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A 씨는 총선 기간 개인 돈 105만 원을 들여 사무실 장식용 풍경 사진 9장을 샀다. 나중에 해당 경비를 청구하려고 보니, 사무실 개설 예산은 71만 원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머리를 굴렸다. 사진 9장을 산 영수증을 67만 5000원짜리와 37만 5000원짜리로 쪼갰다. 이후 67만 5000원짜리 영수증은 사무실 개설 예산으로, 나머지 37만 5000원짜리 영수증은 사무실 운영자금 예산으로 청구했다.
하지만 3년 뒤 A 의원은 국회 윤리특별위원회로부터 고발당했다. 법원은 그의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벌금 225만 원과 사회봉사 50시간을 명령했다. 그는 의원직도 박탈당했다.
105만 원짜리(700파운드, 2015년 당시 환율 기준) 영수증 위조로 의원직을 박탈당한 이 사건. 사실은 한국이 아닌 영국에서 있었던 일이다.(참고 : 주간조선 <국민 소환 당한 영국 의원들의 죄> 2019. 8. 18.) 영국의 크리스 데이비스 의원(보수당)은 2015년 총선 경비를 정산하는 과정에서 영수증을 위조한 혐의가 인정돼 결국 의원직을 잃었다.
현직 국회의원이 단지 경비 105만 원 때문에 의원직을 잃는 일이 한국에서도 가능할까?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지난 3개월 동안 21대 국회의원들이 발간한 ‘표절’ 용역보고서 문제를 살펴봤다. 국회의원은 입법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소규모 연구용역 보고서를 만든다. 보고서 한 편당 최대 500만 원, 의원실별 연간 2550만 원까지 정책연구비를 지원받을 수 있다. 정책연구비가 포함된 예산 ‘입법 및 정책개발비’는 2022년 기준 약 76억 원이다.
국회의원들의 연구용역 보고서 323건을 표절 심의 사이트 ‘카피킬러’를 통해 확인한 결과, 약 64%가 표절률 10%를 넘었다. 무려 표절률 50%를 초과한 보고서도 19건(6%)이었다. <셜록>은 표절률 50%를 넘는 보고서 중 8건을 집중 분석했다.
인터넷 블로그 속 오자와 작성자 개인 견해까지 그대로 가져온 보고서(국민의힘 서병수·김미애 의원)에 들어간 세금은 330만 원. 인터넷 위키백과부터, 언론사 칼럼까지 골고루 베낀 ‘백화점식 표절’ 보고서(국민의힘 서병수 의원)에도 세금 300만 원이 들어갔다.
의원 지역구의 언론사가 출처 표기도 없이 자사의 과거 기사를 그대로 옮겨놓은 보고서(국민의힘 윤영석 의원)도 있었고, 절반 정도를 남의 문장으로 채우고 연구책임자의 이름도 밝히지 않은 보고서(더불어민주당 이용우 의원)도 있었다.
국책연구기관의 연구보고서를 뭉텅이로 베껴 ‘표절률 1위(71%)’를 기록한 보고서(국민의힘 이헌승 의원)엔 세금 500만 원이 들어갔다. 논문, 블로그 글, 언론사 칼럼 등 여기저기서 골라 담은 문장을 짜깁기한 ‘뷔페식 표절’ 보고서(국민의힘 김희곤·백종헌 의원)도 존재했다. 논문, 시민단체 발표 자료, 각종 기사 등을 표절한 또 다른 ‘뷔페식 표절’ 보고서(더불어민주당 임오경 의원)도 있었다.
이렇게 구체적인 표절 사실을 <셜록>이 일일이 확인한 8건의 연구용역 보고서에 낭비된 혈세만 총 2960만 원에 달한다. 323건의 보고서 중 약 64%가 표절률 10%를 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표절 보고서로 낭비된 세금의 규모는 더 클 것이라고 손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근절할 수가 있을까. ▲징계 ▲감시 ▲검증 영역으로 나눠 해결책을 모색했다.
먼저 징계다. 하승수 변호사(세금도둑잡아라 공동대표)는 지난 11일 기자를 만나, 표절 보고서 문제가 반복되는 이유를 “국회의원들이 징계나 처벌을 받지 않아서”라고 강조했다.
