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경찰의 전화는 사건 발생 21년 만에 걸려왔다.
“서초경찰서입니다. 정지천 씨 아시죠? 그분이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하셨네요.”
양재훈(가명) 씨의 심장이 요동쳤다. TV에서 그의 얼굴을 봤을 때처럼 말이다. 단란주점에서 자기를 무릎 꿇리고 정지천이 뱉은 낮은 음성도 떠올랐다.
“내가 누군지 알어?”
정지천을 잊은 적 없다. 미디어도 21년간 그가 누군지 수시로 알려줬다. 동국대학교 한의과대학 교수, 동국대학교일산한방병원장 – 서울한방병원장 – 강남한방병원장 역임.
그에게 당한 일을 가족에게도 말 못하고,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속으로 삭이는 동안 정지천 교수는 나날이 비상했다. 급기야 정 교수는 이런 타이틀을 달고 TV에 출연했다.
‘문재인 대통령 한방자문의.’
양 씨는 ‘갑질 교수의 대통령자문의를 박탈해 달라’는 글을 2021년 5월 25일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렸다. <라디오 동의보감>과 KBS, MBC, SBS 등에서 건강을 논하는 한의사 정지천은 사람 괴롭히는 방법도 잘 아는 듯했다. 그해 6월, 정 교수는 양 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최근엔 다른 조치도 취했다.
복수는 피해자의 몫이건만, 오히려 가해자가 보복의 칼날을 벼리는 사건.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여행사 직원 양재훈 씨의 삶을 뒤흔든 사건은 2000년 10월 말 육지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됐다.
“동국대학교 한의과대학 관계잡니다. 정지천 교수님과 개업 한의사 약 30명이 제주도에서 행사를 하는데, 골프장 예약이 가능할까요?”
동국대 측이 문의한 날짜는 12월 8일 금요일부터 일요일인 10일까지. 양 씨는 단박에 거절했다. 당시 제주도 골프장 예약, 특히 12월 부킹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박세리 선수가 1998년 LPGA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골프 인구는 늘었으나, 제주도 내 골프장은 7개에 불과했다.
약 1시간 뒤 정치천 교수가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한의사 제자들과 함께 가는 겁니다. 어려운 것 알지만, 어떻게든 신경 좀 써주십시오.”
정 교수의 간곡한 부탁으로 양 씨는 “한번 알아는 보겠다”고 답했다. 호텔, 관광버스, 항공권은 해결이 가능했으나 골프장 예약은 풀리지 않았다. 며칠 뒤 양 씨는 “일을 진행하기는 어렵다”고 정 교수에게 밝혔다. 이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정 교수가 ‘내가 누군지 아느냐, 라디오 동의보감 진행하는 사람이다’라면서 ‘이제 와서 그만두면 내가 뭐가 되느냐’며 따지더라구요. 행사 망치면 (양 씨의 책임을 묻는 글을) 인터넷에 올리겠다는 말도 하고….”(이하 2023. 3. 13. 셜록 인터뷰)
양재훈 씨는 덫에 걸리고 말았다. 행사 날짜가 임박한 12월 초까지도 골프장 부킹은 어려웠다. 양 씨는 지인이 소개한 골프 전문 여행사를 통해 어렵게 골프장을 예약했다. 단, 조건이 있었다.
“티오프(골프 시작 시각)는 골프장 상황에 맞춰야 한다는 걸 정 교수 측에 전달했습니다. 이걸 알리지 않고 행사를 맡는 건 말이 안 되죠.”
12월 8일 금요일, 서울 등 전국에서 정지천 교수와 그의 제자 한의사들이 제주도에 속속 도착했다. 이들은 제주시 일도2동에 있는 고급 일식당 ‘화남’에서 저녁을 먹었다. 양 씨는 식당 룸으로 들어가 한의사들에게 골프장 티오프 시각을 알렸다.
“내일(9일) 핀크스골프장을 어렵게 예약했습니다. 오전 7시 시작인데요. 퍼블릭 구(9)홀입니다….”
한의사 한 명이 훅 끼어들어 양 씨의 말을 끊었다.
“나인홀!”
그것도 모르냐는 말투로 “구홀”이란 표현을 꼬집은 것이다. 양 씨의 얼굴이 붉어졌다. 양 씨는 이어 일요일(10일) 골프장 예약 일정을 알렸다.
“오전 8시 경기를 원하셨지만, 골프장 상황상 그렇게는 어렵습니다. 오전 11시로 잡혔는데요….”
정지천 교수의 짜증이 시작됐다.
“내가 분명히 오전 8시대로 하라고 했는데. 몇 번이나 얘기하고 기회를 줬는데 왜 내 꼴을 우습게 만들어요? 됐어, 골프 안 쳐!”
사전에 수차례 알렸음에도 정 교수는 자기 계획만 고집했다. 그의 위세는 대단했다. 만류하거나 토를 다는 한의사는 없었다. 양 씨의 붉어진 얼굴 위로 식은땀이 고였다. 양재훈 씨는 룸 밖에서 대기했다. 어떻게든 수습해야 했다. 식사를 마친 정 교수는 룸에서 나오며 식당 사장에게 말했다.
