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전노예 사건을 다루는 다음 기사의 주인공은 자신이란 걸 눈치 챘을까? 3개월 전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고 내 번호를 차단한 염전주인이 10일 오전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10월에 저한테 연락했던 기자 맞죠? 경찰에서 다 합의하고 끝난 사건이고, 우린 (돈) 줄 거 다 줬는데….”
그의 목소리는 한 방송사 다큐멘터리에서 화목한 가족의 일원으로 등장했을 때와 달리 경쾌하지 않았다. 그는 “우린 (염전노예에게) 월급을 다 줬다, 때린 적도 없다”고 강조했다. 그에게 물었다.
“월급 다 줬고 때린 적도 없으면 합의할 것도 없을 텐데, 경찰서에서 뭘 합의했다는 겁니까?”
염전주인은 같은 취지의 말을 반복했다. 그는 “직업소개소에 소개비를 준 것이지, 인신매매는 하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다시 물었다.
“어머님이 운영하는 건설회사에서 (염전노예) 이재호(가명, 1980년생) 씨 일하도록 시키셨죠? 그때도 돈 안 주시고….”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지난 10월처럼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달라진 건 없다. 당시에도 그는 “돈 줄 거 다 줬고, 피해자는 (염전노예가 아니라) 우리”라고 주장했다.
TV 속에서 더없이 서로를 아끼고 헤아리던 그 섬의 ‘소금꽃 가족’ 조수형(가명)-김미현(가명) 부부. 여기에 조 씨의 장모 한복자(가명). 이들이 염전노예를 어떻게 대했는지 화면에 담기지 않은 이야기를 지금부터 풀어보겠다.
조 씨 부부 밑에서 일한 염전노예는 이재호. 진실탐사그룹 셜록이 기획 ‘서칭 포 솔트맨’ 9화 기사에서 다룬, 섬에서 네 차례 탈출을 시도했던 그 인물이다. 어렵게 섬을 떠났는데, 그는 왜 또 나타난 걸까?(관련기사 : <염전노예를 잡아라… 주민과 경찰의 ‘토끼몰이’ 합동작전>)
이재호가 네 번의 탈출 시도 끝에 겨우 섬을 떠난 게 2013년 10월 8일께다. 노예 생활을 벗고 사람답게 살고자 경기 포천시 고향땅의 부모님 산소를 찾아 인사도 했다. 인간답게 살려면 일자리가 있어야 했다. 이재호는 일을 구하러 광주의 버스터미널을 돌아다니다 사람을 염전 등에 팔아넘기는 일명 ‘휘빠리’를 만났다.
그의 실체를 몰랐던 이재호는 휘빠리의 안내대로 목포여객터미널에서 배를 탔다. 두 시간쯤 바다 위를 달리자 한 섬의 윤곽이 눈에 들어왔다. 어딘가 익숙했다. 배가 조금씩 선착장에 다가갈수록 불안은 확신이 됐다.
‘이 지옥 같은 섬에 내가 다시 왔구나.’
설마 다시 그 섬으로 갈까 싶었는데, 역시나 그 섬이었다. 이때가 10월 20일께였으니, 이재호는 “지옥 같은 섬”으로 약 2주 만에 돌아온 셈이다. 이토록 허무한 일이 또 있을까.
배에서 내린 이재호는 염전주인 장용출(가명)의 집으로 갔다. 다시 염전 노동이 시작됐다. 장용출의 염전은 규모가 꽤 컸다. 이재호를 포함해 노동자 5~6명이 일했다.
장용출의 염전은 그나마 지낼 만했다. 월급을 안 주고, 다른 염전에서 일한 대가인 일당을 빼앗아가는 건 이전과 같았지만, 장용출은 사람을 때리지 않았으니까. 다만, 이재호를 두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장용출은 이재호에게 묻지도 않고, 그를 조수형의 염전으로 보내버렸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그는 120만 원을 받고 이재호를 팔았다. 그들은 이재호의 눈앞에서 돈을 주고받았다.
