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구에게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아무리 물어도 철창 너머의 동생은 대답하지 않았다. 10분 면회를 위해 일본에서 찾아온 아버지가 물어도 동생의 닫힌 입은 열리지 않았다.
아버지 앞에서 멍했던 김승효는 교도소 수용실에서는 혼자 중얼거리며 서성이곤 했다. 김승효의 정신 이상은 광주교도소 안에서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지만, 교도소 밖 가족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김승효와 함께 수감생활을 한 유영수 씨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방(수용실)에서 12~13명이 같이 있었는데, 승효는 앉은 자리에서 똥도 누고 소변도 다 해버렸어요. 그러니 일반수들한테 굉장히 왕따를 당했어요. 막 때리고 구타당하고 그랬죠. 간수들이나 일반수들은 승효가 정신적으로 이상하다는 걸 알았어요. 아니까 그냥 놔두고, 다른 데 안 가게 지켜만 봤죠.” – <뉴스타파> 보도 ‘조국이 버린 사람들’ 에서.
중앙정보부 수사관에게 두들겨 맞아 가짜 간첩이 된 김승효.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그를 교도소 제소자들이 또 때렸다. 침묵 속에서 김승효(1950년 생)는 천천히, 꾸준히 ‘미쳐’ 갔다.
2016년 10월에 개봉한 영화 <자백>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재일교포 김승효. 영화에서 말한 대로, 그는 장경욱–신윤경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한국 법원에 재심을 신청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는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2016년 11월의 일이다.
변호인단은 여전히 정신분열증(통합실조증)을 앓고 있는 김승효의 모습이 담긴 <뉴스타파> 제작 다큐멘터리 ‘조국이 버린 사람들’ 영상을 증거로 법원에 냈다. 영화 <자백>에도 들어간 장면이다.
한국 검찰은 곧바로 재심을 반대한다는 의견서를 법원에 냈다. 당시 의견서를 작성한 박두순 검사(현 수원지검 근무)는 과거 고문·조작 사건에 관여한 검사·판사 명단을 공개한 언론보도를 비판하며 이렇게 밝혔다.
“우리나라 선배 법조인들이 언론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사건을 조작한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분들의 학식과 인품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이 잘 알려져 있고, 그 시대 상황에서 법조인의 양심을 가지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수사, 기소, 재판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선배들의 전통 위에 현재 우리나라의 사법체계가 발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대법원 판단까지 받아 확정된 이러한 판결은 충분히 존중받을 가치가 있고, 불충분한 증거로 부정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학식과 인품이 뛰어난 선배 법조인이 양심을 갖고 수사, 기소, 재판했다는 주장. 사실일까? 한국 현대사의 숱한 오판과 사법 살인은 일단 차치하고, 김승효 사건만 따져보자.
일본 리츠메이칸대학 철학과에 다니던 김승효는 재일 거류민단에서 실시한 모국 유학생 선발시험에 합격해 1973년 4월 서울대학교 재외국민연구소에 입소했다. 그는 이듬해인 1974년 3월 서울대 교양과정에 입학했다.
한국에서의 대학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2개월 뒤인 5월 3일 오후 8시께,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의 하숙집에서 중앙정보부 직원들에게 강제 연행됐다. 김승효는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19일간 불법감금 상태에서 옷이 모두 벗겨진 채 고문을 받으며 간첩으로 다시 태어났다. 핵심 내용은 이렇다.
‘1970년 6월, 일본 조총련 산하단체인 조선인유학생동맹 리츠메이칸대학 지부장 홍OO에게 포섭돼 반국가단체인 조선문화연구회에 가입. 김일성 주체사상과 북한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에 대한 교양을 받음. 남조선 혁명사업을 위해 모국유학생 시험에 응시하라는 지령을 받고 시험에 합격. 서울대에 침투하여 북한의 우월성을 선전하고, 학생들 포섭. 남조선 정치, 경제, 사회 등 각종 국가 기밀을 탐지 수집해 보고할 것.’
김승효가 서울대로 유학을 온 건 반국가단체와 그 지도원들의 지령에 따른 결과라는 것이다. 이 모든 시나리오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김승효는 <자백>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먹으로 맞았어. 다른 이런 데(허벅지 등)를 많이 때렸어. 취조중에 수사관이 멋대로 쓰고 마지막에 강제로 지장을 찍게 했어. 안 찍겠다고 하면 때려 죽인다고 했어. 얼굴을 때리고 내 손을 가져가 (자기들) 멋대로 지장을 찍었어.”
