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속 묵은 사진을 지우다 한 여성 앞에서 동작을 멈췄다. 상습 강간범에게 살해된 장주영(1975년생. 가명). 사진 속 사망일을 보니 딱 이 즈음이다.
2012년 8월 20일.
장주영의 삶은 6년 전 여름과 함께 끝났고, 나의 취재는 2년 전 봄에 마감됐다. 사진을 지워도 문제 없을 듯했다. 오른손 중지로 ‘삭제’ 버튼을 누르려다, 주먹을 쥐어 손가락을 접었다.
공원묘지 납골함에 붙은 그녀의 얼굴을 다시 바라봤다. 국가의 도움은커녕, 국가의 잘못으로 죽은 장주영은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다. ‘이 사진을 언제 찍었지…’ 촬영 날짜를 확인했다.
2016년 3월 2일.
이날, 그녀의 둘째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엄마 닮은 그 아이는 잘 자라고 있을까.’
노트북을 덮고 스마트폰을 켰다. 아무리 검색해도 장주영의 남편 박귀섭 씨 전화번호는 뜨지 않았다. 스마트폰을 바꿀 때 번호가 지워진 듯했다. 전철을 타고 서울의 동쪽 끄트머리로 향했다. 섭씨 35도를 훌쩍 넘은 14일 오후였다.
살해된 장주영에겐 다섯 살 박성재(가명), 네 살 박소현(가명) 남매가 있었다. 엄마가 살해된 후 남매는 길게 심리치료를 받았다.
장주영 사망 후 남편과 남매는 더욱 가난해져 서울 동쪽 높은 곳에 있는 임대아파트로 밀려났다. 열 평도 안 되는 집에서 아버지, 남매, 할머니 총 네 식구가 살았다.
‘그녀의 가족은 아직 여기에 살고 있을까.’
임대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복도식으로 나열된 모든 집의 현관문은 더위 탓에 열려 있었다. 그 집 앞에 섰을 때, 장주영의 유가족이 없길 바랐다. 더 넓은 집으로 이사갔으면 했다. 인기척을 듣고 좁은 방에서 사람이 나왔다.
노트북 속 여인을 빼닮은 여자 아이다. 뒤이어 오빠도 나왔다. 엄마가 살해됐을 때 다섯 살, 네 살이던 남매는 10살-11살 초등학생이 됐다. 몸집도 커졌다. 대신 집은 더 좁아졌다.
“누구세요?”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의 땀을 훔쳤다. 아이들도 더위에 지친 모습이었다. 얼굴이 땀으로 젖은 남매의 할머니가 나타났다. 장주영의 유가족은 여전히 같은 곳에 살고 있다.
사건이 벌어진 그날, 가족 중에서 장주영의 죽음을 가장 먼저 확인한 이는 할머니다. 범인은 끝까지 저항한 장주영을 마지막까지 때렸다. 죽기 직전까지 맞은 여자, 사망한 며느리의 모습은 참혹했다. 할머니는 정신과 진료를 받았다. 당시 의사는 이런 의견을 기록으로 남겼다.
“응급실에서 보았던 고인(장주영)의 시신이 망막에 맺혀 사라지지 않음. 수면장애, 집중력 저하, 극심한 이명 등의 증상으로 내원하였으며,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진단 하에 심리치료를 시작하였음. 수면의 양과 질 저하와 불안, 초조 등의 증상이 심각하여 정신건강의학적 약물치료도 병행하였음.”
어떤 죽음은 누군가의 망막에 맺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장주영은 2012년 8월 20일에 사망했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이 있다. 장주영의 남편 박귀섭, 남매 박성재–박소현은 ‘피고 대한민국’과 다투고 있다.
국가배상청구소송이 그것이다. 유가족은 장주영의 죽음의 원인과 배경에 경찰, 검사, 판사 등의 잘못이 있으니 국가에게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1심, 2심 재판부는 유가족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강간살해된 여성 장주영. 그녀의 죽음은 사소하지 않다. 이제, 독자 여러분이 판단해 보시길. 사건이 벌어진 2012년 8월 20일로 가보자.
그날 아침, 상습 강간범 서진환(1969년 생)은 모든 결심을 끝냈다.
‘오늘.. 누구든 걸리면.. 꼭..’
