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딸이랑 같이 봤으면 좋았을 텐데….”
영화가 끝나자 안경을 쓴 한 중년 여성이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꼭 말아쥔 두 손을 가슴에 모은 그는 내게 여러 번 ‘이 영화에 출연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이옥선(67) 씨는 조현병 등 정신질환자 당사자와 그 가족이 모인 한국조현병회복협회 회원. 그의 딸은 조현병 환자다.
“영화 정말 좋았어요. 조현병 환자와 가족 입장에서 느끼는 문제가 잘 정리됐고, 무엇보다 우리를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서요. 앞으로 이런 영화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딸은 일하느라 못 왔어요. 발병 20년째인데, 지금은 회복이 많이 돼서 사회생활도 하고, 아마추어 가수로도 활동해요.”
영화 <F20, 그 이후> 시사회가 지난 23일 서울 여의도에 있는 이룸센터에서 열렸다. 영화에는 탐사보도 전문매체 기자 ‘이보미’가 조현병 환자 안인득이 저지른 진주 방화·살인 사건의 대책을 취재하면서, 같은 병을 앓는 아버지 ‘영철’을 이해하는 과정이 담겼다.
<F20, 그 이후>는 조현병 환자 가족이 뜻을 모아 만들었다. 조현병 등 중증 정신질환자 가족이 모인 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에서 보건복지부 예산을 받아 제작했다. 연출은 형이 조현병 당사자인 양수진 감독(미라클픽쳐스 대표)이 담당했다. 기획 및 각본 초안은 정신과 전문의이자 어머니가 조현병 당사자인 이영렬 포항지진트라우마센터 센터장이 맡았다. 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 공보이사이기도 한 이 센터장은 영철 역을 직접 연기했다.
나는 ‘이보미’ 역을 맡았다. 진주 방화·살인 사건을 취재하던 중 인터뷰를 위해 만났던 이영렬 센터장이 출연을 제안했다. 출연을 결정한 결정적 이유는 하나였다. 범죄자가 아닌 평범한 조현병 환자 이야기를 만드는 데 참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난달 촬영을 시작해 약 한 달간의 제작 과정을 거쳐 처음으로 영화가 공개되는 자리. 23일 시사회에는 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 한국조현병회복협회 소속 회원 등 약 40명의 중증 정신질환자 가족들이 참여했다. 이항규 한국정신장애인협회 회장 등 정신질환자 당사자도 함께 영화를 관람했다.
시사회는 ▲영화 상영 ▲제작진 및 출연진 소감 발표 ▲관객과의 대화 순으로 진행됐다. 영화가 상영되는 50여 분 동안 시사회장에는 때로는 웃음이, 때로는 탄식이 흘렀다.
영화 속 주인공 ‘이보미’는 안인득이 저지른 ‘진주 방화·살인 사건’과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제도적 대책이 무엇인지 취재한다. 취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됐을 때, 보미는 선배 기자에게 이렇게 토로한다.
#씬12
이보미 : 그런데, 그게 진행이 안 되는 거예요. 네 가지 대책 전부 다! 전부 다 상식적인 이야기들이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주장들이잖아요? (중략) 아니, 이렇게 단순한 사회문제가 얼마나 될까요? 이렇게 해결하기 쉬운 사회문제가 또 있을까요?
보미가 답답함에 언성을 높이자, 선배 기자는 이렇게 묻는다.
“이 기자, 지금 화난 거야?”
이 장면에서 시사회에 모인 일부 관객은 공감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영화 상영 후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서 이영렬 센터장은 이렇게 말했다.
“보미가 느낀 답답함은 곧 가족들의 답답함이었을 거예요. 영화에 담긴 당사자와 그 가족의 답답함을 관계부서 담당자들에게 전하고 싶었지만 오늘 보건복지부 관계자가 오지 않아서 아쉽습니다.”
