씨는 2월 말, 아들을 죽이고 자기도 죽겠다고 결심했다. 효린 씨 1심 판결문에는 당시 상황이 적혀 있다.
“피고인은 장애를 가진 피해자(아들 태우)를 홀로 키우면서 받았던 신체적, 경제적 고통과 자신의 신변에 대한 비관, 미래에 대한 막막함으로 인해 더 이상 피해자를 키우기 힘들다고 생각해 피해자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을 하기로 결심했다. 2022년 2월 28일 피해자와 자신의 사망신고서를 작성하기까지 하였으나 차마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실행은 유예됐을 뿐,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 그날 효린 씨는 밀린 숙제라도 하듯이 공기청정기와 검은색 겨울 외투, 바지를 샀다. 나라에서 받은 돈을 아껴 모은 수백만 원도 현금으로 몽땅 찾았다.
엄마에게 보낼 선물이었다. 돌아보니, 가끔 통화만 했을 뿐 20년간 엄마 얼굴을 못봤다. 효린 씨는 선물을 포장할 때 손편지를 써서 그 안에 넣었다.
많은 사람이 새출발을 하는 3월 2일 새벽 5시, 태우가 잠에서 깨 울었다. 몇 시간 뒤면 태우는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느리게 자라는 아이 태우가 드디어 학생이 된다. 엄마 효린 씨는 태우를 두 팔로 안았다.
효린 씨는 그 상태로 아이를 눕히고 큰 베개로 얼굴을 눌렀다. 약 10분간 아이를 끌어 안았다. 버둥거리던 태우는 곧 잠잠해졌다. 효린 씨는 집밖으로 나가 독한 세제를 사왔다. 이제 자기 차례였다. 모든 준비를 마친 효린 씨는 아이 옆에 잠시 웅크렸다.
세상이 밝아왔다. 반지하 집에도 잠시 빛이 들어왔다. 남해바다가 보이는 김혜숙 씨의 집에 효린 씨가 보낸 소포가 도착했다. 편지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엄마 미안해.”
나머지는 효린 씨 집 주소와 현관문 비밀번호가 전부였다. 김혜숙 씨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곧바로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효린이 집에 좀 빨리 가봐라. 얼른! 걔가 전화를 안 받는다.”
오후 5시, 누군가 효린 씨 집 문을 두드렸다.
“OO초등학교에서 나왔습니다! 아이가 입학식에 오지 않아서요.”
효린 씨는 문을 열지 않았다. 아이 옆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학교 관계자는 돌아갔다. 오후 7시, 오빠 연락을 받고 출동한 경찰이 문을 두드렸다. 효린 씨는 문을 열었다. 경찰은 침대에 누워 있는 아이를 살폈다.
“제가… 아들을 죽였습니다.”
태우는 학생이 되지 못했고, 좋은 엄마를 꿈꾼 효린 씨는 살인자가 됐다. 효린 씨는 현장에서 체포됐다. 공판이 세 차례 진행되는 동안 효린 씨는 한 번도 얼굴을 들지 않았다. 캄캄한 반지하 집에서처럼 자신을 감추고 싶어 했다.
효린 씨는 재판부에 낸 반성문에 이런 내용을 적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도 선처해 주신다면, 평생 식당에서 설거지 하면서 반성하며 조용히 살겠습니다.”
시골 식당에서 일하는 효린 씨 엄마는 재판부에 편지로 탄원서를 보냈다.
“저는 돈 700원이 없어서 국민핵교도 졸업 못했슴미다. 글씨가 틀려도 이해 부탁드립니다. 제가 먹고 사는 게 힘들어 딸래미가 어떡케 사는지 돌보질 못했습니다. 딸이 이런 짓을 저지른 건 제 탓도 있습니다.”
효린 씨는 최근 엄마에게 편지를 써 “어려운 부탁”을 하나 했다.
“엄마, 태우가 날마다 꿈에 나오네. 태우가 바나나 우유를 좋아했어. 엄마가 나 대신 납골당에 있는 태우한테 바나나 우유 하나만 사다 줄 수 있을까?”
김혜숙 씨는 오랜만에 식당에서 벗어나 길을 나섰다. 경상도 끄트머리 어느 KTX역 편의점에서 바나나 우유를 하나 샀다. 그걸 들고 수원의 한 납골당을 찾았다. 할머니 김혜숙은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준 적 없는 손자 이태우의 납골함 앞에서 바나나 우유를 들고 엉엉 울었다.
“나 때문이다… 내가 잘못해서 네가 죽었구나… 미안하다.”
태우 엄마 이효린은 “모든 건 내 잘못”이라고 얼굴을 들지 못했고, 이효린의 엄마 김혜숙은 “다 나 때문”이라며 고개 숙여 울었다. 둘은 남 탓을 하지 않았다.
수원지방법원 형사11부(재판장 신진우)는 지난 17일 피고인 이효린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양형이유를 통해 공동체의 책임을 지적했다.
“피고인과 같은 장애아동을 양육하는 부모가 극단적인 결심에 이르기까지 우리 공동체의 안전망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는지 성찰하지 않을 수 없는 점 등을 감안한다.”
검찰은 “죄에 형이 너무 가볍다”며 항소했다. 검찰은 결심공판에서 피고인 이효린에게 징역 15년을 구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