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의 시간으로 5년은 짧았을까. 3선의 윤영석 국회의원(국민의힘, 경남 양산시갑)이 5년 전과 똑같이 표절 용역보고서로 혈세 수백만 원을 낭비한 사실이 확인됐다.
윤 의원이 2020년 발간한 연구용역 보고서는 본인 지역구 언론사가 연구 책임을 맡았는데, 출처와 인용 표기 없이 자사가 과거 작성한 기사를 그대로 베꼈다. 쉽게 말해, ‘자기표절’이다.
하지만 윤영석의원실은 “자기표절도 문제가 될 줄 몰랐다, 억울한 측면이 있다”면서, 오히려 “(연구책임자의 노고를 고려하면) 무궁무진한 값어치가 있는 용역보고서”라고 해명했다.
지난 2017년에도 표절 연구용역 보고서로 국민 혈세를 낭비했다는 지적을 받은 바 있는 국회의원이 또 다시 ‘자기표절’로 얼룩진 엉터리 보고서를 발간한 것도 모자라, 도리어 억울함까지 호소하는 상황.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윤 의원이 발간한 연구용역 보고서에서 뻗어나온 문제들을 다섯 가지 키워드로 정리해봤다.
[키워드①] 어처구니
어처구니없다 : 일이 너무 뜻밖이어서 기가 막히는 듯하다.(표준국어대사전)
기자가 열린국회정보(open.assembly.go.kr) 사이트에 공개된 윤 의원의 연구용역 보고서를 확인했을 때, 딱 이런 기분이었다. 윤 의원의 연구용역 보고서는 겨우 9쪽에 불과했다. 다른 의원들의 연구용역 보고서와 비교했을 때 5분의 1 수준의 분량이었다.
윤 의원은 2020년 5월 본인 지역구에 있는 A 언론사에 정책연구용역을 맡겼다. 국회의원들은 입법 역량 개발을 위해 국회 예산인 ‘입법 및 정책 개발비’를 활용해 정책연구용역을 수행할 수 있다. A 언론사는 <양산시 상북면과 하북면 항일독립운동 스토리텔링 사업>을 주제로 연구용역을 진행하고 보고서를 작성했다.
해당 보고서의 표절 여부를 살펴본 결과, 전체 9쪽 중 7쪽을 자사 과거 기사 3개로 채웠다. 표절 심의 사이트 ‘카피킬러’를 통해 검증해보니 표절률은 75%를 기록했다.
편집 수준도 상당히 떨어졌다. 표절에 해당되지 않은 결론 부분에서는, 사진 두 개가 겹쳐지면서 글자를 읽을 수 없게 되기도 했다. 전체 보고서 9쪽 중 8쪽을 표절 등 부실한 내용으로 채운 것이 확인됐다.
그런데, 더 어처구니없는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이 같은 문제에 대한 윤영석의원실에 반론을 요청했는데, 해당 보고서는 ‘진짜’ 보고서가 아니라는 답이 돌아왔다.
윤영석의원실은 지난 9월 29일 기자와 한 통화에서 “수정본이 아닌 초고가 열린국회정보 사이트에 잘못 올라가서 혼선이 빚어졌다”는 취지로 해명했다. 그리고 같은 날, 25쪽짜리 용역보고서 수정본을 기자에게 새롭게 보내줬다.
“수정본이 열린국회정보 사이트에 올라간 줄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교체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래된 일이라 사무실 직원이 바뀌고 해서 누군가의 실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셜록>의 취재가 진행되지 않았더라면, 윤영석의원실은 보고서 초고가 사이트에 잘못 올라가 있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을 거란 의미다. 심지어 보고서 초고에는 책임연구원이 누군지도 밝혀져 있지 않았다. A 언론사가 해당 연구용역을 진행했다는 사실은 <셜록>이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확인한 사실이다.
[키워드②] 재활용
<셜록>은 윤영석의원실에서 새롭게 보내준 25쪽짜리 연구용역 보고서의 표절 여부를 다시 검증했다. 먼저 ‘카피킬러’를 통해 검사한 결과, 수정 보고서도 표절률 63%를 기록했다.
보고서 3~5쪽의 ‘개별인물 고찰’ 부분에서 독립운동가 김철수에 대한 내용은 2019년 2월 12일자 자사 기사 <1919년 독립선언 만세운동 봉홧불을 올린 양산의 독립운동가 김철수>를 그대로 베껴왔다.
독립운동가 윤현진에 대한 부분(보고서 6~8쪽) 역시 2016년 6월 21일자 자사 기사 <조국독립 꿈꾸며 불꽃 같은 삶 살았던 아름다운 청년>으로 채웠다.
보고서 9~10쪽 ‘신평만세운동과 통도사 관련 인물’ 부분 또한 2019년 7월 2일자 <역사는 의미를 되새기는 작업, 기억하지 않으면 의미도 없다>는 자사 기사를 그대로 옮겨왔다.
즉, 25쪽 중 8쪽은 연구용역 보고서 초고와 마찬가지로 출처와 인용 표기도 없이 과거 자사 기사를 그대로 베껴온 수준이었다. 한마디로, ‘자기표절’ 문제다.
