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종상(77세) 올해 ‘광정(匡正)’이란 말을 생애 처음 들어봤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이던 2015년 7월 27일,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문건 ‘과거 왜곡의 광정’에서다. ‘광정’의 뜻은 ‘바로잡아 고치는 것’이다. 과거가 왜곡됐으니 이제는 제대로 돌려놓자는 말이다.
문건에서 광정의 사례로 나온 것 중 하나가 바로 ‘긴급조치’다. 오 씨의 인생을 박살 낸 사건명이 법원행정처 문건에 등장했다.
오 씨는 긴급조치 1호 피해자다. 막걸리를 마시다 바른 소리 한 번 해도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는 통에 긴급조치는 ‘막걸리 보안법’이라 불렸다.
오 씨는 명예회복을 위해 평생 싸웠다. 재심을 추진할 때는 직접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변호사들을 찾아가 설득했다.
오 씨의 노력으로 헌법재판소가 움직였다. 긴급조치 1,2,9호가 위헌이라는 걸 최초로 이끌어냈다. 2013년 3월 21일, 헌재는 재판관 8명 전원일치로 긴급조치 1,2,9호에 대해 위헌을 결정했다.
그보다 앞선 2010년 12월 16일, 대법원은 오 씨의 무고함을 인정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긴급조치와 반공법 위반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오 씨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긴급조치 위헌성을 인정한 첫 판결이었다.
오 씨의 인생에 처음으로 빛이 드는 순간이었다.
‘그래, 막걸리 보안법은 잘못됐으니 바로잡는 게 맞지.’
오 씨는 사법부 문건에 나오는 ‘광정’은 위헌 결정 난 긴급조치일 거라 생각했다. 헌법재판소는 긴급조치에 대해 위헌을 결정하면서 “긴급조치가 선포된 절차와 내용 모두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영장주의 등 현행법의 기본원칙에 어긋난다”고 이유를 밝혔다. 오 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대법원 또한 “긴급조치는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했다”고 했다.
사법부 문건을 자세히 보니, 광정의 대상은 그게 아니었다. 긴급조치와 같은 국가폭력 피해자들에게 배상금 주는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문건에는 ‘부당하거나 지나친 국가배상을 제한하고 그 요건을 정립’하는 방식으로 대법원이 ‘합리적인 범위 내에서 과거사 정립’을 해왔다고 적혀 있다.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
청와대와 재판을 거래하는 듯했다
“긴급조치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 판결을 내린 김 모 부장판사에 대해서는 징계를 검토했다”
사법부가 밀실에서 논의한 내용은 충격적이다. 대법원이 긴급조치 9호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 판결을 내린 1심 판사에 대해 징계를 검토한 사실이 드러났다. “해당 판사의 행동이 매우 부적절하다며 직무윤리 위반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문건에 적시돼 있다.
이 일에는 해외 연수 중인 판사들까지 동원됐다. 해외에 있는 판사들에게 연락해 “외국 법원에서는 판사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징계를 내리는지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문건에는 후속 조치 방안도 제시돼 있다. 법관들에게 판례를 따라야 한다는 구속력을 고취시키기 위한 연수를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왜 대법원은 내게 국가배상금을 주지 않았을까’
오 씨는 재판 거래 의혹이 공개된 이후 ‘모든 퍼즐이 맞춰줬다’고 생각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저릿한 왼쪽 다리를 바라보며 펴지지 않는 허리를 억지로 곧추 세웠다. 재심때부터 함께한 조영선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 변호사, 사법부는 이제 믿을 게 못 돼. 국회에서 특별법을 만들어 구제하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 같소.”
‘분식 장려 반대했다’고 3년 형 징역
1974년 5월, 사건이 벌어진 그때는 중앙정보부가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에 인혁당이 있다고 발표한 직후였다. 장준하, 백기완 등이 유신헌법 개정을 요구하다 감옥에 끌려갔다.
박정희 대통령은
대중의 입을 막고자
긴급조치를 연속 발동했다
당시 33살이던 오 씨는 토끼를 키우며 평택에서 살았다. 유신헌법을 반대하던 친구들을 숨겨주다 탄로가 나 가족과 함께 서울에서 시골로 내려온 것이다. 오 씨는 직접 민주화운동에 나서진 못해도 숨은 지지자였다.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유신 시대를 어떻게든 끝내고 싶었다.
사건은 버스에서 우연히 발생했다. 고등학생 몇 명의 대화에 오 씨가 끼어들었다. 오 씨가 “어디 가냐” 물었고, 학생들은 평택교육청에서 열리는 웅변대회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학생, 웅변 주제가 뭐라고?”
“반공, 근면, 분식 장려, 저축, 이렇게 네 가지입니다.”
“아저씨가 진실 하나 말해 줄까? 아무리 샐러리맨들이 쥐꼬리 같은 봉급을 저축해도, 은행이 특정인에게 대출하면서 허비해 버리면 끝이야.”