하 변호사는 “국회 예산 문제는 국회법에 따른 징계를 받아야 되는 사안인데, 명시된 법이 없어 그동안 표절 용역보고서 문제로 징계를 받은 케이스가 전무하다”면서, “국회 안에 침묵의 카르텔이 작동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 변호사의 지적대로, 표절 연구용역 보고서 문제로 국회에서 징계를 받은 사례는 없다. 근거 규정이 국회법에 없기 때문이다. 연구용역 보고서 품질 관련 규정이나 지침이라고 할 수 있는 건 국회 사무처가 발행한 <국회의원 의정활동지원 안내서>(2022)가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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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법 개정과 더불어 ‘국회의원 행동강령’ 제정도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김예찬 투명한 사회를위한정보공개센터 활동가는 지난 12일 기자를 만나, “공무원 행동강령에 ‘예산 목적 외 사용금지’라는 조항이 있는데, 국회의원 행동강령을 만들어서 이를 똑같이 적용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공무원 행동강령 제7조)에 따르면, 공무원은 여비, 업무추진비 등 공무 활동을 위한 예산을 목적 외의 용도로 사용해 소속 기관에 재산상 손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입법 및 정책 개발을 하라고 집행한 예산을 국회의원이 목적에 맞게 사용하지 않을 경우 ‘공무원 행동강령’처럼 ‘예산 목적 외 사용금지’ 조항으로 징계를 내릴 수 있다는 의미다.
김 활동가는 “이미 존재하는 ‘국회의원 윤리강령’은 구체적인 징계 근거 조항이 없는 선언적인 문구에 불과하고 ‘국회의원윤리실천규범’ 역시 공무원 행동강령에 비하면 하지 말아야 할 행위를 나열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공무원 행동강령도 있고 지방의원 행동강령도 있는데 국회의원 행동강령이 아직까지도 없는 게 말이 안 된다”고 비판했다.
예산 환수도 법으로 강제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하 변호사는 “대학처럼 연구비 강제 환수까지 이어지려면 국회예산 환수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임오경의원실은 지난 4일 표절 보고서에 대한 용역비 반환 의사를 묻는 질문에 “국회 사무처의 절차와 방법을 정상적으로 준수하였기에 반납 조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답한 바 있다. 표절 사실이 확인돼도 이를 환수할 ‘절차와 방법’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교육부훈령 ‘연구윤리확보를 위한 지침’에 따르면, 교육부장관은 조사 결과 연구부정행위로 판단되는 경우 사업비 지급을 중지하고 환수하는 후속 조치를 할 수 있다. 하 변호사는 “자진 반납을 하면 좋지만 악질적인 케이스일수록 반납을 잘 하지 않는다”면서, “아예 법을 통해 강제권이 동원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두 번째는 감시 영역이다. ‘국회감사위원회’ 설립은 2019년부터 570여 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정치개혁공동행동’에 의해 ‘국회개혁 3법’ 중 하나로 제시됐다. 하 변호사는 “국회의원의 법 위반과 윤리 의무 해태 사안에 대해 정확하게 진상을 조사할 수 있는 독립적인 기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하 변호사는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약 5명의 위원이 국회의 모든 예산을 감시·감독하고, 국회의원에 대한 제보를 받아 진상을 조사해 국회 윤리특별위원회로 넘기는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하 변호사는 의회윤리독립감사청(IPSA)을 운영하는 영국 사례를 들며 독립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하 변호사는 “2009년 영국에서 국회 세금유용 스캔들이 터지면서 IPSA라는 독립성 있는 기구가 만들어졌다”며, “해당 감사청은 국회의원 예산 사용에 대해 검증도 하고 자료 공개도 요구하는 독립적인 기구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영국은 IPSA 도입으로 ‘국민소환법’까지 도입했다. 국민소환법은 선출된 공직자에 대한 위임을 국민이 직접 철회하는 제도를 말한다. 글머리에 소개한 ‘105만 원 영수증’ 크리스 데이비스 의원의 사례 역시 국민소환법에 의해 의원직 박탈까지 이어진 사건이다.