이재호는 당시 상황을 2014년 3월 24일 전남경찰청 광역수사대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장용출 염전에서 일하고 있는데 조수형이 왔습니다. 장용출이 ‘조수형 염전으로 가 소금 좀 담아줘라’라고 해서 따라갔는데, 염전으로 가지 않고 조수형의 집으로 저를 데려갔습니다. (조수형이) 하는 말이 ‘내가 너를 샀다, 너는 여기서 일해야 하니까 열심히 해라’고 해서 너무나 황당했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저를 팔아넘긴 겁니다.”
두 염전주인은 이재호를 데리고 농협에도 갔다. 장용출은 자기 멋대로 계산했다.
“소개비는 100만 원이고, 작업복 사준 거 10만 원, 가불 10만 원…. 합이 120만 원.”
조수형은 현금을 인출해 ‘이재호 몸값’을 치렀다. 당시 심정을 이재호는 전남경찰청 광역수사대에서 이렇게 밝혔다.
“내가 노예도 아니고, 사람을 돈을 주고 사고파니까 죽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거래가 끝났으니 이제부터 본격적인 노동의 시간. 이재호는 자기가 한 일을 이렇게 짧게 설명했다.
“형님(조수형) 심부름도 하고, 염전에서 삽질을 하고, 내리까리(염전 물 평탄작업)도 하고, 소금도 담고, 남의 집 포장작업도 다니고, 남의 집 내리까리도 다니고, 이모(한복자)의 도로공사 일도 다녔습니다.”(2014년 3월 24일 전남경찰청 광역수사대 진술)
이재호는 염전주 가족을 “형님”, “이모”, “누나”(조수형 아내 지칭)라 불렀다. 염전주 쪽이 “남들이 봤을 때 가족처럼 보여야 한다”며 “편하게 부르라”고 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수형은 남들 앞에서 이재호를 가족으로 대하지 않았다.
“저한테 말하는 것과 (달리) 쓰다듬어 주면서도 남한테는 저를 ‘바보’라고 말하고, 형님(조수형)이 저를 때린 것은 제가 편해서 그랬다고 하는데, 저는 이해가 안 됩니다.”(2014년 3월 24일 전남경찰청 광역수사대 진술)
이재호는 조수형 밑에서 노동하며 남의 집 염전으로 ‘내리까리’ 작업, 소금 포장 일도 다녔다. 내리까리는 염전에서 쇠봉을 끌며 소금물을 평탄하게 하는 작업인데, 논밭에서 소가 쟁기질을 하는 것처럼 고된 일이다. 그래서 하루 일당은 약 30만 원 정도 한다. 소금 포장 역시 하루 일당은 5만 ~ 7만 원이었다.
하지만 이재호 주머니로 들어오는 돈은 거의 없었다. 돈을 받으면 모두 조수형에게 줘야 했고, 일당이 아예 염전주 통장으로 입금되기도 했다. 조수형이 선심 쓰듯 “담뱃값이나 하라”고 가끔 주는 5000원, 1만 원이 이재호 수입의 전부였다.
조수형의 장모 한복자는 섬에서 작게 건설업도 했다. 그는 염전노예 이재호를 건설노동자로도 부려먹었다. 이때도 그는 가족을 들먹였다.
“다 같은 가족이고, 식구니까 가서 일 좀 해라.”
이재호는 자신이 어디에서 어떤 노동을 했는지 똑똑히 기억했다.
“2014년 1월 초순 ○○리 도로 양쪽 포장공사를 두 차례 했습니다. 같은 해 2월에는 폐기물처리장 앞 수로공사 75m 구간 현장에서 일주일 동안 일했습니다. 3월 10일께는 ○○리 수로공사 25m 구간에서 일했고, 논두렁 수로 옹벽공사 80m 구간에선 일주일간 일했습니다.”(2014년 3월 24일 전남경찰청 광역수사대 진술)
한복자 역시 딸과 사위처럼 이재호에게 일당을 주지 않았다. 이 가족은 돈을 주지 않으면서 이재호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때리기도 했다.