“여기 밥값이랑 술값, 여행사 직원이 낼 거예요.”
사전 논의 없는 일방적 지시. 부당했지만 항의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한의사들은 이번에도 아무 말이 없었다. 월급 200만 원도 안 되는 양 씨가 한의사들 밥값 192만 원을 카드로 결제했다. 식당 밖으로 나온 정 교수는 양 씨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한의사들에게 말했다.
“나 돈 많아! 근데 여기 돈 못 내.”
정 교수와 한의사들은 관광버스를 타고 2차 장소인 ‘미스코리아단란주점’으로 이동했다. 양 씨는 현장에 남았다. 지갑보다 내면의 자존감이 더 쪼그라들었는지 숨 쉬기가 어려웠다. 얼굴에 이어 손에 식은땀이 고이기 시작했다.
부당하고 억울했지만, 정지천 교수와 한의사 30여 명에 맞설 수는 없었다. 그들은 ‘갑’이었고, 여행사 직원 양재훈은 ‘을’이었다. 다른 선택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양 씨는 땀에 젖은 손을 바지에 문지르고 미스코리아단란주점으로 달려갔다.
지하1층 단란주점에 도착했을 때, 정 교수는 중앙홀 가운데 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모임의 좌장다웠다. 양 씨는 정 교수에게 다가가 허리를 푹 숙였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잘못한 게 없지만 일단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라도 을은 갑의 기분을 풀어줘야 했다. 정 교수 옆에서 눈치를 보던 한의사 한 명이 “다른 방으로 가자”고 했다. 정 교수와 한의사 네 명이 빈 방으로 이동했다. 양 씨도 따라 들어갔다. 룸 중앙에 정지천 교수는 앉았다.
“무릎 꿇어.”
낮고 차분한 정 교수의 목소리. 이게 뭔가 싶어 양재훈 씨는 멀뚱히 서 있었다. 정 교수 주변 한의사 네 명은 말없이 양 씨를 바라봤다. 양재훈 씨는 정 교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내가 누군지 알어?”
눈앞이 캄캄했다.
“내가 주관하는 행사인데, 제자들 앞에서 당신이 다 망쳐놨어. 내가 전에 와이프랑 ○○호텔에 투숙했을 때도 엄청 따져서 지배인, 직원들 다 와서 내 앞에서 무릎 꿇었어! 날 견뎌내는 놈들이 있을 거 같아? 내가 본때를 한번 보여줄까?”
말리기는커녕 한 한의사가 정 교수를 거들었다.
“이거 완전히 사기꾼이네. 이봐 당신, 골프장 예약 안 했지?”
별 따기만큼 어려운 일을 해냈건만, 자신들 원하는 시각이 아니라고 이렇게 모욕을 주다니. 억울했지만 다른 선택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 여행사가 여기서 가깝습니다. 지금이라도 가서 골프장 예약 수수료를 납부한 내역을 가져오겠습니다.”
양 씨는 곧바로 여행사로 달려가 해당 문서를 가져왔다. 그제야 기분이 조금 풀렸는지 정 교수는 양주를 주문했다. 양 씨에게도 술을 따라주며 한잔 권했다. 양 씨는 마시지 않았다. 이렇게 지옥의 밤이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끝이 이상했다. 단란주점을 나갈 때 사장이 양 씨에게 명함을 요구했다.
정 교수와 제자들은 토요일 오전부터 핀크스골프장에서 골프를 쳤다. 티오프 시각으로 사람 무릎까지 꿇리더니, 정작 자신들은 과도한 음주로 지각 도착을 했지만 말이다.
행사 마지막인 일요일(10일) 오전 11시, 정 교수 일행은 파라다이스 골프장에서 경기를 즐겼다. 오후부터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정 교수 일행은 18홀 경기를 모두 즐기지 못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자연 현상, 언제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골프장 측은 남은 홀의 경기를 나중에 즐길 수 있는 쿠폰을 정 교수 측에 제공했다.
정 교수와 제자들은 골프장에서 한참 떨어진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제주공항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지옥의 2박 3일”이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정 교수 일행은 아직 숙박료, 관광버스 이용료, 골프장 예약수수료, 여행사 수수료 등 1원도 결제하지 않았다.
‘돈 잘 버는 한의사 30여 명이 왔는데, 설마 돈을 떼먹겠어.’
양 씨는 걱정을 접고 공항에서 한의사들에게 항공권을 나눠줬다. 정 교수와 한의사 몇 명이 탑승 수속 직전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돈 계산을 하나 싶었다. 정 교수가 “잠깐 보자”고 양 씨를 한쪽으로 불렀다.
양 씨는 첫날 자신이 대납한 식사비 192만 원도 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기대는 모멸감으로 돌아왔다.
“손해배상 어떻게 할 거예요?”
이게 뭔 소린가.
