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10월 10일 ‘그날’이었다. 깜깜한 서해 한가운데, 새우잡이 배 한 척이 북으로 향했다. 덩치는 작지만 엔진 소리는 파도 소리를 덮을 만큼 시끄러웠다.
배에는 국군 공작원들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민간 위장선을 타고 백령도에서 출발해 황해도로 향하는 중이다. 황해도 땅이 가까이 보일 때쯤, 가만히 새우잡이 배 엔진 시동을 껐다. 오정호(당시 25, 남, 가명)와 공작원 2명은 상륙을 준비했다. 총을 챙기고 뗏마(작은 목선)를 띄웠다.
이들이 수행해야 할 ‘특수작전’ 명령은 ‘아무나 납치해오라’는 것. 황해도 해변에 상륙한 그들의 눈에, 해안가에 덩그러니 놓인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공작원들은 포복으로 집에 접근했다. 집 안에는 깊이 잠든 아이들이 누워 있었다. 오정호는 그중 중학생 남자애를 골라 깨웠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가장 나이가 많아 보였기 때문이다.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다. 모두 오정호가 직접 진술한 내용을 바탕으로 구성한 이야기다.
2005년 서울 구로구 오류동 소재 첩보부대 파견대원 출신 오정호 등은 국방부 소속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지원단’에 자신들의 납치 공작 임무에 대한 보상 신청서를 냈다. ‘특수임무’ 수행에 대한 보상금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 3년 뒤, 보상지원단은 오정호 등 북파공작원들의 특수임무 ‘공적’을 인정해 보상금을 지급했다.
이후 2012년 보상지원단은 오정호의 공적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추가 조사를 벌였다. 당시 납치 사실을 진술한 사람은 오정호 등 북파공작원 말고도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1956년 ‘그날’ 납치된 중학생, 김주삼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그는 남한 군인에 의해 납치된 유일한 북한 민간인이다. 김주삼은 국방부 조사단에 납치 사실을 전부 진술했다.
자신을 납치해온 공작원의 ‘공적’을 입증해주기 위해, 자신이 납치 피해자임을 진술해야 하는 아이러니. 비록 피해자가 아니라 ‘참고인’으로 기록됐지만, 이날 그의 존재가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적인’ 기록으로 처음 확인됐다. 납치당한 지 약 60년이 지난 때였다.
김주삼은 황해도 용연군 용연읍 바닷가 부근 외딴 독립가옥에서 1956년 10월 10일 밤 군인 복장을 하고 총을 든 남자 3명에 의해 강제로 남한에 오게 됐다. 집에서 자던 중 끌려 나와, 서울 구로구 오류동 소재 공군 첩보대 기지로 납치됐다.
김주삼은 한국군과 미군 기지에 수시로 불려다니며 조사를 받았다. 북한 군사정보를 빼내려고 약 1년간 신문했지만, 민간인이 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후 약 4년간 수송대에서 잡일을 해야 했고, ‘어느 날 갑자기’ 부대 밖으로 쫓겨났다. 빈털터리에 외톨이로 남한 사회에 내던져진 김주삼은 이후 70년 세월을 가난과 싸우고 외로움을 견디며 ‘살아내야’ 했다.
“지금도 저녁에 밤을 꼬박 새울 때가 있어요. (동생들) 생각하기 시작하면은 지금도 밤을 꼬박 새워요. 제 가족을 만날 수 없으니까.” – 김주삼(2022. 8. 10. 기자회견 중)
남한에 사는 북한 사람. 그렇지만 실향민도 탈북자도 아닌 사람. 김주삼은 대한민국에 ‘존재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관련기사 : <남한이 납치한 북한 소년… 대한민국은 그를 지워버렸다>)
진실은 66년 만에 세상에 드러났다. 지난해 8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가 김주삼에게 사과하고, 피해와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북한의 가족과 상봉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진실화해위원회 결정은 김주삼을 향한 국가의 부당한 위력 행사, 국가폭력, 인권유린 문제를 풀어내는 출발점이 됐다. 정부는 북파공작원 공적 조사 과정에서 ‘납치 피해자’ 김주삼의 존재를 확인했지만,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뒤로 10년이 더 흐르는 동안, 김주삼의 일생에서 남은 날들이 10년 더 줄어드는 동안, 대한민국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다.
과거를 외면한다고 김주삼의 존재가 지워지는 건 아니다. 김주삼은 더 이상 ‘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진실화해위원회의 권고대로, 과연 김주삼은 북에 있는 동생들을 만날 수 있을까. 아니, 생사라도 알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진실화해위원회의 권고 사항은 강제성이 없다. 사실상 제도적으로 국가를 움직이게 할 뚜렷한 근거가 없다. 정치 상황도 문제다. 윤석열 정권 들어 남북관계는 얼어붙었다. 이산가족 상봉 추진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다만, 대한민국에 ‘의무’는 있다. 정부는 김주삼을 납치해왔다. 김주삼에게 가해 책임을 갖고 있기 때문에 피해를 되돌려놔야 한다는 의무가 있다.
