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트로 : 마님의 자부심
인신매매와 노예노동으로 아이를 키우고 일상을 꾸린 그들에겐 수치심이 없었다. 오히려 “오갈 데 없는 바보들 먹여주고 재워준 게 우리”라는 자부심 같은 게 보였다.
목포에서 배로 두 시간이면 닿는, 염전으로 유명한 어느 섬 주민들 이야기다. 이들 중 누군가는 노예에게 “마님”이라 불렸다. 단돈 120만 원으로 노예를 산 어떤 주민은 KBS 다큐멘터리에서 천사처럼 묘사됐다. 지난가을, 그에게 전화를 걸어봤다. 천사의 목소리가 ‘하이톤’으로 달라졌다.
“이봐요! 피해자는 우리거든요! 그놈들 때문에 우리 섬 사람들이 얼마나 욕 먹은지 알아요!”
일부 주민은 섬 떠난 염전노예를 여전히 “걔네”, “그놈들”, “바보들”이라 불렀다. 섬 주민들의 이 끈질긴 주인의식(?). 그들은 정말 피해자일까?
섬 주민들이 돌아가면서 20년간 탈탈 털어먹은 염전노예 피해자 이근만(1961년생, 가명)의 이야기를 풀어본다. 이근만은 ‘염전노예 사건’ 하면 금방 떠오르는 피해자 이미지와 결이 다르다.
이근만은 발달장애인이 아니다. 그는 자기 힘으로 섬을 탈출해 육지까지 오는 데 성공한 드문 이력의 소유자다. 염전주를 고용노동부에 신고해 합의금을 받아낸 적도 있다. 이렇게 ‘탈출 노예’로 대미를 장식하나 싶었는데, 그는 자기 발로 다시 섬으로 돌아갔다.
섬 주민들이 자기 치부를 덮을 때면 자주 소환하는 ‘돌아온 노예’. 이근만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1. 탈출 노예의 궁전 : “엄마 이야기 금지!”
열 평 남짓한 집에 신발을 벗고 들어서자 금세 발이 시렸다. 발바닥이 차가워 오른발을 왼쪽 발등에 올린 채 잠시 까치발로 섰다. 섬을 탈출한 이근만은 광주광역시 북구의 한 임대아파트 16층에 혼자 산다.
“염전 컨테이너 살던 때에 비하면 여긴 궁전이여, 궁전!”
이근만은 안방 겸 거실 바닥에 깔린 전기장판 위로 올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섬에서 벌어진 일… 그거 다 끝났는데, 뭔 이야기가 들고 싶어서 왔어요?”
즉답을 피하고 그의 방을 살폈다. TV 옆에 놓인 작은 액자 속 세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가운데는 이근만의 엄마, 양 옆은 그의 이모다. 엄마에게 대해 묻자 이근만은 눈을 꾹 감아버렸다.
“엄마 이야기 하지 마! 엄마 이야기 금지! 오늘은 엄마 이야기 하지 맙시다. 알겠지?”
그는 완고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근만은 긴 이야기를 할 때면 눈을 질끈 감는다. 길게 말하는 걸 힘들어 한다. 발음도 정확하지 않다.
“내가… 내가… 다른 이야긴 다 해줄게. 난 말이야… 사실 그대로만 말하는 사람이야.“
허튼 말이 아니다. 일부 섬 주민이 공모해 은폐한 살인사건의 진실이 이근만의 입을 통해 20년 만에 드러났다. 경찰이 조작에 관여한 살인미수 사건 역시 밝혀졌다. 섬 사람들은 그를 바보 취급 했지만, 진실한 말로 섬의 위선을 폭로한 건 이근만이었다.
“내가 염전주인 박대성(가명) 감옥 보낸 거… 알지?”
이근만은 머리를 뒤로 젖히고 감았던 눈을 가늘게 뜬 채 물었다. 그가 이렇게 거만한 태도를 취하는 이유가 있다. 박대성에게 선고된 징역 5년, 염전노예 사건이 터진 2014년 당시 가해자에게 떨어진 최고 형량이었다.
약간의 무용담이 절정에 이를 무렵, 이근만의 휴대폰 전화벨이 울렸다. 이근만은 스피커폰으로 받았다.
“고객님, 전화요금 33만 7190원 체납 중입니다. 납부 안 하시면 곧 이용 정지됩니다.”
