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북한 민간인 납치’ 피해자 김주삼을 만났다.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 반, 역에서 내려 차를 타고 십여 분을 더 이동했다. 두 시간에 걸쳐 도착한 그곳에 층이 낮은 영구임대아파트가 있었다. 아파트 복도 유리창에 까맣게 내려앉은 먼지와 칠이 벗겨진 벽면이 눈에 들어왔다. 저녁 시간이 다 됐는데도 불을 밝힌 집은 잘 보이지 않았다.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2층. 그곳에 김주삼이 살고 있었다. 어둠에 가려져, 자세히 들여다봐야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사람.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도 못했던 기막힌 이야기의 주인공. 이게 그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김주삼은 황해도에서 유명한 지역 유지 집안 장손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배를 주리면 그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기도 했다. 그러나 비극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1956년 10월 10일 밤, 총을 든 한국군 세 명이 당시 중학생이었던 김주삼을 납치했다.
군인들은 서울 오류동에 있는 공군 첩보부대 기지로 김주삼을 끌고 왔다. 한국군과 미군은 김주삼에게 북한의 군사정보를 캐물었다. 민간인 중학생이 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들은 1년간 심문을 하더니, 그 뒤로는 부대에 잡아둔 채 수송대에서 잡일을 시켰다. 보수는 없었다.
약 4년이 지난 1961년 어느 날 김주삼은 부대 밖으로 풀려났다. 가난과의 사투가 시작됐다. 집을 구할 돈이 없던 그는 비닐하우스 내부를 개조해 방을 만들었다. 그곳에는 김주삼과 아내, 딸, 아들 네 식구가 살았다. 비닐하우스를 새로 지어 옮겨 다니는 생활은 20년 넘게 이어졌다.
그를 고통스럽게 한 건 가난만이 아니었다. 남한에 67년간 억류되며 평생 경찰의 감시 아래 살았다. ‘간첩’ 뉴스가 터질 때면 형사들은 비닐하우스에 찾아왔다. 남북한의 냉전 속에서 그는 잠재적인 공안사범 취급을 당했다.(관련기사 : <남한이 납치한 북한 소년… 대한민국은 그를 지워버렸다>)
김주삼은 2020년, 83세 노인이 돼서야 대한민국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김주삼의 아들 김윤성은 아버지가 조금 더 나은 생활을 하기를 바랐다. 그는 소박한 행복을 꿈꿨다.
“80대 노인들이 큰돈 들어온다고 펑펑 쓸 줄이나 알겠습니까. 그냥 춥고 더울 때 밖에서 몇 십 분씩 노란 버스 안 기다리고 택시 타고 다녔으면 좋겠어요. 드시고 싶은 것도 참지 말고요.”(김윤성 인터뷰 2023. 2. 15.)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지난달 14일 한국 정부가 김주삼에게 10억 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로 지난 67년간 김주삼이 겪은 고통과 설움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을까.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1심 판결에 불복하고 86세 노인을 상대로 ‘항소’를 결정했다. 10억 원 배상 판결 이후 겨우 17일째 되는 날이었다. 국가폭력 피해자에게 국가는 사과와 책임 대신 또 다시 기약 없는 기다림을 안겨줬다.
하루아침에 가족과 떨어져 남한 사회에 홀로 던져진 지 67년. 그동안 김주삼은 누구에게도 사과 한 번 받지 못했다. 명예회복도 이룰 수 없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해 8월 김주삼 납치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대한민국 정부에 ▲공식 사과 ▲피해 및 명예 회복 조치 ▲가족 상봉 기회 제공 등을 권고했다. 하지만 국가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통일부는 지난 1월 진실탐사그룹 셜록이 취재를 시작한 뒤에야 김주삼을 찾아가 ‘이산가족 찾기 신청서’를 접수했다. 정부는 손해배상 소송 항소로 그의 명예회복을 또 지연시켰다. 그를 납치해온 국방부는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
셜록은 지난 1월 30일 국방부에 입장을 물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권고 사항과 관련해 ▲공문 수신 여부 ▲권고 이행 상황 ▲권고 이행 절차 등을 문의했다. 그리고 약 40일이 지난 이달 9일에야 짤막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현재는 ‘과거사 관련 권고사항 등 처리 심의위원회’가 설치되어 있지 않으나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에 따라 금년 9월 하순까지 동위원회가 설치될 예정입니다. 따라서 국방부는 위원회가 설치되면 위원회에 권고사항 이행계획을 제출하고 위원회가 의결한 이행계획에 따라 권고이행을 진행할 것입니다. 그리고 권고 취지의 신속한 실현을 위해 이행계획 수립에 필요한 제반 조치를 진행할 예정입니다.”(3월 9일 국방부 답변)
국방부는 오는 9월 ‘과거사 관련 권고사항 등 처리 심의위원회’가 설치된 뒤에 사과 이행계획을 제출하고, 위원회의 계획에 따라 권고를 이행하겠다고 밝혔다. 지금은 사과할 계획이 없다는 뜻. 진실화해위원회의 권고 이후 반년 동안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았고, 앞으로도 적어도 반년 동안은 역시나 사과할 계획이 없을 거라는 말이다.