“무슨 말씀이세요? 학교에서는 그렇게 말하면 빨갱이라고 했어요.”
“분식 장려에 관해서도 얘기해 줄까? 서민들에게만 분식을 장려해. 부자들은 계란하고 육류가 태반인 분식을 먹는데, 어떻게 국민들이 정부 시책에 순응하겠니? 이런 얘기를 웅변 내용에 담으면 좋겠다.”
학생들과의 에피소드는 이렇게 끝났다. 오씨는 다시 토끼를 먹일 풀을 베고, 토끼에게 밥을 주고, 토끼를 시장에 내다 팔며 생계를 이어갔다.
버스에서 만났던 학생들이 닷새 후 오 씨 집으로 찾아왔다. 뜬금없이 “데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오 씨는 당황스러웠지만 보고 들은 사실 그대로 학생들에게 대답했다.
“데모하면 구속되고 고문당한다.”
학생들에게 오 씨를 다시 찾아가라고 지시한 사람은 도덕 교사 우아무개였다. 우 교수는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반공사상을 가르쳤다. 우 교사는 학생들 노트에서 본 오 씨의 발언을 자신의 노트에 옮겨 적어 1974년 6월 2일 중앙정보부에 찾아가 오 씨를 정부 비판자라고 신고했다.
오 씨가 “토끼에게 먹일 풀을 베러 간다”며 나간 사이, 중앙정보부 사람 2명이 오 씨 집을 찾았다. 부인 김아무개 씨는 놀라 바닥에 주저앉았다. 검은 잠바를 입은 중앙정보부 사람들은 방을 뒤져 용공 서적이라면서 책 몇 권을 가져갔다. ‘김대중’ 이름이 적힌 화환이 찍혔다는 이유로 결혼식 사진을 압수했다.
집에 돌아온 오 씨는 속옷 바람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아내 김 씨는 다섯 살, 세 살 아들의 손을 잡고 떨었다. 남편을 끌고 가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어디로 끌고 가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약 일주일 후, 구속통지서가 집으로 배달됐다. 아들 둘은 아빠를 잃은 것처럼 밤새 울기만 했다.
‘고문’으로 망가진 몸 때문에 평생 ‘무직’
오 씨가 유독 심한 고문을 당한 건, 처남 때문이었다. 처남 김아무개 씨는 ‘서울대 내란예비음모사건’에 연루돼 도피중이었다.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은 온갖 고문을 하며 처남 김 씨의 소재를 알아내려 했다. 잠을 안 재우고, 양 무릎 사이에 각목을 X자로 넣어 허벅지를 눌렀다.
“너 같은 건 죽여서 바다에 던지면 쥐도 새도 몰라. 상처 안 나게 골병 들게 해줄게.”
수사관 2명씩 총 4명이 교대로 오 씨를 고문했다. 그중 가장 끈질기게 고문한 수사관의 얼굴을 오 씨는 지금도 기억한다. ‘만약 죽어서 귀신이 된다면, 팽아무개 고문관 만큼은 기필코 데려 간다’는 심정으로 얼굴을 보고 또 봤다. 실제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위원들이 2007년 6월, 오 씨에게 “팽 씨 얼굴을 사진에서 찾아봐라”고 했을 때 단번에 짚어낸 것도 그 때문이다.
고문은 오 씨의 의지를 꺾었다. 끝내 허위자백을 했다. 대법원은 1975년 2월 10일, 오 씨에게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을 확정했다. 법원은 오 씨의 억울한 호소를 단 한 번도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표현과 신체의 자유 등 기본권은 법정에서 사치에 불과한 말이었다.
오 씨는 1977년 7월 6일
만기출소했다
그사이 부인은 아이 둘을 오 씨 가족에 맡기고 집을 떠났다. 오 씨에게 남은 건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뿐이었다. 고문으로 휜 척추가 신경을 눌러 직업을 구할 수 없었다. 당연히 생활이 어려웠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에게 줄 음식이 없어 동사무소에서 받은 쌀과 라면으로 끼니를 겨우 때웠다. 이마저도 떨어지면 보리밥에 싸구려 버터를 발라 아들 둘과 간시히 허기를 면했다.
‘민주화보상금’ 받았으면 ‘국가배상’ 자격 없다는 대법원
가난이 턱 밑까지 찼을 때 민주화운동 보상금이 나왔다. 오 씨는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생활지원금을 신청해서 2006년 6월 22일, 4200여만 원을 받았다. 재혼으로 만난 아내 성 씨가 교통사고를 당해 아픈 다리로 식당일을 하던 때였다.
큰 돈은 아니었지만, 정부의 생활지원금은 오 씨 가족에게 가뭄의 단비였다.