그는 비아그라 두 알을 먹고 집을 나섰다. 칼, 공사용 테이프, 마스크도 챙겼다. 길에서 선물 포장용 끈을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서울 중곡동 주택가 쪽으로 향했다.
얼마쯤 걸었을까. 서진환은 어느 길목에서 남매를 유치원에 보내는 장주영을 발견하고, 몰래 그녀 집으로 들어갔다. 장주영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서진환은 칼을 들이댔다.
“가만히 있어.”
장주영은 소리치고 저항했다. 소란스런 소리에 이웃이 경찰에 신고했다. 현장에 도착한 경찰이 현관 문을 열 때, 서진환은 흉기로 장주영을 공격했다. 경찰이 보는 앞에서 저지른 범행, 집은 그녀의 피로 젖었다. 수사기관에 끌려간 서진환은 장주영 탓을 했다.
“여태까지 내가 겁탈한 여성들 중 (장주영이) 제일 유별나게 저항했습니다. 그냥 순순히 복종했으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왜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들었는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서진환의 지난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때부터 서진환의 범죄 이력은 물론이고 국가의 잘못이 줄줄이 드러난다. 서진환의 범죄 이력부터 보자.
1991년 – 강간죄 및 강간미수죄로 징역 2년 선고 받음.
1993년 – 강도상해죄 등으로 징역 3년 6월 선고 받음.
1998년 – 강간치상죄로 징역 5년을 선고 받음.
2004년 – 특수강도강간죄 등으로 징역 7년 선고 받음.
서진환은 21세인 1991년부터, 41세가 된 2011년까지 성폭력 범죄 등으로 18년을 교도소에서 살았다.
국가의 치명적인 실수와 잘못은 서진환이 네 번째 범죄를 저지른 2004년에 벌어진다. 먼저 서진환이 저지른 1997년 강간치상, 2004년 특수강도강간 범죄를 잘 보자. 두 범죄는 특정강력범죄에 해당한다.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특강법)’ 3조는 이렇게 규정돼 있다.
“특정강력범죄로 형(刑)을 선고받고 그 집행이 끝나거나 면제된 후 3년 이내에 다시 특정강력범죄를 범한 경우에는 그 죄에 대하여 정하여진 형의 장기(長期) 및 단기(短期)의 2배까지 가중한다.”
서진환에게 적용해 보자. 1997년 강간치상의 죄로 징역 5년을 선고 받은 서진환이 출소 후 3년 이내에 특정강력범죄를 저지르면 법원은 최소 징역 10년을 선고해야 한다는 뜻이다. 서진환은 출소 19개월 만인 2004년에 특수강도강간을 저질렀다. 최소 징역 10년형에 해당하는 범죄다.
어찌된 일인지 검사는 서진환에게 징역 7년을 구형했다. 검사의 명백한 잘못이다. 재판부가 형을 선고하면서 바로 잡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시정되지 않았다. 법원은 검사 구형을 그대로 받아들여 서진환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다.
법을 제대로 적용했다면 서진환은 교도소에서 10년을 살고 2014년에 출소했을 터다. 검사, 재판부의 실수로 서진환은 운 좋게(?) 7년 만인 2011월 11월에 세상에 나왔다. 그는 출소 후 약 9개월 뒤에 장주영을 강간살해했다.
이번엔 교정시설이 검찰–법원의 잘못을 이어 받는다. 교도소 측은 수형자가 출소하면 이름, 주소, 죄명, 형기 등이 적힌 석방통보문을 관할 경찰서에 보낸다. 우범자를 관리해 범죄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경북북부제2교도소는 2011년 11월 서진환을 풀어주며 엉뚱한 내용의 석방통보문을 보낸다.
이름 : 서진환
죄명 : 절도
형명형기(통산) : 징역 6개월
범죄개요 : 2004년 4월 여성 B씨 집에 침입해 강간. 탁자 위에서 2만 원 강취.
서진환이 절도범이라니. 게다가 징역 6개월? 이번엔 경찰서가 바통을 이어 받는다. 경찰은 석방통보문의 ‘범죄개요‘는 살피지 않고 ‘죄명‘만 확인했다. 서진환의 범죄이력도 조회하지 않았다. 서진환은 상습 강간범이 아닌 절도범으로 분류됐다.