“정부가 가해 책임을 갖고 있기 때문에 김주삼 씨의 피해를 되돌려놔야 한다는 의무가 있습니다. 정부에서 국가적 책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두고 이산가족 상봉 등 김주삼 씨의 피해를 구제하기 위한 움직임에 나서도록 사회적인 관심을 두고 여론이 환기될 필요가 있습니다.” – 이강혁 변호사(김주삼 법률대리인)
김주삼도 녹록하지 않은 현실을 잘 알고 있다. 가족을 향한 그리움을 꾹꾹 눌러 담아 애써 섭섭한 마음을 감췄다.
“(북한에) 가서 내 동생들 만나보고 싶은 건 솔직히 사실이지. 근데 그건 될 생각도 안 하고. 만나게 해준다고 해도 만날 수가 없는 거야 지금은.”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해 10월 18일 국방부와 통일부에 공문을 보내, ▲공식 사과 ▲피해 및 명예 회복 ▲가족상봉 기회 제공 등 권고 사항을 포함한 진실규명 결정 결과를 알렸다. 그 뒤로 약 4개월이 지났지만, 국방부는 아직 김주삼에게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
다만, 통일부는 진실탐사그룹 셜록의 취재가 시작된 뒤인 지난 3일에야 김주삼을 직접 찾아가 ‘이산가족 찾기 신청서’를 접수했다. 지난달 30일 셜록이 통일부에 서면 질의서를 보낸 지 4일 만에 벌어진 일이다.
통일부는 “남북대화가 재개되면 상봉을 추진할 계획”이라는 기계적인 답변을 덧붙였다. 또한 통일부 관계자는 진실화해위원회의 권고에 대한 대응이 늦은 이유를, ‘문서(공문) 접수 과정에 착오가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아무나 납치해 오라’는 명령 때문에 납치된 북한 중학생 김주삼. 그에게 대한민국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이유도 없이 그를 납치했고, 사과도 없이 70년 세월을 방치했다. 2020년 김주삼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위자료는 15억 원. 3년이나 기다려온 1심 판결을 이제 눈앞에 두고 있다. 선고일은 오는 14일이다.
대한민국을 상대로 한 김주삼의 소송은 ‘정의 실현’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국가의 책임과 남은 과제를 짚어낸 의미도 있다. 또 다른 김주삼이 존재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남북 간의 냉전적인 대결 체제를 해소하고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김주삼 씨는) 가장 극심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피해를 우리가 잘 되돌아보고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 이강혁 변호사(김주삼 법률대리인)
한국전쟁 기간은 물론, 전쟁 종료 이후에도 북한 군인, 공작원뿐만 아니라 어부 등 북한 민간인까지 군사분계선 이남 지역으로 납치해왔다는 다수의 사례가 보고된 바 있다.
“공군이 발행한 《공군사 제2집》도 1956. 1. 15. 제20특무전대 해편(해체하고 다시 편성함)과 동시에 제23첩보대와 제25첩보대가 창설되었고 제25첩보대는 ‘적군지역 내에 있어서의 활동을 통하여 첩보의 수집을 담당(하였고) (…) 원고(김주삼) 강제납치 시기 공군 첩보대의 북한 지역 침투 공작이 빈번하였음을 확인시켜줍니다.” – 국가 상대 소송 준비서면 일부
김윤성(김주삼 아들)은 소송 결과가 반드시 긍정적이길 소망한다. 나무를 들어 나르고 돌덩이를 옮기는 조경일 때문에 아버지는 다리를 절게 됐다. 평생 가난하게 살아온 탓에 지금도 몇 백 원을 아끼려고 파란 버스(간선 시내버스)가 아닌 노란 버스(마을버스)를 탄다.
“80대 노인들이 큰돈 들어온다고 펑펑 쓸 줄이나 알겠습니까. 그냥 춥고 더울 때 밖에서 몇 십 분씩 노란 버스 안 기다리고 택시 타고 다녔으면 좋겠어요. 드시고 싶은 것도 참지 말고요.” – 김윤성(김주삼 아들)
김주삼은 1심 소송 판결을 앞두고 애써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어떻게 되면 되고, 말면 말고 그냥… 그때 가봐야 알지.”
유독 말수가 적은 80대 노인 김주삼. 오랜 세월 동안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까운 10여 년 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듣겠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억울한 이야기를 반복했다. 국방부 조사관, 법원, 기자들 앞에서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털어놨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김주삼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여럿이지만, 정작 대한민국은 그를 외면하고 있다. 사과, 보상, 가족 상봉, 그 무엇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이전에 방송국에서도 오고, 얘기 다 했어. 이미 얘기 다 했는데, 뭘 또 물어보려고….”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또 묻는 기자에게, 김주삼은 까만 비닐봉지에 빵을 가득 담아 건넸다. 인터뷰 당일 지자체에서 받아온 부식이다. 두 번 세 번 거절했지만, 기어코 손에 쥐여줬다. 왜 주느냐고 묻진 않았다. 빵이 담긴 비닐봉지가 무거웠다. 빵 무게 때문은 아니었다.
조아영 기자 jjay@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