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돌 만 신문지에 라이터 불을 대자 금방 불이 붙었다. 휘발유 뿌린 40X호 거실 겸 부엌에 신문지를 던지자 불길이 사방으로 퍼졌다. 남자의 눈동자가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새벽 4시의 하늘은 어스름하게 파랬다.
남자는 신발이 어지럽게 놓인 현관 앞에서 집안을 태우는 불길을 잠시 지켜봤다. 열기를 느낀 그는 현관문을 열어둔 채 밖으로 나갔다.
복도식 아파트 끄트머리 비상계단으로 걸어가면서 남자는 크로스백에 넣어 둔 칼 두 자루를 꺼내 들었다. 칼날 긴 회칼은 왼손에, 날이 짧은 장어 칼은 오른손에 쥐었다.
‘위층에 사는 여자 두 명, 4층에 사는 그 노인 부부, 바로 옆집 일가족・・・.’
이들을 떠올리니 칼 쥔 양손에 힘이 들어갔다. 남자가 비상계단을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갈 때, 화재경보기 소리가 아파트를 흔들었다.
2층 주민 채희식(가명)은 그 소리에 눈을 떴다. 현관 밖 복도는 이미 놀란 이웃들의 대피로 정신이 없었다. 채희식도 초록색 불빛을 따라 비상계단으로 뛰었다. 한 층만 내려가면 안전지대인데, 계단 입구에서 몸이 얼었다.
“왜 이러세요!”
2층과 1층 사이 비상계단에서 한 여자가 주저앉아 외쳤다. 양손에 칼을 쥔 남자가 여자 앞에 서 있었다. 남자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살려주세요!”
주저앉은 여자 옆에서 또 다른 사람이 울부짖었다. 칼 쥔 남자는 고개를 돌려 채희식을 노려봤다.
“야 이 새X야, 내려와. 빨리 못 내려와!”
채희식은 몸을 돌려 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문을 잠갔다.
“경찰이죠? 칼부림이 났어요. 빨리 와 주세요!”
새벽 4시 32분 119, 112에 신고를 했다. 작은방 복도 쪽으로 난 창문으로 바깥을 살폈다. 비상계단 쪽으로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채희식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화재경보기 소리는 계속 아파트를 흔들었다. 어떻게든 탈출해야 했다.
몇 분 후, 채희식은 현관문 안전고리를 건 채 현관문을 살짝 열어 밖을 살폈다. 그 문틈 사이로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너 이 새X, 나와! 빨리 나와!”
저 목소리, 저 얼굴… 누군지 떠올랐다. 2018년 11월, 주민센터에서 주선한 일자리에서 만났던 사람. 5개월 전, 상추 비닐하우스에서 일주일간 함께 일했던 40X호 그 남자다.
채희식이 목격한 여성 피해자 둘은 남자의 집 바로 위 5층에 사는 주민이었다. “살려달라“고 외친 사람은 지체장애인 최실화(가명. 당시 19), 주저앉은 사람은 그의 숙모 강선정(가명. 당시 54)이다. 채희식이 집으로 몸을 피한 후, 칼에 찔린 강선정은 겨우 비상계단을 내려가 아파트 밖으로 탈출했다.
“내 딸이 칼에 찔렸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강선정은 옆구리를 부여 잡고 소리쳤다. 어느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경비실을 몇 발자국 앞둔 쓰레기 분리수거장에서 강선정은 쓰러졌다. 옆구리에서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최실화는 2층 복도로 도망쳤다. 장애로 걸음이 느린 최실화 뒤로 남자가 쫓아왔다. 그는 2층 복도 소화전 앞에서 최실화를 공격했다. 이후 그는 1층부터 4층까지 비상계단을 오르내리며 이웃주민 3명을 더 공격했다.
새벽 4시 33분, 남자는 3층을 지나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차문홍(가명, 당시 41세)과 딸 금이정(가명, 당시 12세)을 마주쳤다.
“이, 시XX아!”
남자는 순식간에 금이정을 공격했다. 그녀의 비명이 계단을 흔들었다. 엄마 차문홍이 남자 앞으로 뛰어들었다.
“왜 이래요!”
남자 키는 175cm로 건장했다. 그는 딸을 보호하는 엄마마저 공격했다. 손녀의 비명을 들은 할머니 김계선(가명, 65세)이 뛰어왔다. 남자는 할머니마저 가만두지 않았다. 비상계단이 딸, 엄마, 할머니의 피로 젖었다.
흥분한 남자는 비상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헐레벌떡 계단을 내려오는 노부부와 마주쳤다.
‘이 노인들 드디어 만났네… 나를 두고 이상한 사람이네, 몹쓸 사람이네 소문내던・・・’
계단을 내려오던 황윤수(가명, 당시 74세)와 김이서(가명, 당시 72세)는 같은 층 이웃 남자를 보고 멈췄다. 남자 손에서 칼을 본 황윤수는 아내 김이서를 뒤로 보냈다. 남자는 황윤수의 목과 어깨를 공격하고 넘어진 그의 얼굴을 밟았다.