경찰의 ‘우범자 첩보수집 등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서진환은 성폭력 재범 가능성이 높은 ‘첩보수집대상자‘다. 경찰은 2년 동안 서진환을 관리하는 담당 직원을 두고, 3개월에 1회 이상 범죄 관련 여부 첩보를 수집해야 했다. 경찰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서진환은 자유롭게 살았다.
체포된 서진환이 경찰을 당혹하게 한 건 따로 있다. 바로 그의 오른쪽 발목에 채워진 전자발찌다. 상습 성폭행 가해자에게 채워진 전자발찌는 서진환의 비밀과 더불어 경찰이 끝까지 숨기고 싶은 사실까지 폭로했다.
서진환은 장주영만 강간살해하지 않았다. 장주영을 살해하기 13일 전인 2012년 8월 7일. 서진환은 자기 집에서 약 2km 떨어진 주택가에서 여성 A씨를 강간했다. 당시 서진환은 돈 문제와 전자발찌로 인한 스트레스 등으로 자기 멋대로 살기로 작정했다.
‘강간을 해서 경찰에 안 잡히면 좋고, 잡히면 교도소에 들어가 살지 뭐.’
사건 직후 피해자 A씨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서진환은 범행 현장에 자기 DNA 정보도 남겼다. 그의 발목에 채워진 전자발찌는 ‘나 여기 있었다’는 신호를 법무부 산하 위치정보중앙관제센터에 보냈다.
자포자기한 서진환은 도망가지도 않았다. 그는 이미 약 2개월 전에 자신을 담당하는 보호관찰소 담당자에게 말했다.
“사람을 칼로 찌르거나 성폭행을 하는 등으로 사고를 치고 교도소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는 이 말을 실천했을 뿐이다. 서진환은 범행 이후 평소처럼 집에서 음란동영상을 보면서 살았다. 발목에 채워진 전자발찌는 계속 ‘서진환은 집에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서진환은 자신이 금방 체포될 거라 생각했다.
경찰은 서진환을 찾아가지 않았다. 용의선상에 올리지도 않았다. 왜 그랬을까?
“피해자 A씨에게 성폭력 우범자 354명 중 핵심 전과자인 50명의 사진을 보여주고, 이후 서진환을 포함해 다른 전과자의 사진을 보여줬지만 피해자가 서진환을 지목하지 못해 수사에 진전이 없었습니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폭력 재범을 막으려 인권침해 논란에도 실시된 전자발찌 부착 제도. 정작 경찰은 이 과학수사를 하지 않았다. 우범자 50명의 사진을 피해자에게 들이 밀며 아픈 기억을 복기하게 만들었다. 경찰은 서진환을 특정하지 못한 피해자를 탓했다.
사건 신고 접수 후, 범행 장소에서 전자발찌 신호가 있었는지만 파악했어도 경찰은 서진환을 쉽게 검거할 수 있었다. 그랬다면 서진환의 2차 범행, 장주영 강간살해를 막을 수 있었다.
경찰은 왜 전자발찌 관련 수사를 안 했을까? 어렵고, 기간이 오래 걸리는 일일까? 전자발찌 수신자료를 보관하는 보호관찰소의 말을 들어보자.
“18시 이전에 경찰에게 전자발찌 위치기록 조회 의뢰 공문이 오면 당일 통보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경찰의 공문 도착 이후) 대부분 2시간 이내에 범행 장소에 전자발찌 신호가 있었는지 여부를 통보합니다. 경찰에서 신속한 답변을 요청하면 전화로 먼저 통보한 후 정식 공문으로 공식 답변하는 방법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훗날 감사원의 감사 때 서울보호관찰소 측은 이렇게 밝혔다.
“2012년 8월 7일 강간 범죄 시, 신고를 받은 수사기관(경찰)이 전자발찌 수신자료 유무 조회 후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 받아 저희에게 수신자료를 요청했으면 서진환을 검거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랬다면 8월 20일 장주영 강간살인 사건을 방지할 수 있었습니다.”
같은 해, 감사원은 전자발찌 제도가 잘 운영되는지 살펴보기 위해 법무부, 경찰청 등을 감사했다. 감사원은 이런 결론을 냈다.
