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출소장 딸을 강간하고 죽였다는 누명을 쓴 남자는 끝내 빈털터리가 됐다. 평생 명예회복을 위해 싸워왔지만, 84세인 지금 그에게 남은 건 늙은 몸뿐이다. 몸도 그리 성하지 않다. 수사관들이 남긴 고문의 흔적이 남자의 몸 구석구석을 장식하고 있다.

최초의 사건을 말하려면 4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72년 9월 27일, 강원도 춘천시 우두동의 한 논둑에서 춘천경찰서 소속 경찰 간부 딸이 주검으로 발견됐다. 죽은 아이는 불과 9살이었다. 팬티와 반바지가 벗겨져 있었고, 주인을 알 수 없는 빗과 연필이 현장에서 발견됐다.

특정할 수 있는 건 만화방 쿠폰뿐이었다. 동네 만화방 주인이 아이들에게 판촉용으로 뿌린 쿠폰이 죽은 아이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현장에서 혈흔과 음모도 발견됐지만 무용지물이었다. 1972년도는 유전자 검사를 할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정원섭 씨, 그날 파출소장 딸이 만화방 안 왔어요?”

경찰은 정원섭(34년생, 당시 38살)을 찾아왔다. 발견된 쿠폰은 원섭의 만화방의 것이 아니었지만, 경찰은 원섭에게 아이를 당일 목격한 적이 있느냐고 따져 물었다. 원섭은 본 적 없다고 사실대로 대답했다. 사건 당일 알리바이가 분명하기 때문에 별다른 의심 없이 경찰 수사에 순순히 협조했다.

정원섭(84세). 안성의 한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다. ⓒ주용성

시간이 지날수록 경찰의 칼날은 정원섭을 향했다. 무엇보다 김현옥 당시 내무부 장관의 ‘시한부 검거령’의 역할이 컸다. ‘감히 어디 경찰 가족을 건드려’라는 분위기가 더해지면서, 동네 경찰 모두가 이 사건에만 매달렸다. 분위기상 범인을 만들어서라도 사건을 종결해야 했다.

경찰이 가짜 범인으로
원섭을 지목했다

원섭을 범인으로 만들기 위해 증거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모든 증거를 퍼즐처럼 원섭에게 끼워 맞췄다. 심지어 9살 난 원섭의 아들까지 증거 조작에 동원했다. 사건 현장에 있던 연필과 첫째 아들 정재호의 연필을 바꿔치기했다.

음모의 혈액형과 원섭의 혈액형이 달랐지만, 경찰은 의도적으로 이 사실을 조서에서 뺐다. 원섭의 무고를 입증하는 증거를 일부러 숨긴 셈이다. 대신 경찰은 현장에서 발견된 음모의 모양이 원섭의 음모와 유사하게(?) 생겼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들어 원섭을 용의자로 특정했다.

“네 놈이 그 아이를 욕보인 거 아니야? 빨리 말해!”

경찰은 이마저도 부족했는지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했다. 잠을 재우지 않고 밥도 안 줬다. 책상 사이에 봉을 끼우고 몸을 대롱대롱 매다는 일명 ‘통닭구이’ 고문을 하기도 했다. 원섭은 버틸 수가 없었다. 원섭은 가혹행위를 견디다 못해 사흘 만에 결국 허위 자백을 했다.

법원도 사건 조작의 동조자나
마찬가지였다

원섭이 허위 자백을 강요받았다고 법원에서 초지일관 말했지만, 법원은 원섭의 호소를 묵살했다. 다른 참고인들 또한 법정에서 원섭의 호소를 뒷받침해주는 말을 쏟아냈지만, 법원은 그런 이들을 되려 위증 혐의로 구속했다. 1973년 11월 27일, 대법원은 기어코 원섭에게 강간치사죄를 적용해 무기징역형을 내렸다. 아내와 네 아이를 남겨둔 채 수감소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던 원섭은 억울함을 못 이기고 수차례 자살을 시도했다. 시멘트에 머리를 들이받고, 유리조각으로 동맥을 끊으려 했다.