김승효에 대한 구속영장은 5월 21일에 나왔다. 그는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등의 혐의로 6월 28일 기소됐다. 김승효를 수사하고 기소한 이는 정경식 검사였다. 정 검사는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의 오랜 불법감금 수사를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수사 결과를 거의 그대로 공소장에 옮겼다.
정경식은 한국의 대표적인 공안검사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 그는 박정희 정권 때 여러 간첩 조작 사건과 시국사건을 수사했고, 12.12쿠데타 이후에는 국보위 사회정화분과 위원을 맡기도 했다. 부산지검장으로 있던 1992년에는 지역감정 자극을 통한 대선 개입을 도모한 일명 ‘초원복집 사건’에 연루됐다. 그는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헌법재판관에 임명됐다.
박두순 검사 말대로, 학식과 인품을 겸비하고 양심에 따라 수사–기소를 했기 때문인지, 김승효가 정신분열을 앓는 동안 정경식은 공직에서 늘 승승장구했다.
김승효는 고문의 충격과 후유증 탓에 1심 재판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혐의를 부인하지 못했다. 1심 재판부는 그에게 징역12년, 자격정지12년을 선고했다. 김승효는 2심 때부터 적극적으로 혐의를 부인했다.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물적증거로 채택된 건 일본 지폐 1만 엔 한 장과 라디오뿐이었지만, 대법원은 김승효에게 징역12년, 자격정지12년을 확정했다.
죄 없이 교도소에 수감된 김승효의 정신분열 증상은 공식기록에서도 확인된다. 광주교도소 직원이 김승효를 감시하고 1977년 5월 10일에 작성한 문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김승효는) 현재 목공장에 출역중인 사람으로 평소 작업에 태만할 뿐만 아니라 하루에도 수차례씩 묵묵히 서 있거나 앉아 있어도 작업하는 척 하다가 다시 멍하니 서 있어 정상이 아닌 것 같아 주시하고 있던 바, 1977년 5월 7일 조식 후 갑자기 병세를 일으켜 실신상태이기에 의무과에 의뢰한 바, 이상 없다는 것으로 특히 칠공장은 도구 및 극약품을 사용한 곳이므로 만약의 경우 정신착란증을 일으킬까 우려되옵기에…”
김승효는 수감 7년째인 1981년 광복절 특사로 석방됐다. 일본의 가족들은 김승효의 건강과 내면의 상처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죽지 않고 일본 교토 집으로 돌아온 걸 다행으로 여겼다. 그의 형 김승홍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교토지방민단본부에서 부모님은 동생을 맞이했습니다. 당일은 부모님 댁에서 성대한 환영회를 열었습니다. 동생은 오로지 미안해 했고, 간첩 혐의에 대해서는 전혀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한국에서 취조 받을 때에 대해서는, 정보부원과 검찰관들의 행위에 대해서 아무리 물어도 일체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 재심청구서에 첨부한 김승홍의 진술서에서.
김승홍의 진술은 이렇게 이어진다.
“동생의 상태는 귀국 후에도 좋아지지 않았고, 누군가에게 감시받고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한 발짝도 집에서 나가지 않고 자기 방에 틀어박힌 채 그대로 있었습니다. (중략) 그러는 사이에 동생은 부모님과 여동생에게 이것저것 트집을 잡아 폭언을 했습니다. 결국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여동생의 잠긴 방문을 박살내기도 했습니다.”
결국 김승효는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의 부모님은 아들이 예전 모습으로 돌아오는 걸 끝내 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1990년 3월 19일, 아버지는 1998년 8월 10일 각각 사망했다. 김승효는 부모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그는 계속 정신병원에 있었다.
한국 교도소에서 7년을 산 김승효는 일본 정신병원 21년을 보냈다. 누가 무슨 방법으로 동생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김승홍은 알지 못했다. 비밀은 동생의 친구 강종건이 찾아오면서 풀렸다. 그 역시 한국에서 간첩으로 몰려 7년을 교도소에서 살았다.
