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심하게 표절할 수 있을까요?”
지난 21일 서울 당산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정석(가명, 57) 씨는 손에 쥔 하얀 종이 뭉치를 흔들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손에 쥔 건 서병수(국민의힘, 부산 부산진구갑)·김미애(국민의힘, 부산 해운대구을) 국회의원실에서 2021년 3월 발간한 소규모 연구용역 보고서. 진실탐사그룹 <셜록>이 기획 <‘베껴도 줍니다’ 의원님의 쌈짓돈>에서 첫 번째 사례로 보도한 ‘표절’ 연구용역 보고서다.
이정석 씨는 서병수·김미애 의원실에 ‘공개 사과’를 요구하며, 연구용역 보고서의 책임연구원 A씨를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고소할 뜻을 밝혔다.
국회의원은 국민 세금으로 연구용역을 맡겨 보고서를 발간한다. 한 편당 최대 500만 원, 의원실별 연간 2550만 원까지 지원받는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제21대 개원 이후 국회에서 발간된 연구용역 보고서 323건 중 표절률 50%를 초과한 사례 8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해왔다. 이 중 서병수의원실에서 발간한 보고서가 2건을 차지했다.
이정석 씨는 2014년 2월, 약 500쪽에 달하는 책 <한국 주거복지 정책 : 과제와 전망>(하성규 외, 박영사, 2012년)을 읽고 개인 블로그에 서평을 남겼다. 글은 책 내용을 요약하고 자기 생각을 덧붙이는 식으로 구성했다. 이 글은 약 7년 후 서병수·김미애 의원이 발간한 연구용역 보고서에 무단 복사됐다. 총 63쪽짜리 보고서에서 절반에 해당하는 32쪽 분량이 이 씨의 블로그에서 긁어온 문장으로 이뤄졌다.
[관련기사 보기 : “표절은 중범죄“라더니… 서병수 의원의 낯선 ‘침묵‘]
이 씨의 글을 표절한 보고서는 <부산시 주거복지 실태와 정책 발전방안>으로, 표절 심사 프로그램 ‘카피킬러‘를 통해 확인한 결과 표절률 69%가 나왔다. 국민의 세금으로 330만 원(서병수의원실 220만 원, 김미애의원실 110만 원)을 받고 연구용역을 수행한 책임연구원은 부산행복연구원 부원장 A 씨. 그는 이 씨의 블로그 글과 또 다른 두 건의 다른 연구물을 표절해 보고서를 작성했다.
아래는 표절 피해자 이정석 씨와의 일문일답이다.
Q. 블로그에 해당 글을 게재한 시점과 이유는.
“2014년 2월은 한창 블로그에 서평을 올리던 시기다. 평소 부동산이나 주거 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이와 관련된 여러 책을 읽고 서평을 많이 썼다. 그중에서도 책 <한국 주거복지 정책 : 과제와 전망>만큼 한국 주거복지에 대해서 여러 의견과 다양한 내용이 반영된 책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때 책을 꼼꼼히 읽고 정리했던 기억이 있다.”
Q. 서병수·김미애 의원실 혹은 책임연구원 A 씨 측에서 블로그 글과 관련해 연락 온 적이 있나.
“전혀 없다.”
Q. 표절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기분이 어땠나.
“일단 황당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 각계각층에서 ‘표절 문제‘가 워낙 많이 터지지 않았나. 연구윤리를 지켜야 하는 석・박사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학생들까지도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표절을 하는 세상이다. ‘표절 문제가 커질 대로 커져서 이제 내 블로그까지 베끼는구나!’ 싶었다.”
근무 중 잠시 시간을 내 <셜록> 취재진과 만난 이 씨는 인터뷰 도중 여러 번 카페 창밖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헛웃음을 지었다. 서병수·김미애 의원실에서 발간한 연구용역 보고서를 한 장씩 넘기며 자신이 쓴 글이 그대로 들어 있는 걸 확인했을 때도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그는 보고서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뒤 “무식한 표절 방식”이라고 표현했다.
Q. 표절 수위가 어떻다고 생각하나.
“완전히 갖다 붙인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표절이 이것보다 심할 수 있나? 왕창 베낀 거라 (심한 편이다). 내가 책에 대해 개인적으로 적은 의견과 오타까지 베꼈더라. 이건 최악이다. 표절의 최악.“
Q. 의원실 측에 요구사항이 있나.
“일단 표절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했으면 좋겠다. 인간적으로 최소한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또 내 블로그 글을 인용했다는 사실을 보고서에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민단체 세금도둑잡아라, 투명사회를위한정보공개센터, 함께하는시민행동은 지난 4일, 서병수, 김미애 의원을 비롯한 부산 지역 국민의힘 의원 14명을 허위공문서 작성 및 행사와 사기죄로 서울남부지방검찰청에 고발했다. 해당 의원들이 표절 보고서를 발간해, 거기에 지원된 ‘입법 및 정책개발비’를 유용했다는 것이 고발의 이유였다.
이정석 씨는 서병수·김미애 의원실이 진행한 연구용역의 책임연구원 A 씨를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고소할 예정이다. 대부분의 저작권법 위반 행위는 피해자가 직접 수사기관에 고소해야 공소를 제기할 수 있는 친고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Q. 고소를 결심한 이유는 무엇인가.
“일단 이 글(2014년 블로그 글)을 쓸 때 굉장히 힘들었다. 한마디로 ‘개고생’을 했다. 500쪽이 넘는 책을 목차별로 중요한 내용을 뽑아서 일일이 정리하고 내 의견까지 다는 과정이 쉽진 않다. 그때 내 블로그를 보는 사람들이 꽤 있어서 제대로 정리해서 다른 사람한테 도움을 주고 싶었다.
석・박사 연구원들, 교수들, 수험생이야 어쨌든 일반 시민이고 개인이다. 그러나 정치인은 다르다. 그들은 세금을 받는 공인이다. 내 글을 베껴서 만든 보고서에도 세금이 투입되지 않았나. 보고서 한 편당 500만 원을 받을 수 있다고 들었다. 500만 원이면 정말 큰돈이다. 공공임대주택 청년 입주자에겐 2년간 계약을 할 수 있는 보증금이기도 하다.(기자 주 – SH ‘청년 매입임대주택’은 자격요건 순위에 따라 임대보증금을 최소 100만 원부터 차등 적용)
소득 수준에 따라 일반 직장인도 그 돈을 벌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국민 세금을 낭비한 국회의원들에게 경각심을 주고자 고소를 결심했다.”
Q. 국회의원 연구용역 보고서의 표절 문제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어떤 대책이 필요하다고 보나.
“표절 보고서를 내면 의원직 상실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저작권법을 위반해 일정액 이상의 벌금형을 받으면 의원직 상실 요건 중 하나가 충족되는 식의 제도가 필요하다. 국회의원들에게 ‘표절하지 말라’고 교육하는 건 한계가 있다고 본다. 표절하면 안 된다는 걸 몰라서 방치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주보배 기자 treasure@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