영화 속에서 보미는 대부분 어두운 표정이다. 아빠 영철을 바라볼 땐 짜증으로 일그러진 얼굴일 때가 많다. 엄마가 조현병 환자인 아빠를 혼자서 돌보다 병을 얻어 죽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철을 경멸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던 보미는 영화 말미에서 마침내 아빠를 이해한다. 영철에게 다가가고 싶은 보미는 마지막 장면에서 이렇게 말한다.
#씬15
이보미 : 아빠, 아빠는… 오래 살고 싶어?
이영철 : 어, 뭐… 아무래도 오래 사는 게 좋겠지.
이보미 : (영철 쪽으로 몸을 돌리며) 음, 그럼… 나도… 오래 살았으면 좋겠어?
이영철 : (보미의 말에 급히 반응하며) 아유, 그야 당연하지! 너는 더 오래 살아야지! 나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아야지!
이보미 : 그래, 나도 그러고 싶어. 나도 오래 살게. 아주 오래오래… (잠시 침묵) 우리 같이 오래 살자!
“아휴….”
이 장면이 나올 때 누군가는 탄식을 흘렸다. 시사회가 끝나고 조순득 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 회장이 탄식의 의미를 설명했다.
“영화가 엄청 슬프진 않았지만, 우리 가족들은 알지 않습니까. ‘같이 살자’는 저 말이 무슨 의민지…. 그래서 혀를 끌끌 차고, 눈물 훔치시는 분이 계셨던 것 같습니더.”
상영 후에는 제작진이 영화의 취지와 배경에 대해 발언했다. 이영렬 센터장은 영화를 기획하게 된 계기가 지난해 KBS가 공개한 영화 <F20>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F20>은 아들의 조현병을 숨기고 싶은 엄마 ‘애란’이 이를 알리려 한다고 생각한 이웃 ‘경화’를 살해하는 내용의 스릴러 영화다.
<F20>이 개봉하자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와 한국정신장애인연합회 등 전국 19개 장애인단체는 “해당 영화는 조현병을 가진 당사자의 삶을 고려하거나 존중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작년에 개봉한 영화 <F20>을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근래 정신건강 문제가 점점 주목받게 되면서 조현병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높아지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미디어 속에서 조현병 환자와 그 가족이 현실과 동떨어진 모습, 특히 대중의 호기심이나 편견에 부응하여 왜곡된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에 우려를 느껴 이 영화를 기획하게 됐습니다.”
미디어가 재현한 정신장애인과 그 가족의 모습에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내는 건 이 센터장만이 아니다. 지난 17일 한국조현병회복협회와 국가인권위원회가 함께 주최한 ‘정신장애인 언론·방송드라마 모니터링 토론회’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지적됐다.
“주요 언론에서 정신질환 관련하여 부정적으로 보도되는 기사가 감소하는 경향이 있지만, 영화 및 유튜브 같은 통신매체에서는 별다른 변화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2021년 정신장애인 단체들이 방영 중단을 요청한 KBS 제작 및 상영한 조현병 관련 <F20> 드라마 및 영화에 이어, 2022년에는 천만 이상 관객을 동원한 <범죄도시2>의 영화 도입 초기에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조장하는 장면을 연출하였다.”
– 배점태 한국조현병회복협회 회장의 발언 중
뒤이어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선 영화에 아쉬움을 표하는 의견도 나왔다. 조현병 당사자 최유진(38) 씨는 영화가 의료적·제도적 한계를 지적하는 데 많은 분량을 할애한 게 아쉬웠다는 의견이다.
“물론 제도적 부분을 지적하는 영화의 시선에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조현병 환자의 일상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려졌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저는 아침에 출근해서 사회복지사 선생님들과 인사를 하면서 하루를 시작해요. 지금은 의료진과 협의하에 약물을 천천히 줄이고 있는데, 재발하면 언제든지 다시 먹을 의사가 있고요. 이렇게 회복 의지가 강한 환자의 삶이 더 드러났다면 어땠을까 합니다.”