과거사위원회는 오 씨의 명예회복 길을 열어줬다. 2007년 10월 30일, 과거사위원회는 “오 씨의 긴급조치 사건에 대해 중대한 인권침해가 있었다”며 “국가가 오 씨와 가족에게 명예회복을 비롯한 적절한 조치를 해줘야 한다”는 ‘진실규명’ 결정을 통보했다. 사건이 터지고 33년 만에 국가가 잘못을 인정한 셈이다.
그 후 재심부터 형사보상금 지급까지 탄탄대로였다. 2010년 1월 28일, 재심이 결정됐다. 2010년 12월 16일, 대법원은 오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2011년 3월 11일, 대법원은 헌법에 보장된 권리에 따라 오 씨가 구금됐던 1123일에 대한 손해를 보상했다. 형사보상금 약 1억8000여만 원이 지급됐다.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가 태도는 달라졌다.
오 씨 처지에서 국가의 논리는 해괴했다. 오 씨가 국가로부터 생활지원금을 이미 받았으니 배상을 요구할 자격이 없다며 2012년 5월 3일, 1심 법원은 각하결정을 내렸다. 민주화보상금을 받은 것은 재판상 화해를 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국가의 배상 책임은 없다고 서울중앙지법은 판단했다.
2심은 다르게 판결했다. 서울고등법원은 2012년 12월 21일, 민주화보상의 재판상 화해 대상을 민법상의 손해배상 청구권까지 확장하는 건 지나치다며 1억1500여만 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의 판결만 남은 상황에서 2013년 3월 21일, 헌법재판소는 “긴급조치 1,2,9호는 위헌이다”고 결정했다. 헌법소원을 제기한 사람은 오 씨였다. 헌재의 결정으로 긴급조치 피해자들은 이전보다 재심을 청구하기 수월해졌다.
오 씨는 헌재의 결정에 마음이 부풀었다. 1심 판결 이후 오 씨는 법원에 민주화운동보상법 제18조 제2항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제청 신청을 한 상태였다. 위헌법률심판제청을 통해 “민주화보상금은 생활을 보조하기 위한 지원금일 뿐, 이걸 재판상 화해가 성립했다고 보고 국가배상청구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헌법에 위반한다”고 주장했다.
“아무래도 대법원이 헌법재판소의 긴급조치 판결이 미웠던 것 같습니다”
기대와 달리 대법원은 헌법재판소와 정반대 결과를 냈다. 대법원은 2016년 5월 12일, 위헌법률심판제청을 기각한 동시에 국가가 오 씨에게 배상을 할 필요가 없다고 자판했다.
1심과 같은 논리였다. 얼마가 됐든, 민주화 보상금을 받은 것은 국가와 합의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배상을 하면 중복 지급이 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2심 판결이 나오고, 무려 3년 6개월 만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오종상 씨의 손해배상청구에 대한 대법원 판결문 일부>
신청인이 위원회의 보상금 등 지급 결정에 동의한 때에는 민주화보상법 제18조 제2항에 따라 위자료를 포함하여 그가 보상금 등을 지급받은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입은 피해 일체에 대하여 민사소송법의 규정에 의한 재판상 화해와 동일한 효력이 발생한다고 할 것이다… 원심판결 중 원고 오종상에 관한 부분을 파기하되, 이 부분은 대법원이 직접 재판하기에 충분하므로…
2년 동안 대답 없는 헌법재판소
양승태 대법원장이 취임하고
대법원은 시종일관
긴급조치를 옹호했다
2015년 3월 26일 선고된 대법원 판결문을 보면 ‘유신헌법에 근거한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 행위’로, ‘대통령의 이러한 권력 행사가 국민 개개인에 대한 관계에서 민사상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국가배상 책임이 없다고 한 것이다. (2012다48824판결)
앞서 2014년 10월 27일 선고된 대법원 판결문 또한 ‘긴급조치가 당시로는 유효한 법규였던 만큼 이를 따른 공무원의 직무 행위가 곧바로 불법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면서 국가의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였다. (2013다217962판결)
“찢어지게 가난해서 민주화보상금으로 빚 먼저 갚았는데, 그때 누가 재심을 해서 국가배상 신청할 걸 예상해요. 그때 오히려 민주화보상금 못 받은, 상대적으로 부유했던 사람들은 국가배상 받을 수 있어요. 저와 다르게.”
오 씨의 위헌법률심판재청이 기각되면서 민주화보상법에 대한 위헌 결정 여부는헌법재판소의 몫으로 넘어갔다.
2년 가까이 헌재는 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헌재가 민주화보상법에 위헌결정을 내리면, 오 씨는 대법원에서 다시 손해배상 소송을 이어갈 수 있다. 오 씨가 국가배상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이자 유일한 방법이다.
헌재의 위헌 여부 결정은 의미가 크다. 오 씨와 비슷한 사정의 여러 사건이 현재 재판 중이거나 재판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 씨와 비슷한 이유로 재판에서 진 사례는 총 18건이다. 오 씨가 제기한 헌법소원 결과에 따라 많은 이들의 운명이 바뀐다.
과연 헌법재판소는 어떤 결정을 내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