이근만은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얼마? 30만 원이 넘는다고요? 하아… 돈이 하나도 없는데… 이거 어째요….”
그제야 엄마 사진 옆에 수북이 쌓인 각종 체납금 독촉장이 보였다. 가스비, 전기세, 휴대폰 요금, 도로교통법 위반 벌금 고지서…. 이근만이 받는 기초생활수급비 월 55만 원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금액이었다.
그 중 단연 눈에 띄는 건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보낸 ‘기타징수금 납부 독촉장’. 청구액이 무려 297만 8500원이었다.
#2. 주민센터 : 추격자
이게 뭐지?
“골치 아파 죽겠어…. 원래 500만 원인데 다달이 10만 원씩 냈고… 남은 게 그만큼이여.”
거만함과 당당함은 싹 사라졌다. 그는 말을 더듬으며 기억을 끄집어냈다. 2010년 3월, 염전주 박대성은 이근만의 배를 칼로 찔렀다. 이근만은 헬기를 타고 육지로 이송돼 수술을 받고 겨우 목숨을 건졌다. 염전주 박대성은 살인미수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구속됐다.
박대성은 출감 직후, 자신의 노예였던 이근만을 찾아왔다. 그는 이근만을 차에 태워 전남 무안군으로 데려 갔다. 목적지는 건강보험공단 지사. 박대성은 자기가 저지른 범죄사건의 병원비 500만 원을 이근만이 납부하도록 했다.
“칼에 찔린 것도 억울한데… 당한 사람이 난데… 이걸 왜 내가 내냐고!”
오히려 내가 묻고 싶었다.
“지 돈 없다고 나한테 내라고 하는데… 내가 어쩌겠어… 그리고 박대성 성질이 더럽거든. 무섭지.”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이근만과 함께 주민센터에 갔다. 주민센터는 “건강보험공단에 가서 문의하라”고 답했다. 이근만에게 내가 말했다.
“무안에 있는 건강보험공단에 한번 가야겠네요.”
“거길… 어떻게 가? 난 갈 줄 모르는데….”
“저랑 같이 가요. 제 차 타고 가면 됩니다.”
“박 기자… 차도 있어? 부자네… 정말 부자네!”
이근만은 “보여줄 게 있다”며 집으로 다시 가자고 했다. 집에 도착하자 그는 웃옷을 들어 올렸다. 그의 배꼽 오른쪽으로 약 30cm의 칼자국이 선명했다. 또 세로로 난 약 30cm의 자국은 수술 흔적이다.
“칼에 찔렸을 때, 내장이 밖으로 나왔어. 근데,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어. 왠 줄 알어?”
이근만은 나를 빤히 바라봤다.
“하나님 때문이지. 내가 하나님을 믿거든. 하나님 말씀대로 착하게 살면, 나처럼 은혜를 받게 돼 있어. 봐… 내가 안 죽고 이렇게 살아 있잖아. 난 말이여… 은혜 받은 사람이여!”
역시 이근만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뒤로 ‘예수님과 열두 제자’ 그림이 보였다.
#3. 무안으로 가는 길 : 영어 하는 자부심
오랜만의 외출인지, 광주에서 무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이근만은 한껏 들떠 있었다. 차창 밖으로 이정표나 간판이 보이면 소리 내 읽었다.
“목… 포… 방… 면… (잠시 침묵) 속… 도… 주… 의.”
그는 나 들으라고 애써 크게 말했다. 내비게이션 역할을 한 게 아니다. 당신이 한글을 읽을 줄 안다는 걸 확실히 해두려는 거다. 이근만은 길게 말하거나, 듣는 걸 어려워한다. 휴대폰에 전화번호 저장하는 방법 역시 모른다. 살인미수 피해를 입고도 그 병원비를 자기가 내는 답답한(?) 면도 있다.
며칠 전, 장애 진단을 받아보자고 했다. 이근만은 고개를 저었다.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해도 단호했다. 자신이 장애인으로 공식화 되는 걸 경계했다. 광주를 빠져나가기 직전, 그가 다시 간판을 읽었다.
“케이… 티. (피식 웃음) 그 옆엔 에스… 케이.”
“근만 아저씨, 영어도 읽을 줄 아시네요.”
이근만의 목소리가 커졌다.