“OO경찰서는 전자발찌 착용자인 서진환이 2012년 8월 20일 서울 중곡동에서 성폭행 및 살인사건을 일으킨 사실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자, 그 다음날(21일) 위치추적관제센터에 서진환의 위치정보를 요청했다. (중략) 이렇게 전자발찌 착용자의 위치정보를 수사지침상 기초 수사자료에 포함시키지 아니함으로써 서진환의 2차 범행을 예방할 수 있었는데도 예방하기 힘든 상황을 초래하였다.“
전자발찌 수사를 했다면 장주영의 죽음을 예방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감사원은 새로운 사실도 밝혀냈다.
“2012년 5월 15일 서울보호관찰소에서 OO경찰서를 방문해 형사과 소속 직원 8명에게 성폭력, 살인 등 강력범죄 발생 시 위치추적관제센터 등에 전자발찌 착용자의 위치정보를 요청하여 수사에 활용하도록 안내하고 관련 책자까지 배부했다. 그럼에도 OO경찰서는 A씨 성폭행 사건을 수사할 때에는 수사지침에 위치정보 활용 내용이 없다는 사유 등으로 전자발찌 착용자의 위치정보를 조사하지 않은 채 CCTV 수사나 탐문 수사 등 다른 수사기법만 활용했다.”
박귀섭 씨와 어린 남매가 위에 열거한 국가의 잘못으로 아내이자 엄마인 장주영이 사망했으니 국가가 배상을 해야 한다고 2013년 2월 소송을 제기했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이었다.
1심 법원은 박귀섭 씨와 남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재판부는 “국가기관의 실수와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장주영 사망과는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판결했다.
박귀섭 씨는 항소했다. 문제의식을 느낀 여러 변호사들이 더 합류했다. 정철승, 박준영, 박성철, 신윤경, 양승철 변호사 등이 힘을 합쳐 박 씨를 도왔다. 변호인단은 전자발찌 수사 관련 경찰의 문제를 집중 거론하며 국가의 배상 책임을 주장했다.
여기에 맞서 경찰 측은 이런 취지의 주장을 펼쳤다.
“전자발찌 부착자가 범인이라는 어떠한 단서도 없이 ‘전자발찌 피부착자 중 성범죄 재범위험성이 높은 사람’을 특정해서 수사했어야 한다는 것은, 적법절차를 준수하며 인권을 보호해야 하는 경찰 입장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무리한 주장입니다.”
2심 재판부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담당 재판부는 두 번이나 교체됐다. 결국 2심 재판부 역시 1심과 비슷한 취지로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박귀섭 씨와 남매는 대법원에 상고했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 신체, 재산을 보호해야 한다는 헌법의 기본 정신은 여자 장주영의 죽음 앞에서 무기력했다. 국가기관인 감사원마저 “경찰이 전자발찌 수사를 했다면 서진환의 2차 범행을 막을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1심, 2심 법원은 장주영의 죽음에 국가의 책임은 없다고 판단했다. 법을 지키지 않은 검사의 구형으로 시작된 어처구니 없는 일이 판사 -> 교도소 직원 -> 경찰 -> 보호관찰소 직원 -> 다시 경찰로 이어졌다. 여자 장주영은 국가의 연속된 잘못 끄트머리에서, 강간범의 칼끝에 사망했다.
잘못을 범한 국가기관은 재판 과정에서 칼을 든 강간범 뒤로 모두 숨어 버렸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에 작성된 ‘재판거래 의혹’ 문건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합리적 범위 내에서의 과거사 정립(국가배상 제한 등)’.
문건이 아니더라도, 과거사 사건이 아니어도, 한국은 국가배상에 인색한 사회였다. 법을 어긴 검찰의 구형부터 경찰의 엉터리 전자발찌 수사까지. 정말 여자 장주영의 죽음에 국가는 책임이 없을까?
엄마 장주영이 살해됐을 때 다섯 살, 네 살이던 남매는 초등학교 4학년 3학년이 됐다. 네 식구가 10평 미만 임대아파트에서 산다. 유가족은 배상금을 수십 억 요구하지 않았다. 고작(?) 배상금 3억 원을 요구했다. 1심, 2심 법원은 이 돈을 주지 말라고 판단했다.
8월 20일은 장주영의 기일이다. 강간살인 피해자 유가족은 언제까지 싸워야 할까.
대법원은 아직 판단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