마지막으로 검증의 영역이다. 정부에서 진행하는 정책연구의 경우 검증 시스템은 이미 자리 잡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다른 국가기관에서 운영하는 가이드라인을 참고한다면, 국회도 충분히 연구용역 보고서의 품질 문제를 사전에 검증할 수 있다.
정부는 예산 낭비를 줄이고 정책연구 품질을 높이고자 17년 전인 2005년 ‘정책연구관리규정(국무총리 훈령)’을 제정했다. 2006년에는 전자기술을 활용해 정책연구 과정을 관리할 수 있도록 통합 전산 시스템, ‘정책연구관리시스템(PRISM)’을 구축했다.
행정안전부는 이 규정에 의거해 실질적인 기준을 담은 가이드라인 <정책연구관리 업무편람>을 제작했다. 여기에는 착수-진행-완료 단계별로 연구자가 지켜야 할 사항이 명시돼 있다.
먼저, ‘연구착수’ 단계다. 부정행위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연구자는 ‘정책연구 윤리 준수 서약서’를 담당 공무원에게 제출해야 한다. 착수 과정에서 연구자는 연구윤리 교육도 받아야 한다. 교육을 진행하는 주체는 연구자가 속한 연구기관, 주로 대학이다.
두 번째는 ‘연구진행’ 단계다. 정책연구를 진행할 때, 연구자는 ‘정책연구 윤리 점검기준 및 자가검점표’에 따라 연구를 수행해야 한다. 정책연구 윤리 점검기준은 ▲위조 ▲변조 ▲표절 ▲부당한 저자 표기 ▲중복게재 등 5가지로 이뤄졌다. 연구자는 연구 과정에서 이 5가지 기준에 기반한 질문이 갖춰진 ‘자가점검표’를 참조해 연구윤리를 지켜야 한다.
끝으로 ‘연구완료’ 단계다. 정책연구가 완료되면 연구자는 자가점검표를 작성해 담당 공무원에게 제출해야 한다. 이때 제출해야 하는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유사도 검사결과서다. ‘카피킬러’처럼 민간 검사 시스템을 활용한 검사 결과를 내야 하는 것이다.
“예산 절감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으로 국민의 세금을 한 푼이라도 아끼는 데 앞장서 나가겠습니다.”
유인태 당시 국회 사무총장이 2018년 11월 29일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혁신을 약속하며 한 말이다. 국회 혁신자문위원회(위원장 심지연)와 유 사무총장은 정책개발비 예산집행 과정의 표절과 부정행위를 지적하며, 보고서 대국민 공개 등 개선책을 약속한 바 있다.
하지만 징계 규정도, 검증 시스템도 없는 이런 미봉책으로는, “국민 세금을 아끼겠다”는 유 사무총장의 약속은 허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이번 <셜록>의 취재로 확인됐다.
최근 시민단체들은 직접 고발에 나서기도 했다. 세금도둑잡아라, 투명사회를위한정보공개센터, 함께하는시민행동은 지난 4일 김미애, 백종헌, 서병수, 이헌승 등 부산에 지역구를 둔 국민의힘 의원 총 14명에 대한 고발장을 서울남부지방검찰청에 접수했다.
고발 혐의는 허위공문서 작성 및 행사, 그리고 사기. 시민단체는 해당 국회의원들이 ‘입법 및 정책개발비’를 유용해 국민의힘 부산시당 씽크탱크인 ‘부산행복연구원’의 운영자금을 지원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이를 고발의 이유로 밝혔다.
하 변호사는 “고발된 국회의원 14명이 각각 연구용역을 의뢰한 보고서 또한 주로 정당 내 선거 공약을 개발하는 내용으로 입법 및 정책개발과는 관련이 없어 사실상 허위공문서 작성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105만 원 때문에 의원직을 잃는 일이 한국에서도 가능할까?’
기사의 첫머리에서 던진 질문을 다시 던져본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다. 이런 일이 ‘앞으로도’ 가능하지 않다면, 더 이상의 국회 개혁은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다.
“국회의원들은 정치생명에 위협을 받아야 문제를 반복하지 않습니다. 국회의원들을 향한 강력한 징계와 처벌이 필요한 이유입니다.”(하승수 변호사)
김보경 기자 573dofvm@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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