영화를 연출한 양수진 감독은 후속편을 제작하게 된다면 관객의 의견을 적극 수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번 영화로 평범한 조현병 환자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만드는 첫걸음을 뗐다고 생각하고요. 이 영화를 시작으로 앞으로는 조현병 환자가 주인공인 코미디, 멜로, 누아르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양수진 감독 인터뷰] “배우 아닌 이들이 만들어 더 의미 깊은 영화”
조현병 환자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데 영화라는 매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지난달 7일, 양수진 감독을 만나 그의 생각을 들어봤다. 아래는 그와 나눈 일문일답.
– <F20, 그 이후> 연출을 맡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영화를 기획한 이영렬 센터장과 중학교 때부터 친구예요. 이 원장(이영렬 센터장)이 전화해서 도와달라고 한 게 가장 컸죠. 또 아시다시피 저희 형이 (조현병) 당사자잖아요.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 같단 생각에 하게 됐어요.”
– 영화 출연진 대부분이 본업이 배우가 아니었습니다.
“그게 이 영화가 가지는 의미입니다. 출연진 대부분이 조현병과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었잖아요. 주인공 영철을 연기한 이영렬 원장은 어머니가 당사자고, 조순득 회장님도 아드님이 당사자고…. 이 영화에 선뜻 출연해주신 두 의사는 모두 실제로 조현병 환자를 진료하는 정신과 전문의고요. 또 다른 주인공 ‘이보미’ 역할을 연기한 기자님은 실제로 정신건강 분야를 취재한 분이고. 이런 특수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해서 더 의미가 커요. 또, 제가 아마추어 배우들과 작업을 여러 번 했었던 터라 이번에도 어렵지 않았어요.”
– 연출자로서, 영화 속에서 공감하거나 이입한 캐릭터가 있나요?
“저도 당연히 주인공 ‘보미’에게 공감 많이 했죠. 보미가 아빠 영철에게 짜증을 많이 내잖아요. 저라고 형님에게 짜증났던 순간이 없었을까요. 형 때문에 부모님이 고생하시고 형제들이 마음 아파하는 거 보면서 ‘형이 없었다면…’ 이런 생각, 저도 한 적 없다면 거짓말이에요. 하지만 지금은 형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요. ‘아 형에겐 자기만의 세계가 있구나, 어쩌면 형이 나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 수도 있겠다’.”
– 영화를 본 사람들이 무엇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무엇보다 조현병 환자와 그 가족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영화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희망을 품게 됐으면 좋겠어요. ‘아, 이런 영화를 통해서 사회 인식이나 제도가 점점 바뀌지 않을까’ 하는 희망. 문화의 힘이 그런 거거든요. 사람의 마음을 터치하는 힘.”
– 앞으로 조현병 환자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데 어떤 영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같은 콘텐츠도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발달장애인 같은 정신장애인에게 천재적 재능이 있다는 설정의 콘텐츠들이요. 서번트증후군처럼 긍정적 면을 부각하는 쪽으로 콘텐츠를 만들면 정신장애인 당사자나 가족들이 봤을 때 기분이 좋겠죠.”
– 하지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있었습니다.
“맞아요. 한계가 있었죠. 영우는 사실 현실성이 너무 떨어지잖아요. 그래도 그 드라마의 성과는 정신장애인이 등장하는 법률 드라마가 세상에 나왔다는 거예요. 저는 중증 조현병 환자 등 정신장애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다양한 장르의 상업영화가 등장할 때가 됐다고 봐요. 조현병 환자가 주인공인 코미디 영화, 어떨 것 같아요? 마치 인도 영화 <세 얼간이>처럼요. 멜로 영화는 어떨까요? 액션 영화도 흥미로울 것 같아요. 아니면, 일본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처럼 휴먼 드라마도 좋고요.”
– 영화 <F20, 그 이후>는 앞으로 어떻게 관객에게 공개할 예정인가요?
“영화는 유튜브 등 다양한 통로를 통해 관객들을 찾아갈 생각이에요. 우선, 대한민국패럴스마트폰영화제에 출품할 예정이에요. 이 영화가 정신장애인에 대한 영화니까요. 영화관을 빌려서 이 영화에 관심을 보이신 관객분들을 우선적으로 찾아가 보면 어떨까 하는 계획도 있어요.”
주보배 기자 treasure@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