15년 2개월 7일의 수감생활은 원섭을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시키는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교도소 문을 나왔을 때 미닫이 문을 열려면 문고리를 돌려서 밀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를 정도였다.  사회는 빠르게 바뀌었고 원섭은 점차 뒤처져갔다.

정원섭(84세). 안성의 한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다. ⓒ주용성

시효가 바뀌어서 ‘26억 원’ 못 준다

무고함을 인정받기까지 34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년 11월 원섭의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그 후 재심을 신청한 원섭은 2011년 10월 드디어 무죄판결을 받아냈다. 두 번째 재심 신청에서 얻어낸 값진 결과였다.

그 후 형사보상금을 지급받는 데까지는 모든 게 순탄했다. 2012년 5월 18일 법원은 원섭의 억울한 옥살이에 대해 9억6000여만 원 보상을 결정했다. 형사보상금은 네 번으로 나뉘어 원섭에게 전달됐다. 2012년 6월 8일 처음 지급받고 2012년 10월 19일 비로소 모든 형사보상금을 수령했다.  

형사보상은 말 그대로 형사 당국의 과오로 누명을 쓰고 형을 산 이에게 주는 돈이다. 누명 이후 원섭과 가족들이 겪은 경제적, 정신적 피해 보상은 포함되지 않았다. 원섭은 국가배상소송에서 승소해 가족들에게 끔찍했던 과거에 대해 돈으로라도 위로하고 싶었다.

정원섭(84세). 안성의 한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다. ⓒ주용성

“형사보상18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 내에 손해배상을 신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26억 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1심에서 무난히 승소를 거둔
국가배상 청구 소송은
돌연 2심에서 뒤집어졌다

2014년 1월 23일 법원이 내세운 근거는 황당했다. 1심 소송 당시까지는 형사보상결정일로부터 3년 안에 손해배상 청구를 하면 됐지만, 2심이 진행되는 사이에 3년이란 기간이 6개월로 바뀌는 판례가 생겼다며 26억 원 배상금 지급을 취소한 것이다.

서울중앙지법에 원섭이 국가배상을 청구한 날짜는 2012년 11월 18일, 서울고등법원이 근거로 내세운 판례가 선고된 날짜는 2013년 12월 12일이었다. 즉 ‘미래에 바뀔 판례’를 대비해 일찍 소송하지 않았다는, 납득하기 어려운 근거를 들어 26억 원을 앗아간 셈이다.

딱 ‘열흘’ 차이였다. 형사보상과 손해배상 사이에 통상 3년이란 여유기간이 있으니, 거기에 맞춰 소송을 준비했지만, 그 기간이 6개월로 바뀌면서 딱 ‘열흘’ 차이로 국가배상금을 받을 수 없었다. 대법원도 같은 판결을 내렸다. 누구도 예상 못 한 법원의 막무가내식 선고였다.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은 아내, 아버지를 죄인으로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아들, 아버지에게 몇 번 안기지도 못한 채 학창시절을 보낸 자녀들은 결국 국가로부터 어떠한 위로금도 받지 못했다. 평생을 원섭의 명예 회복에 힘쓴 가족들은 바닥에 다시 주저 앉았다.

“도대체 왜 국가는 국가배상금을 뺏어갔을까”

원섭은 그 후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언론사와 국회를 돌며 억울함을 알렸다. 하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사건 담당 변호사는 물론이고 국회의원도 ‘왜 법원이 갑자기 2심에서 태도를 바꿨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원섭은 판결문에 적힌 법관의 이름을 바라보며 신세를 한탄했다.

정원섭(84세). 안성의 한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다. ⓒ주용성

배상받지 못한 ‘한(限)’… 아들에게 한풀이

내가 정원섭 선생님께 다시 전화를 건 것은 근 1년 만이었다.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을 조사한 사법부 특별조사단이 3차 보고서를 낸 직후였다. 보고서 내용을 알리기 위해 건 전화였다. ‘드디어 왜 사법부가 26억 원의 배상금을 주지 않으려고 했는지 알게 됐다’는, 비보인지 희소식인지 모를 말을 하고자 휴대전화를 들었다.

