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노동부가 ‘태아산재법 시행령 입법예고안’ 의견서에 대해 답변을 보내왔다. ‘반도체 아이들’의 희망을 지키기 위해 시민 803명이 힘을 모은 데에 대한 응답이다.
고용노동부는 유해인자를 좁게 인정하는 현 시행령안을 개정하진 못했지만, ‘태아산재’ 관련 지침 마련을 약속했다. ‘태아산재’는 부모의 업무 환경 탓에 발생한 자녀의 선천성 건강손상을 산업재해로 인정하는 제도를 말한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지난해 7월부터 진행한 ‘반도체 아이들의 가려진 아픔’ 프로젝트를 통해 태아산재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왔다.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 ‘반올림’ 측은 지난달 9일부터 28일까지 시민들의 이름으로 ‘태아산재법 입법예고 의견제출’을 추진했다.
그 결과 시민 803명은 “태아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는 물질들을 폭넓게 인정하도록 시행령을 바꿔달라”는 취지의 의견서를 작성해 지난달 28일 고용노동부에 제출했다. <셜록>과 반올림 측은 고용노동부가 보낸 답변서를 이달 20일 수령했다.
고용노동부는 서면 답변에서 이번 시행령 제정에 대해 “산부인과, 직업환경의학과, 산업위생 분야 교수 등으로 구성된 연구진의 국내·외 태아의 기형과 의학적 연관성이 밝혀진 유해인자에 대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건강손상자녀 유해인자를 정했으며, 추후 건강손상자녀를 일으키는 유해인자가 밝혀질 경우 이를 포함하도록 포괄 규정을 두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고용노동부는 “향후, 노사 및 관련 전문가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건강손상자녀 관련 지침 등을 마련하고, 임신 중인 근로자가 업무수행과정에서 발생한 건강손상자녀의 산재보상이 차질없이 이뤄질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고 답변했다.
<셜록>과 반올림 측이 제출한 의견서대로 시행령을 개정하진 않지만, 그 대안으로 업무처리 지침을 마련하겠다는 이야기다.
고용노동부 산재보상정책과 담당자는 21일 기자와 한 통화에서 “(답변서의 지침은)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업재해 인정 여부 결정할 때 참고하는 업무 지침을 말하는 게 맞다”면서 “현장에서는 실질적으로 이 지침에 따라 움직인다”고 설명했다.
이어 담당자는 “현재도 노사 및 전문가의 의견을 계속해서 수렴하고 있다”면서 “실제 현장에서 (산업재해 피해자가)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운영할 수 있게끔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태아산재를 인정하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일부 개정안(대안)’은 임신 중 업무상 유해 환경에 의해 태어난 자녀에게 발생한 선천성 건강질환을 산업재해로 인정해 보험급여를 지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태아산재법은 내년 1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그에 따라 고용노동부가 시행령안을 발표했는데, 자녀에게 선천적으로 건강손상을 일으키는 유해요인을 협소하게 규정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화학적 유해인자 선정 과정에서 애초 1484개의 화학물질을 고려해놓고선, 막상 입법예고한 시행령안에선 단 17개의 화학물질만 포함했기 때문이다.
22일 반올림 소속 조승규 노무사는 이번 고용노동부의 답변을 두고 “산재보험법 시행령상의 유해인자가 협소하다고 비판하면서 의견서를 제출하였는데 고용노동부가 귀담아듣지 않고 시행령을 그대로 밀어붙여 유감스럽다”면서, ”고용노동부는 시행령상의 유해인자는 예시일 뿐이라고 하지만 현실에서는 시행령 외 유해인자로 산재인정 받기는 매우 어렵다”고 지적했다.
덧붙여 조 노무사는 “고용노동부 스스로 말한 것처럼 적어도 공단 지침은 상당인과관계에 따라 폭넓은 판단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면서, ”다양한 생식독성 물질과 인간공학적 유해인자도 판정에서 반영될 수 있도록 지침이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행령이 가지는 이런 한계 때문에, 애초 태아산재법을 만들었던 국회도 대안책을 내놓았다. 우원식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 서울 노원구을)은 9월 28일 건강손상 자녀에 대한 산재 인정기준을 완화하는 취지의 산재보상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한 바 있다.
개정안은 고용노동부가 선택한 몇 가지 유해요인만이 아니라, 현행 산업안전보건법과 그 하위규정상으로 태아의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물질로 분류돼 있는 유해요인(생식독성물질, 생식세포변이원성물질)에 노출된 경우 산재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했다.
또 현재 시행 예정인 산재보상법에는 포함되지 않은 ‘아버지의 유해요인 노출’로 인한 태아산재도 보호될 수 있도록 “임신 중인 근로자”를 “근로자”로 명시했다. 해당 개정안은 지난달 17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제8차 전체회의에 상정된 이후 현재까지 소관 상임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셜록>은 해당 개정안의 국회 통과를 포함해, 고용노동부의 업무처리 지침 내용 등을 계속 확인해 보도할 예정이다.
한편, 태아산재법은 내년 1월 12일 시행된다. 이 법은 시행일 이후에 출생한 자녀부터 적용한다. 자녀가 지급받을 수 있는 보험급여 종류는 요양급여, 장해급여, 간병급여, 장례비 및 직업재활급여다. 다만, 법안이 시행되는 2023년 1월 12일 전에 산재보험을 청구한 피해자들도 소급적용을 받는다.
산재신청 등 자세한 사항은 근로복지공단 콜센터(1588-0075)로 문의하거나 기관 홈페이지(www.comwel.or.kr)을 참고할 수 있다.
김보경 기자 573dofvm@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