김이서는 계단을 뛰어올라 승강기를 탔다. 3층에서 탄 승강기는 2층에서 멈췄다. 문이 열리자 칼 든 남자가 서 있었다. 김이서는 승강기 안에서 뒷걸음질 쳤다. 남자는 양손에 칼을 들고 다가갔다.
새벽 4시 37분 35초, 주민들의 잇단 신고로 출동한 두 경찰이 장봉을 들고 비상계단을 이용해 아파트로 들어왔다.
1초가 흐른 4시 37분 36초, 남자는 흉기로 김이서를 공격하고 8초 뒤 복부를 발로 찼다. 김이서는 뒤로 넘어졌다.
“너희들 뭐야, X발. 너희들이 왜 왔어!”
남자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두 경찰에게 외쳤다. 양손의 칼을 본 경찰 류OO은 장봉 대신을 권총을 꺼냈다.
“칼 버려!”
남자는 권총과 류OO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니는, 내가 딱 기억한다.”
“칼 버리라고!”
동료 경찰이 재차 소리쳐도 남자가 칼을 버리지 않자, 류OO이 방아쇠를 당겼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선 남자가 크게 소리로 외쳤다.
“이 새X들아, 공포탄인 거 다 안다!”
경찰 두 명이 더 도착했다. 그 중 한 명이 남자에게 테이저건을 쐈지만, 크로스백을 뚫지 못했다. 남자는 경찰에게 칼을 던졌다. 순경 백OO이 비상계단 철문으로 칼을 막았다. 백OO은 다시 공포탄을 쏘며 다가갔다.
“공포탄 백날 쏴 봐라!”
류OO이 실탄을 발사했다. 허벅지를 겨냥한 실탄은 빗나갔다. 그때서야 남자는 남은 칼 한자루를 바닥에 던졌다.
새벽 4시 50분께, 경찰 네 명이 남자의 양 팔을 붙잡고 경찰차에 태웠다. 차 안에서 경찰 류OO이 “왜 사람을 죽였냐“고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경찰에게 되물었다.
“국정농단 사태 때 느그들은 뭐 했냐?”
남자는 5명을 살해하고 17명에게 상해를 입혔다. 2019년 4월 17일 새벽에 벌어진 일이다.
“이웃이 독충을 보낸다” “누군가 집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했다” “이웃이 한통속으로 나를 욕했다“는 망상에 빠져 자기 집에 불을 지르고 대피하는 이웃 주민을 칼로 찌른 이 남자는 안인득(당시 42세)이다. 안인득은 조현병을 앓았지만 스스로 치료를 중단한 상태였다.
진주 방화・살인 사건 가해자 안인득은 살인 및 상해 혐의(살인미수 포함) 등으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항소심에선 그의 심신미약 상태가 인정돼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2020년 10월, 대법원은 무기징역을 확정했다.
진주 방화・살인 사건이 다시 법정에 올랐다.
안인득에게 딸 금이정과 어머니 김계선을 잃은 금대훈(가명, 46)을 비롯한 유가족 및 피해자 4명은 지난해 10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걸었다.
이들은 “안인득 범죄 뒤에는 경찰의 중대한 과실이 있다“고 지적한다. 아파트 주민들은 사건이 벌어진 2019년 4월 17일 이전에 안인득을 수차례 경찰에 신고했다. 하지만 실효성 있는 조치는 없었다. 남을 해칠 우려가 컸던 ‘고위험 정신질환자’ 안인득은 경찰과 국가의 방치 속에서 살인을 저질렀다.
유가족의 법정 대리인 오지원 변호사(법과 치유)는 국가에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한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안인득은 아파트에 이사한 후 주민들이 자신을 욕하고 괴롭힌다는 망상을 갖게 됐습니다. 인근 주민들의 집 현관에 똥을 칠하거나 오물을 뿌리거나 출근하는 주민에게 계란을 던지는 등 이상행동을 반복했습니다. 이에 주민들이 경찰에 수차례 신고를 했지만 경찰은 모두 관련 법령과 매뉴얼상 요구되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단순히 계도, 종결처리하였습니다.”
안인득의 이상행동을 경찰에 신고했던 사람도 살해됐다. 피해자들이 국가배상을 청구한 건 돈 때문이 아니다. 돈으로 죽은 사람을 살릴 수도 없다.
공권력의 과실이 쌓이면 결국 시민이 죽거나 다친다. 국가의 잘못을 따지고, 문제를 바로 잡아야 비극이 반복되지 않고 좀 더 안전한 사회가 된다. 진주 방화・살인 사건 피해자들이 트라우마 속에서 소송을 시작한 이유다.
경찰 등 공권력은 어떤 잘못을 했는지, 결국 누가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이제부터 하나씩 살펴보고자 한다. 아픈 기억은 잘못이 바로 잡힐 때 비로소 치유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