“선생님, 저 예전에 선생님 기사를 썼던 이 기자입니다. 잘 지내시지요?”

“안녕하세요? 아버지가 얼마 전에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제가 모시고 있어요.”

정 선생님의 전화를 대신 받은 사람은 뜻밖에도 첫째 아들 정재호(63년생) 씨였다. 정 선생님의 기사가 나가고 얼마 안 돼 정 선생님이 뇌출혈로 쓰러졌고, 그 후 치매를 진단받아 현재 안성의 한 요양원에 계신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사건이 벌어졌던 당시, 아들 정 씨의 나이는 불과 9살이었다.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정 씨의 연필을 가져와서 죽은 아이 근처에서 발견된 연필이라며 사건을 조작했다. 아빠 원섭이 아들의 연필을 우연히 가지고 있다가, 경찰서장 딸을 살해한 뒤 현장에 그걸 흘렸다고 주장했다.

연필 주인인 아들은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정 씨는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았다. 쉰이 넘어서도 그 일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다 큰 자식들에게도 말하지 못할 정도로 치부로 여겼다.

정 씨가 사는 화성시 동탄에서 요양원이 있는 안성까지는 차로 1시간 남짓 걸렸다. 이동하는 내내 대화 주제는 강간 살인범 가족으로 살아가면서 느낀 비애였다. 아버지가 수감되고 쫓겨나듯 춘천에서 빠져나와 판자촌 생활을 이어간 사연, 공사장에 일하러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 다리를 절단하게 된 어머니 이야기를 하며 빌딩숲을 가로질렀다.

대화는 자연스레 현재로 이어졌다. 뇌출혈 때문에 아버지에게 갑자기 찾아온 치매는 많은 것을 앗아갔다.명예 회복을 위해 평생을 싸워온 아버지가 최근에는 애꿎은 아들에게 화풀이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때 네 연필만 아니었으면, 내가 감옥에 가는 일은 없었다”면서 아들 가슴에 비수를 꽂는 일이 잦아졌다고 고백했다.

“머리를 바닥에 피가 나도록 박으면서 석고대죄를 하라고 하세요…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솔직히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겠더라고요. 제가 어떻게 견뎠는데.”

자기 인생과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날려버리고도 반성하지 않는 국가. 그 원한과 아쉬움을 가족들에게 풀고 있다는 아버지 이야기하면서 정 씨는 운전대를 더욱 꽉 움켜줬다. 서운함과 분노가 교차하는지 가속 장치를 밟으며 한숨을 여러번 토했다.

정원섭(84새) 씨 아들 정재호(55세) 씨 . ⓒ주용성

“사법부가 아니라 개법부다”

모내기가 한창인 논을 가로지르자, 요양원 하나가 나타났다. 차 문을 열자마자, 근처 젖소 농장에서 풍기는 가축 분뇨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요양원 안으로 들어서자 복도에서부터 많은 어르신이 보였다.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고, 누군가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사실 나는 아들 정 씨가 “아버지”라고 부르기 전까지 누가 정원섭 선생님인지를 찾지 못했다. 아들 목소리를 듣고 곧장 자리에 일어선 어르신을 보고 한참 시선을 떼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앙상해진 다리, 깊어진 주름.. 1년 동안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정 선생님도 몇 초간 가만히 내 얼굴을 응시했다. 뒤늦게 누구인지 떠오른 듯 반갑게 안부 인사를 건넸다.

“이… 기자님… 여기… 어떻게… 나는… 아들이… 요양원으로…”

순간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작년,정 선생님은 내게 한홍구 교수가 쓴 책 <역사와 책임>을 건넸다. 현대정치사에 관심이 많은 정 선생님은 만날 때마다 “공부하라”며 읽을거리를 한 움큼 주셨다. 하지만 지금 정 선생님의 모습에서는 그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뇌출혈과 치매가 부른 후폭풍은 컸다.