“염전에 사용하는 판자를 가져오라고 (조수형이) 시켰는데, 제가 잘못 가져오니 ‘야, 너는 시킨 것도 똑바로 못하냐, 이 개새×야!’라고 했습니다. 제가 혼잣말로 중엉거리니까 ‘개새×야, 너 말대꾸하냐’고 하면서 주먹으로 뒤통수를 두 대, 가슴을 열 대 정도 때렸습니다.”(2014년 3월 24일 전남경찰청 광역수사대 진술)
이재호는 “(조수형이) ‘자진납세’도 지시했다, 자진납세는 (염전주가) 때리기 전에 내가 나를 때리는 것이다”라며 “자신납세를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2014년 염전노예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뒤에야 이재호는 3개월 노동의 대가를 받았다. 염전주 가족은 다시 이상한 셈법을 동원했다.
“너한테 줄 게 350만 원인데, 방값, 밥값, 옷값, 간식비를 제외하면… 50만 원 남네. 이게 네 몫이야.”
조수형의 염전과 장모 한복자의 공사현장, 여기에 이웃 염전에서 내리까리 작업과 소금 포장까지…. 그 대가는 고작 50만 원이었다. 이재호는 경찰 수사 때 조수형 등 염전주에 대한 법적 처벌을 요구했다. 경찰은 그에게 섬에서 무엇이 가장 힘들었냐고 물었다.
“맞고, 무시당하고 노예처럼 대하는 것이 제일 힘들었습니다. 사람을 편하게 대해줘야 하는데, 저 같은 사람을 장난감처럼 대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2014년 3월 24일 전남경찰청 광역수사대 진술)
이재호는 2013년 초부터 약 1년 2개월 동안 섬에서 일했다. 그 작은 섬에서 그를 노예처럼 부린 염전주인은 세 명, 그가 일당 노동을 나간 곳까지 합하면 열 명이 넘는다. 섬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공동으로 이재호를 노예처럼 부려먹은 셈이다.
이재호는 2017년 즈음 서울 동자동 고시원에서 살았다. 그는 종종 고시원 옥상에 올라가 서울역 인근을 바라보며 “내가 왜 이렇게 살았을까” 자책하곤 했다. 자책도, 후회도 모두 염전노예 이재호의 몫일 뿐이다.
염전주인들은 “우리가 그 사람에게 왜 그렇게 모질었을까” 식의 후회 같은 건 하지 않는 듯하다. 10일 연락을 해온 염전주인은 당당했다. 내가 “이재호 씨를 사오신 거죠?”라고 묻자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사온 거라니… 기자분이 말씀하시는 게 잘못된 거 아닙니까? 직업소개소에서 데리고 온 거지, 꼭 인신매매처럼 이야기하시네요.(웃음)”
이 염전주인은 내가 경찰 수사기록을 갖고 있다는 걸 모르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직업소개소를 통하지 않았다. 그에게 구체적인 금액을 들며 다시 물었다.
“그게 인신매매 아닌가요?”
“무슨 인신매매예요!”
“장용출 씨한테 120만 원 주고 이재호 씨 데리고 왔잖아요. 그게 인신매매 아닌가요?
“(머뭇)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건 그분(장용출)과 이야길 해야 하는 거라서….”
“남편(조수형) 분에게 한번 물어보면 좋겠습니다. 장용출 씨에게 120만 원 줬는지요. 그게 인신매매잖아요.”
“그게 어떻게 해서 인신매매인가요?”
“사람을 120만 원 주고 사오고….”
“그 사람(이재호)이 우리 집에 올 때 그쪽(장용출)에 줄 게 있거나 해서 줬겠죠. 120만 원 주고 사왔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말이 안 되는 일이 그 섬에서 벌어졌잖아요.”
“저희 섬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말씀이세요?”
그 섬에서 벌어진 2014년 염전노예 사건에 대해, 해당 섬 주민에게 설명을 해야 하는 답답한 상황. 지난해 10월 그가 내게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섬 주민들은 대체로 비슷한 말을 했다.
“우린 돈 다 지불했구요. 피해자는 우리거든요?!”
박상규 기자 comune@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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