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삼(86, 남)은 하루 한 끼, 동네 복지원에서 제공하는 밥을 먹는다. 복지원이 쉬는 주말에는 한파주의보가 내려도 꼭 시원한 냉막국수를 먹으러 간다. 음료수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마신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다리를 절뚝이면서 아파트 복도를 지나 낡은 계단을 내려간다. 단지 앞에서 찬 바람을 쐬며 담배를 태우기 위해서다. 이렇게 속에서 끓어오르는 열을 식힌다.
지난달 31일 경기 고양시 일산서구 김주삼의 집에 찾아갔다. 그는 낡은 영구임대아파트 2층에 산다. 초인종을 눌렀더니, 김주삼의 아내 이승자(80)가 취재진을 반겼다.
“남편은 잠깐 요 앞에 나갔어요. 바람 쐬고 담배 피우러 간다고. 금방 올 거예요.”
5분쯤 지났을까. 김주삼은 절뚝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남한에 온 지 약 70년이 지났지만, 김주삼의 말투에는 아직 황해도 사투리 억양이 남아 있었다. 그는 실향민도 탈북자도 아니다. 현재까지 세상에 알려진 바로는 ‘이런 이유’로 남한에 온 북한 주민은 김주삼이 유일하다.
김주삼은 황해도 용연군 용연읍 해안가 부근에 사는 중학생 소년이었다. 1956년 어느 밤, 소년은 느닷없이 총을 들고 쳐들어온 남한 북파공작원 3명에 의해 남한으로 납치됐다. 67년 전 일이다. 중학생은 80대 노인이 됐다. 그의 가슴에는 커다란 불덩이가 들어앉았다.
김주삼은 황해도에서 유명한 지역 유지 집안 장손이었다. 아버지는 엽총을 만들어 팔았고, 어린 김주삼을 데리고 사냥을 다녔다.
“키가 요만할 때, 아버지 엽총 사냥에 따라갔지. 산에 쏘다니다가 내가 넘어졌어. 같이 갔던 아버지 친구가 날 업고 왔던 거. 그 생각이 나.”
동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김주삼의 아버지를 찾아와 도움을 청했다. 가옥 옆에는 양봉을 쳤는데, 벌꿀을 바가지에 담아 놓고 동네 사람들이 오가며 먹을 수 있게 나눠줬다.
“아버지가 과수원도 했거든. 동네 사람들 오면 사과도 따서 주고. 나중에는 죽만 쑤어 먹긴 했지만… 그러다가 여기 와서 이렇게 거지가 됐지. 거지.”
1956년 10월 10일 밤 김주삼은 동생들과 깊이 잠들어 있었다. 부모님은 멀리 일을 나가셔서 집을 비운 상태였다. 조용한 밤, 북파 공작 중이던 공군 제25첩보대 대원 3명이 집안에 침입했다. 총을 든 공작원들은 김주삼을 깨우고 10리쯤 떨어진 서해 해변으로 끌고 갔다.
해변에는 남한군의 민간 위장 목선이 대기하고 있었다. 김주삼은 배에 태워져 백령도로 실려 왔다. 여기서 군함으로 갈아타고 인천에 도착했고, 연이어 자동차를 탔다. 종착지는 서울 구로구 오류동 소재 공군 첩보부대 기지였다.
김주삼은 한국군과 미군 기지에 수시로 불려다니며 조사받았다. 양측 모두 그에게 북한 군사시설 위치를 캐물었지만, 민간인 중학생이 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김주삼은 억울하게 납치된 민간인이 확실했다. 하지만 부대는 그를 풀어주기는커녕 4년 동안 수송대에서 온갖 잡일을 시켰다. 음식과 잠자리만 제공받고 무보수로 강제 동원됐다.
“내가 수송부 소속이거든. 잡일 할 때 좀 힘들었지. 연장 가져오라고 하면 가져오고, 기름 묻은 거 닦으라면 닦고. 속상할 적에는 도망가고 싶은 생각도 있었어. 어렸을 적의 생각이지.”
“공군 제25대 첩보대 기지 간 후, 신청인(김주삼)은 거주하던 황해도 지역에 다리가 어디에 있는지, 학교는 어디에 있는지, 산은 어느 곳에 있는지 등 북의 지형에 관련된 질문을 1년간 받았고, 4년간 수송부에서 잡다한 심부름을 하면서 군인들과 함께 자거나 부대 내 작은 방에서 혼자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풀려났다고 진술하였다.” – 진실화해위원회 <공군 첩보대의 북한 민간인 납치 사건 조사보고서> 일부
음식도 변변치 않았다. 잡일을 하다가 식사 시간을 놓치면, 배가 고파서 군인들이 먹다 남긴 잔반을 주워 먹었다.