“사회생활 하려면 이 정도 영어는 해야 하는 거 아녀? 휴대전화 저시기들 하는 회사잖어!”
그는 다시 거만하게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바라봤다. 잠시 뒤 자세를 풀면서 이근만은 “영어는 딱 저 정도만 읽을 줄 안다”며 “사회생활에 지장 없다”고 강조했다.
“아니, 그렇게 영어도 잘하시고 한글도 읽을 줄 알면서, 왜 염전에서 일할 때는 20년 동안 돈 달라는 말을 못했어요?”
이근만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며 입을 닫았다. 한참 뒤에 입을 뗐다.
“그게… 잘 안 되더라고… 그게… 참 어려워! 말하는 것도 기술이여! 기술!”
1시간쯤 달리자 ‘함평 방면’ 표지판이 보였다. 이근만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갔다. 갑자기 나를 “동생”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어이, 동생. 내 고향이 함평이여. 가덕마을. 내가 고향 옆을 다 지나가네….”
염전에서 밤낮 없이 20년간 일하고서도 “월급 달라”는 말도 못한 이근만이 묻지도 않은 말을 술술 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린시절 이야기를 들려줬다.
#4. 고향 함평 : 나비처럼
이근만의 엄마는 “벙어리”였다. 듣지 못해 말하지 못하는 언어장애인 엄마를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낮잡아 불렀다. 초등학생 아들은 엄마를 “엄마”라 부르지 못했다. 듣지 못하니, 불러도 소용 없었다.
엄마에겐 손짓과 표정으로 말했다. 머리가 아프면 눈 찡그린 채 머리를 만졌고, 배가 고프면 오른손으로 밥 떠먹는 시늉을 했다. 엄마도 아들에게 그런 식으로 말했다. 둘만 사는 집은 늘 조용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셔서 얼굴을 모른다. 아들은 말을 못하는 엄마가 부끄럽고 답답했다.
이근만은 초등학교 3학년까지만 다녔다. 이후 엄마와 농사를 짓거나, 남의 집에서 일했다. 그래야만 먹고살 수 있었다. 가난이 지겨운 아들은 20대 초반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나왔다.
아들은 듣지 못하는 엄마에게 “잘 계시라”는 말을 못했다. 말을 못하는 엄마는 아들에게 “건강히 돌아오라”는 말을 못했다. 그렇게 둘은 영영 이별했다.
“두 다리 건강하고 짱짱한데, 내가 어딜 못 가? 바람처럼 나비처럼 마음대로 떠돌았어.”
#5. 서울역 : 세상의 끝
나비처럼 자유로워도 부르는 곳은 없었다. 기차를 타고 무작정 세상의 끝, 서울역으로 갔다. 초교 3학년 중퇴, 가진 것 없는 이근만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일단 노숙을 했다. 그러다 배가 고프면 “노가다를 나가거나 식당에서 설거지”를 했다.
“지금은 내가 나이 먹어서 찾는 사람이 없지만… 젊을 땐 나 찾는 사람이 겁나 많았어!”
그 많은 사람 중에 발달장애인, 노숙인을 직업소개소에 팔아 넘기는 일명 ‘휘빠리’도 있었다. 이근만은 1991년 봄 직업소개소를 통해 천일염으로 유명한 섬으로 넘어갔다. 염전주인 박대성과의 질긴 인연이 그렇게 시작됐다.
박대성의 염전엔 이미 두 노예 우성수(가명), 염태성(가명)이 일하고 있었다. 박대성은 “기분이 틀어지면 쇠파이프, 몽둥이 등 온갖 도구로 사람을 팼다”. 3년 뒤인 1994년, 염전주인 박대성과 세 노예의 운명은 지독하게 꼬여버린다.
박대성의 지시로 우성수는 염태성을 살해했다. 이 모든 걸 이근만이 지켜봤다. 박대성이 이근만에게 말했다.
“네가 본 걸 말하면, 너도 죽어.”
본 대로 말하면 죽고, 죽어라 일해도 돈도 못 받고. 자유로운 나비가 도착한 곳은 세상의 끝이었다.
☞ 5화 <섬에서 탈출한 ‘토끼’는 왜 노예로 돌아갔을까>로 이어집니다.
박상규 기자 comune@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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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얼룩소>(https://alook.so/posts/ZktOovk)와 동시 게재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