강 씨는 “재심 받으러 한국에 가자”고 김승효를 집요하게 천천히 설득했다. 그제서야 동생의 비밀이 풀렸다. 김승효는 40년 만에 가슴에 맺힌 이야기를 했다.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은 잠을 재우지 않았어. 물고문을 하고 내 귀에 대고 크게 고함도 쳤어. 원하는 걸 말하지 않으면 때리고, 전기고문도 했어. 조서는 모두 그들이 쓴 거야. 난 날인을 거부했지만 그들이 억지로 손가락을 잡아당겨 강제로 무인을 찍도록 했어.”
동생은 한국말을 잊었는지 일본어로만 이야기했다. 갑자기 한국어가 터진 건 2015년 11월 23일, <뉴스타파> 취재진과 변호사가 찾아왔을 때다. 당시 최승호 피디(현 MBC 사장)가 “예전에 한국에서 겪은 안 좋은 일이 자주 생각나느냐”고 물었다.
김승효는 “그런 일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과거의 고통을 생각하지 않는다니, 무슨 뜻일까.
“왜냐하면, 잊어버리고 싶단 말이야. 그 암흑의 세월을, 지옥같은 세월을 잊어버리고 싶단 말이야. 가슴이 아파서 죽을 지경이야. (재판에서) 무죄를 못 받아 죽을 지경이야. 죽고 싶단 말이야. 다시 생각하지 않는단 말이야. 여러가지 것을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나는 무죄야.”
김승효는 여전히 외출을 못한다. 1981년 석방 이후 그는 정신병원과 집안에만 머물렀다. 그가 나갈 수 있는 경계선은 집 울타리 안쪽, 지붕 처마 끄트머리까지다.
한국 법원은 2018년 6일 10일 김승효의 재심을 결정했다. 재심 청구 약 2년 만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동생을 대신해 김승홍이 한국을 오가며 재심을 준비했다. 김승홍은 지금까지 재심 문제로 여섯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검찰은 선배 판검사의 학식과 인품까지 거론하며 김승효의 재심을 막으려 했지만, 정작 본 재판에서는 유죄 입증을 제대로 못했다. 재심 공판은 서울고법에서 7월 11일 딱 한 번 열렸다. 곧바로 7월 20일 결심이 진행됐다.
대법원 확정 판결이 있던 1975년 이후, 43년 만에 열린 재판. 검찰은 어떤 구형을 했을까. 결과는 싱거웠다. 법정에 나온 검사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이번에 새로 부임을 했거든요. 기록을 살펴보지 못해 사건 내용을 모릅니다. 서면으로 의견을 내겠습니다.”
피고인 김승효의 최후진술은 특별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는 건강 문제로 집밖으로 나올 수도, 바다 건너 한국의 법정에 올 수도 없었다. 대신 김승효가 등장하는 영화 <자백> 장면이 법정에 상영됐다. 동생 대신 피고인석에 앉은 형 김승홍이 마지막으로 진술했다.
“동생은 큰 꿈을 안고 한국에 왔습니다. 한국 정보기관은 그런 동생을 강제로 연행해 온갖 고문을 하고 강제로 날조된 진술서에 지장을 찍게 했습니다. 그 뒤 동생은 교도소에서 서서히 미쳐갔습니다.
우리 가족은 동생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왜 정신이 온전치 못한지 40년 동안 모르고 살았습니다. 동생은 무려 21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냈습니다. 교도소에서 나온 1981년 이후 단 한 번도 혼자 외출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끝내 승효가 제 정신으로 돌아온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숨졌습니다.
대한민국은 동생에게 사죄해야 합니다. 무죄판결과 사과로 동생을 위로해 주십시오. 승효가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올 수 없더라도 무죄 판결로 동생의 삶을 위로해 주십시오.”
김승홍은 동생 이야기를 하며 끝내 법정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김승효의 재심은 형의 눈물로 마침표가 찍힌 셈이다. 동생 대신 최후진술을 한 김승홍에게 재판이 끝난 뒤 물었다.
“학식과 인품이 뛰어난 한국 판검사들이 동생을 수사, 기소, 재판했습니다.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없습니까?”
김승홍은 다시 울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아도 동생은 예전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그 가능성은 매우 낮아요. 이미 동생의 삶은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동생을 이렇게 만든 사람들… 그들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내 손으로 그들을 어떻게 하고 싶습니다. 그게 솔직한 마음입니다.”
서울고법은 오는 8월 24일 재일교포 유학생 김승효에게 선고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