“원고는 위 억류 중 열악한 음식물 섭취로 인하여 폐디스토마에 걸리는 바람에 억류 해제 뒤까지 오랜 기간 병마에 시달리기도 하였습니다” – 국가 상대 민사소송 소장 일부
1961년 어느 날, 김주삼은 부대에서 풀려났다. 억류된 지 만 4년 만이었다. 김주삼이 풀려난 곳은 황해도가 아닌, 오류동 부대 밖이었다. 주소지도 첩보대 기지 소재지인 서울 구로구 오류동으로 변경됐다. 가족도, 아는 사람도 없는 무연고자. 빈털터리 김주삼은 북한 초등학교 졸업장도 인정받지 못한 채, 남한 사회에 내던져졌다.
밥벌이가 어려웠던 김주삼은 같은 부대 소속 군인 임중철에게 도움을 청했다. 임중철은 늦은 밤 남몰래 구석에서 소리도 안 내고 울던 김주삼의 뒷모습을 기억한다. 김주삼이 불쌍해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1963년도인가 밥벌이 좀 하게 (공장에) 얘기해달라고 찾아왔어. 지금 남영동 전철역 있는 곳이 원래 롯데가 있던 그 자리입니다. 거기서 제가 일을 했는데, 데려다가 공장 일을 시켰어요.” – 임중철 (2022. 8. 10. 기자회견 중)
김주삼의 직장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공장 월급은 먹고살기에 턱없이 적었다. 결국 서울 은평구 불광동 ‘효자원’에서 조경 노동을 하기로 했다.
“도루코 면도기 만드는 데도 조금 다녀봤고, 롯데 껌 만드는 공장도 다녀봤지. 근데 돈이 조금이라서 살 수가 없었어. 노동은 힘든 맛에(힘들어서) 조금 돈이 더 되더라고.”
목, 어깨가 퉁퉁 붓도록 조경 나무 목도(밧줄에 몽둥이를 꿰어 어깨에 메고 나르는 일)를 하고, 나무를 심고 캐는 게 그의 일이었다. 큰 돌을 쌓아 올리기도 했다. 김주삼은 지금도 목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에 다닌다.
고된 노동으로 돈을 벌어 겨우 하숙방 사글세살이를 하던 중, 김주삼은 결혼했다. 부족한 형편에 아내 이승자도 고생길에 올랐다.
“고생은 나도 많이 했지만, (아내를 가리키며) 이 사람이 많이 했어. 고생 말도 못 하게 했지 뭐.”
이승자는 시집오고, 안 해본 게 없는 만능 장사꾼이 됐다.
“결혼이라고 이제 했는데 군대 이불 한 장 덮고 잤어. 요만한 사각 궤짝에 펜치, 망치 그런 것만 있고, 돈도 하나도 없었어. 어디 하숙살이 하고 있더라고. 시집오면서 별놈의 장사 다 하고, 백일도 안 된 아기 발이 동상 걸리도록 업고 비누 장사를 했어.” – 이승자(김주삼 아내)
평생 노동만 하고 살 수는 없었다. 김주삼은 장미 나무를 심어보라는 지인의 말에 장미 농사를 시작했다. 집을 구할 돈은 없었다. 장미를 키우는 비닐하우스 내부를 개조해서 방을 만들고 김주삼, 아내, 딸, 아들 네 식구가 살았다. 20년 넘게 비닐하우스를 새로 지어 옮겨 다녔다. 김주삼은 말하면서도 기가 막힌 듯 웃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하면서 살아온 거야. 하하하.”
남한살이가 고된 건 꼭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부대에서 풀려난 직후, 김주삼 담당 형사가 배정됐다. 70여 년 동안 김주삼의 담당 형사는 수없이 바뀌었다.
“몇 달 동안 담당 형사로 있다가, 그 사람이 (전근) 가면 또 다른 형사가 붙고. 지금도 내 담당 형사가 있는데. 예전에는 나를 감시하려고 다닌 거지”
김주삼은 비닐하우스에 살던 시절, 형사가 들이닥쳤던 기억을 꺼냈다. 간첩 뉴스가 터지면 어김없이 찾아와 북한과 접촉했냐고 추궁했다.
“형사가 신발 신고 막 들어왔지. 우리는 거기서 자는데, 들어와서 사방 다 둘러보는 거야.”
강제로 남한으로 끌려온 민간인 김주삼은 평생 경찰의 감시 아래 살았다. 남북한 간 냉전 대립 속에서 잠재적인 공안사범으로 취급당해왔다.
“원고(김주삼)에 대한 피고(국가) 소속 경찰관들의 사찰 내지 감시는 원고가 군 기지에서 풀려난 1961.경부터 곧바로 피고의 강제적인·일방적인 결정에 의하여 원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시작되었습니다.”- 국가 상대 민사소송 준비서면 일부
남한에서 67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따금 텔레비전을 보면 이산가족 찾기 방송이 나왔다. 하지만 김주삼은 이산가족 상봉 신청은 꿈도 못 꾸는 처지였다. 이북에 두고 온 동생들의 생사라도 알게 된다면 좋겠지만, 마음 한쪽에는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혹시라도 자신 때문에 동생들이 북에서 해코지당하진 않을까 두려웠다.