지난달 27일 국회에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일부 개정법률안’이 통과되면서, 진실화해위원회 권고사항 이행에 대한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3개월 이내에 권고사항 이행 계획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기한이 생긴 것. 이렇게 법이 개정된 배경에는, 그동안 정부를 향한 진실화해위원회의 권고가 잘 이행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있다.
“소관 국가기관의 장은 제32조제1항 또는 제2항에 따라 위원회가 보고한 날부터 3개월 이내에 보고서에 포함된 소관 권고사항의 이행계획을 행정안전부장관에게 제출하여야 하고, 권고사항을 이행하였을 때에는 그 조치결과를 제출하여야 한다.”(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제32조의2 3항)
법을 개정해 ‘과거사 관련 권고사항 등 처리 심의위원회’를 설치하는 목적은 진실화해위원회의 권고가 조속히 이행되도록 하는 데 있다. 하지만 국방부는 법 개정을 이유로 ‘사과는 9월 이후에 계획해보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권고 이행을 앞당기려고 법을 개정했는데, 오히려 이 법을 빌미로 이행을 미루는 모순.
국방부는 최소한 10년 전부터 ‘공식적으로’ 북한 민간인 납치 피해자 김주삼의 존재를 알았다. 김주삼을 납치한 북파공작원들은 2008년 ‘특수임무’로 인정받아 보상금을 수령했다. 국방부 소속 ‘특수임무보상지원단’은 4년 뒤 보상 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고, 이때 김주삼은 참고인 자격으로 납치 사실을 전부 진술했다.
김주삼이 북한 민간인 납치 피해자라는 사실은 이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됐다. 심지어 정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도 김주삼이 북한 민간인 납치 피해자라는 ‘사실’ 자체는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국방부 스스로 확인한 조사 결과와, 국가 조사기구와 사법부가 확인한 사실을 눈앞에 두고도, 국방부는 법과 제도를 방패 삼아 국가폭력 피해자를 방치하고 있다. 사과하라는 권고 앞에서 ‘법’을 들이밀며 시간을 끄는 국방부. 그렇다면 과연 67년 전 김주삼을 북한에서 납치해 올 때는 타당한 ‘법’이 있었는지 묻고 싶다.
국방부는 법에 따르는 게 ‘매뉴얼’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국가가 언제나 국방부처럼 ‘매뉴얼’만 따르진 않는다. 국가폭력 피해자의 상황을 고려해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지난해 검찰은 납북귀환어부 사건 피해자 11명에 대해 직접 재심 청구한 데 이어, 재심에서 무죄를 구형했다. 피고의 유죄를 입증해 법원의 판결을 구하는 검찰의 통상적인 ‘매뉴얼’과는 다른 결정. 수십 년 전 조업 중 납북됐다가 귀환해 반공법 위반 혐의 등으로 억울하게 처벌받은 어부들의 고통을 고려한 검찰의 판단이었다.
김주삼은 억울하게 남한으로 끌려와 사과 한 번 받지 못한 채 67년 세월을 보냈다. 이제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 국가폭력 피해자의 명예회복이나 사과는 가해 주체인 국가가 나서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일이다. 국가의 책임을 미루는 건 피해자에게 또 다른 폭력이다.
“애들이 백령도에 가자고 했는데 아버지(김주삼)가 계속 안 갔어. 재작년에 억지로 모시고 갔는데, 왜 이제서야 오냐고 물으니까 ‘500원 내고 망원경으로 보면 집이 보이는데, 수영만 하면 가는데, 그게 속상해서 안 간다’고 했대.” (김주삼 아내 이승자 인터뷰 2023. 2. 15.)
김주삼은 이북에 남은 가족들과 만날 수 없을 거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냉담한 현실에, 고향에 가겠다는 희망 대신 단념을 택했다. 백령도에서 망원경으로 내다보면 그의 집이 눈에 들어온다. 수영만 해도 닿을 수 있는 거리. 그러나 좀처럼 고향 땅을 밟을 기회는 오지 않는다.
“(동생들을) 만날 수가 없는 거야, 지금은. 그렇지?”
인터뷰 중 김주삼이 기자에게 건넨 유일한 질문이었다. 나는 말을 아꼈다. 불편한 현실을 상기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과연 그가 동생들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이제 만날 수 있다는 대답을 기다리진 않았을까. 어쩌면 수십 년 동안 누군가 그렇게 말해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한국 정부는 그의 존재를 지워갔지만, 그는 한순간도 비정한 정부를 잊어본 적 없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