“선생님, 저 기억 나시죠? 선생님께 안부 인사도 드리고, 중요한 말씀을 드리려고 왔어요.”

“그럼… 저기… 의자… 병실… 나 좀 같이…”

정원섭(84세). 안성의 한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다. ⓒ주용성

3평 남짓한 공간에 놓인 두 침대 사이에 간이 의자를 두고 앉았다. 정 선생님은 말하기는 들어하셨지만  다행히 듣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건강 문제 때문에 사법부 재판거래 의혹을 모를 거라 생각했다. 사법부 자체 조사단의 1~3차 발표 내용과 최근 법원행정처 PC에서 발견된 문건에 대해 설명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왜 26억 원을 못 받으셨는지 알게 됐어요. 사법부가 박근혜 정부에게 잘 보이려고 과거사 피해자들이 국가배상을 못 받게 하려 사법부가 내부적으로 재판 통제를…”

예상과 달리 정 선생님은 최근 사법부의 재판 거래 의혹을 알고 있었다.  문장을 온전히 완성하지 못했지만, 박근혜와 양승태라는 이름이 단어와 단어 사이에 자주 등장했다. 정 선생님은 가슴을 치며 말했다.

“양승태에게… 손해배상… 해야 해요… 박근혜…. 감옥…”

더듬더듬 이어나간 다음 화제는 1차 사법파동이었다. 치매를 앓고 있지만 그때의 일을 정확하게 묘사했다. 사법파동의 발단이 된 이범렬 부장판사의 묘소를 직접 다녀온 적이 있다며 첫 번째 사법 독립을 위한 투쟁을 높게 평가했다.  

<1차 사법파동>

1971년 벌어진 1차 사법파동은 반공법 위반사건에 과감히 무죄를 선고하는 양심적인 법관, 이범렬 부장판사에 대해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하면서 벌어졌다. 사건 직후 판사들은 이를 명백한 사법부 탄압이라고 보고 집단 사표를 제출했다. 사표를 제출한 판사는 전국 법관의 3분의 1 수준인 150여 명이었다.

“이범렬 판사… 알아야 돼… 양심 사법부가… 공안 사건 거부… 그때 있었어… 판사들… 집단… 사표… 독립… 독립성…”

독립이란 단어 나왔을 때 갑자기 정 선생님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깊게 패인 주름 위로 눈물이 툭 떨어졌다.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답답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지금의 사법부가 그 때의 사법부보다 못나서 였을까? 정 선생님은 눈물을 훔치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개법부야… 정권의 개… 개법부”

정원섭(84세). 안성의 한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다. ⓒ주용성

‘합리적인 과거사 정립’이란 과연 무엇인가

2015년 11월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상고법원 입법 추진을 위한 협상 추진 전략’ 문건을 보면 ‘사법부가 VIP(대통령)와 BH(청와대)의 원활한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최대한 협조해 온 사례를 상세히 설명’하겠다면서 내세운 첫 번째 근거가 ‘합리적 범위 내에서의 과거사 정립’이다. 친절하게 그 방법이 무엇인지도 가로 안에 적시했다. ‘국가배상 제한’을 통해 합리적인 범위 내에서의 과거사 정립을 하겠다고 썼다.

2015년 7월 31일 ‘정부 운영에 대한 사법부의 협력 사례’ 문건에도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 ‘사법부는 그동안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해왔다’면서 그 근거로 ‘부당하거나 지나친 국가배상을 제한하고 그 요건을 정립했다’고 제시했다.

아들 정재호 씨는 조만간 아버지를 모시고 살 투룸 집을 구할 생각이다. 낮에는 아버지를 돌보고, 밤에는 치킨집을 운영할 예정이다. 막내 동생도 최근 직장을 그만두고 치킨집을 같이 운영하고 있다. 아버지의 요양 비용을 벌기 위해 형제는 새벽까지 일해야 한다. 정재호 씨 자기만이라도 아버지의 과거를 위로하고 싶어 결정한 일이다.

과연 사법부가 말한 ‘합리적인 범위 내에서의 과거사 정립’은 이런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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