“남편한테 들은 말인데, 이북에서는 식구가 이남으로 간 걸 알면 다 죽인다는 소리를 한대. 아들이 이산가족 찾자고 하는데, 못하게 했어.” – 이승자(김주삼 아내)
그리움은 삼키고, 또 삼켜서 가슴 속 불덩이가 됐다. 언론 인터뷰를 하거나, 불현듯 동생들이 생각나는 날에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동생들 생각하기 시작하면 4시까지 밤에 잠을 못 자. 생각하지 말아야 해. 이런 얘기 하고 나면 잠도 못 자.”
김주삼은 3년 전 자식들의 등쌀에 밀려 마지못해 백령도에 다녀왔다. 황해도 집에서 납치돼 처음으로 내딛은 대한민국 땅이다. 그곳에선 황해도가 보인다. 수영만 하면 닿을 수 있는 곳이다.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애들이 백령도에 가자고 했는데 아버지(김주삼)가 계속 안 갔어. 재작년에 억지로 모시고 갔는데, 왜 이제서야 오냐고 물으니까 ‘오백 원 내고 망원경으로 보면 집이 보이는데, 수영만 하면 가는데 그게 속상해서 안 간다’고 했대. 그 정도로 기가 막혀서 거기는 안 가려고 했는데, 거기서 이북 지도 보고 ‘여기가 우리 집이다’ 짚어보고 그랬어.” – 이승자(김주삼 아내)
아들 김윤성(56)은 평생 고향을 그리워한 아버지를 위해 소송을 결심했다. 김주삼은 유독 말수가 적은 편이다. 그런 아버지가 종종 고향에 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저 흘려들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남한에 납치돼와서) 힘드셨으니까, 뭔가 해서 좀 편하게 사시거나 아니면 이산가족 찾기를 하면 1순위로 해주길 바라는 마음에 소송을 시작한 거예요.” – 김윤성(김주삼 아들)
2020년 김주삼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위자료 청구 금액은 15억 원이다.
“이미 한국전쟁이 끝난 시점에서 군인도 아닌 순수 민간인 신분의 당시 미성년자인 원고를 강제 납치하고 장기간 억류·동원하는 유례없는 반인도적 폭력 행사를 함으로써 (…) 평생 제대로 된 직업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어, 피고의 불법행위가 없었을 경우와 비교하여 큰 재산적 손해를 입었다. (…) 극심한 정신적 고통 등의 피해는 원고뿐 아니라 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에 남은 가족들 및 원고가 새로이 이룬 가족들에게도 발생” – 국가 상대 민사소송 소장 일부 발췌
소송 이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도 신청했다. 지난해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의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김주삼의 기본권이 침해됐다고 결론 내렸다. 또 국가가 나서 김주삼에 대한 사과와 피해 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하고, 북한의 가족과 상봉할 기회를 줘야 한다고 권고했다.
하루 하루 아까운 시간이 흘렀다. 벌써 대한민국 상대로 민사소송을 낸 지 3년이 지났다. 조만간 이뤄질 판결을 기다리는 김주삼의 마음은 두 갈래로 쪼개진 것만 같다. 북으로 돌아가 동생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70년 가까이 불덩이처럼 타오른다.
“추석, 구정 때 항상 임진각에 가서 망향제를 지내는데 그때 한 번씩 (고향 말씀을) 하죠. 혼잣말로, 돌아가시면 ‘뼈 이만큼이라도 북한하고 연결된 임진강에다가 좀 해달라(뿌려달라)’고 얘기한 적 있어요. 뼛가루가 강물 타고 거꾸로 흘러 내려와도 북한에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죠.” – 김윤성(김주삼 아들)
뜨거운 그리움은 금방 냉혹한 현실을 마주한다. 80대 노인이 이번 생에 북한에 갈 수 있을까. 이미 몸도 마음도 아픈 곳투성이다. 마음은 온탕과 냉탕을 오간다.
“(동생들) 만나게 해준다고 해도 만날 수가 없는 거야 지금은. 들으나 마나 해. 가서 내 동생들 만나보고 싶은 건 솔직히 사실이지. 근데 그건 될 생각도 안 해.”
인터뷰를 마치고, 김주삼은 기자와 함께 현관을 나섰다. 인터뷰하느라 입 밖으로 꺼낸 어린 시절의 추억, 머릿속에 떠올린 가족의 얼굴을 덜어내기 위해 북쪽을 보며 담배를 태운다. 오늘도 역시 잠 못 드는 밤이 될 것이다.
조아영 기자 jjay@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