표절에 해당되지 않는 나머지 부분도 내용 면에서 부실했다. 해당 보고서가 ‘스토리텔링 사업’으로 제안한 사업은 이미 양산시장이 2019년 제시한 내용을 따온 수준이다.
김일권 당시 양산시장은 2019년 3월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경남 양산시 ‘하북면’을 ‘하북만세면’으로, ‘상북면’을 ‘상북독립면’으로 각각 지명을 변경하자는 의견을 제안한 바 있다.
또한 ‘상·하북면 스토리텔링 사업’ 부분에 새롭게 추가된 4쪽은 오직 현장 사진과 한 줄 이하의 설명만으로 채워졌다.
이후 분량은 ‘참고자료’라는 이름으로 8쪽이 추가됐다. 표절 부분을 제외한 본문과 동일한 쪽수다. 이마저도 보고서는 다른 언론매체 기사와 행사 현장 사진으로 쪽수를 채웠다.
[키워드③] “억울함”
윤영석의원실의 입장은 한마디로 “억울함”이었다.
의원실은 “(보고서에 들어간 과거 기사는) A 언론사가 다 직접 취재했던 내용이고 그걸 바탕으로 스토리텔링 사업을 하기 위한 코스를 개발한 것”이라면서, “표절이라고 하면 남의 지적재산권을 무단으로 도용하는 걸로 생각하는데 (그에 비교했을 때) 자기표절은 문제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억울한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자기표절’에 관한 연구윤리상 문제는 명확하다. 국무총리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가 발간한 <국책연구기관 연구윤리 평가규정 및 사례(2020)>에선 “연구의 독창성을 해할 정도로 자신의 이전 저작물을 이후 자신의 저작물에서 부적절하게 사용하는 ‘중복게재’를 연구부적절행위”로 규정한다.
여기서 ‘중복게재’는 자신이 이미 발표한 저작물의 일부를 출처를 밝히지 않고 다시 활용하는 ‘자기표절’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교육부 훈령 ‘연구윤리 확보를 위한 지침’ 역시, 연구자가 자신의 이전 연구결과와 동일 또는 실질적으로 유사한 저작물을 출처 표시 없이 게재한 후 연구비를 수령하는 등의 부당한 이익을 얻는 행위를 ‘부당한 중복게재’로 보고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최근에도 박순애 전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자신이 쓴 논문 한 편을 제목만 바꿔 여러 학회지에 중복 게재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비판받은 바 있다. 박 전 장관이 1999년과 2002년에 각각 출판한 논문이 나란히 자기표절로 드러나자, 담당 학회는 박 전 장관에게 2011년과 2012년 ‘2~3년 논문 게재 금지’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한편, <셜록>의 취재가 진행된 후 윤영석의원실은 “(출처 표기) 각주를 달아서 용역보고서를 수정 보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키워드④] 500만 원
과거 기사를 그대로 옮겨온 ‘자기표절’ 문제부터 내용 역시 부실한 수준의 보고서. 이런 연구용역 보고서에 쓰인 국민 세금이 500만 원이다. 보통 월급쟁이의 두 달 치 월급이 넘는(2020년 기준 임금근로자 중위소득 242만 원) 혈세가 낭비된 거다.
하지만 윤영석의원실은 “(A 언론사가 직접 취재한 사실 등을 고려하면) 해당 용역보고서 가치는 돈 500만 원이 아니고, 더 무궁무진한 값어치가 있는 내용이라고 본다”며, 세금 낭비라는 지적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10월 6일 현재, 열린국회정보 사이트에는 윤 의원이 발간한 <양산시 상북면과 하북면 항일독립운동 스토리텔링 사업> 보고서가 25쪽짜리 수정 용역보고서로 바뀌어 있다. 하지만 현재 게시된 보고서 역시 과거 기사에 대한 출처를 여전히 밝히지 않고 있다.
[키워드⑤] 망각
윤영석 의원이 ‘표절’ 문제로 지적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5년 윤 의원은 출처와 인용 표기 없이 국책연구기관의 자료를 베낀 정책자료집 <일반자치와 교육자치의 조화방안>을 발간했다. 윤 의원이 발간한 정책자료집은 한국지방행정연구원이 2010년 발행한 <일반자치와 교육자치의 연계확대 방안>을 표절한 것으로 밝혀져 2017년 문제가 된 바 있다. 이 표절 정책자료집 발간에 쓰인 세금만 약 380만 원이다.
윤영석 의원은 여론의 지탄을 받은 5년 전 과거를 ‘망각’한 걸까. 이번에 <셜록>이 확인한 표절 연구용역 보고서에도 500만 원의 세금이 쓰였다.
억울하다 : 아무 잘못 없이 꾸중을 듣거나 벌을 받거나 하여 분하고 답답하다(표준국어대사전)
두 차례나 표절 보고서로 세금 수백만 원을 낭비하고도 “억울함”을 호소하는 윤영석 의원. 하지만 정말 “분하고 답답한” 사람은 누구일까. 자신의 세금이 그렇게 줄줄 새고 있는지도 몰랐던 국민들, 그리고 그런 국회의원을 믿고 21대 총선에서 다시 뽑아준 양산시민들 아닐까.
김보경 기자 573dofvm@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