“(우리가 원하는 시각에 골프 못 치고) 일정 완전히 망쳐서 제대로 된 거 하나도 없잖아요. 내 체면 완전히 상했고. 이거 손해배상 어떻게 할 거예요?”
황당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식당과 단란주점에서 그랬듯이 온몸이 굳어버렸다. 음주로 토요일 티오프를 어긴 한의사가 끼어들었다.
“첫날 일식당 밥값, 단란주점 술값은 여행사에서 부담하는 걸로 마무리합시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손해배상 요구 안 할게요.”
한의사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계산했다. 정지천 교수와 제자들은 양재훈 씨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탑승구 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들이 사라진 뒤에도 양 씨는 멍하게 공항에 서 있었다. 모든 게 비현실적이었다. 휴대전화 진동이 양 씨를 흔들어 깨웠다. 미스코리아 단란주점 사장이었다.
“술값 계산하셔야죠! 언제 오실 겁니까?”
교수와 한의사들이 집단 ‘갑질’에 눌려 잘못 없이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린 2박 3일의 기억이 그제서야 파도처럼 밀려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양재훈 씨는 주차장에 세워 둔 차에 앉아 펑펑 울었다. 서럽고 억울해서 펑펑 울었다.
정지천 동국대 한의과대학 교수와 제자 한의사 30여 명이 지나간 자리, 그들의 밥값, 술값 일부, 골프장 수수료 등 약 500만 원을 여행사 직원 양재훈 씨가 지불했다.
갑질 피해를 겪은 그해, 양 씨의 아들이 태어났다. 4년 뒤 딸도 태어났다. 잘못도 없이 누군가에게 무릎 꿇은 경험을 양 씨는 가족은 물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자기만의 치욕으로 꼭꼭 숨겼다. 머리를 흔들며 잊고 또 잊으려 노력했다.
정지천 교수는 불쑥불쑥 양 씨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는 잊을 만하면 TV에 등장해 ‘건강’을 논했다. 곧바로 채널을 돌려도 2000년 12월 그때처럼 얼굴에 식은땀이 맺혔다.
정 교수는 운전할 때도 나타났다. 무심코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체질과 건강을 논하는 정지천의 목소리가 나오면, 다시 그날의 음성이 양 씨의 귀에 퍼졌다.
“내가 누군지 알어? 무릎 꿇어.”
신호등보다 정지천 교수의 얼굴이 먼저 떠오른 날엔 길가에 차를 세우고 심호흡을 했다. 땀 찬 손에서 핸들이 자꾸 미끄러져 운전하기 힘들었다. 우울증이 깊어졌고 불면의 밤이 이어졌다.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고통을 겪는 걸까. 갑질하는 그에게 왜 나는 찍소리 한 번 못하고, 당하고만 있었을까….’
자책과 원망은 끝없이 이어졌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고 정지천 교수는 대통령 한방자문의로 위촉됐다.
‘나는 이렇게 아픈데, 저 사람은 훨훨 비상하는구나.’
2021년 5월, 양 씨는 용기를 내 정지천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 교수처럼 낮고 차분하게 “내가 누군지 알어?“라고 묻고 싶었지만, 몸이 떨리고 목소리는 더 떨렸다. 말이 두서없이 나왔다.
“저… 제주도 양재훈이라고 합니다. 2000년 미스코리아단란주점에서 제가 무릎을 꿇고 빌었죠…. 그거 술값(일부)을 제가 부담을 했는데….”
정 교수는 금시초문이라는 듯 “그래요?”라고 되물었다. 양 씨는 기억을 되살리려 이야기를 이어갔다.
양재훈 : “제주 일도지구에 있는 일식집 제가 결제를 했거든요.”
정지천 : “글쎄요…. 언제 적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
양재훈 : “동국대 한의대 행사 때 제가 거의 520만 원을 썼습니다!”
정지천 : “글쎄요.(웃음) 우리 식사비는 우리가 냈을 텐데, 이상한 말씀을 하시네.(웃음)”
역시 가해자들은 쉽게 잊는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양 씨는 며칠 뒤 “정지천 교수의 대통령 한방자문의 해촉을 요구한다”는 국민청원을 청와대 게시판에 올렸다. 정 교수는 얼마 뒤 해촉됐다.
정 교수는 2021년 6월 허위사실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양 씨를 경찰에 고소했다. 경찰은 2022년 1월, 양 씨에 대해 ‘무혐의’ 불송치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사건이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정지천 교수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정 교수는 문제제기를 해서 사건을 검찰로 끌고 갔다. 제주지방검찰청은 지난 2월 양 씨에 대해 ‘혐의없음’으로 불기소를 결정했다. 정 교수는 곧바로 항고했다. 사건은 고등검찰청으로 넘어갔다. 정순신 전 검사가 아들의 학교폭력 사건을 사과 없이 법적으로 질질 끌었던 것처럼, 정지천 교수도 이 사건을 끝까지 밀고 갈 모양새다.
양재훈 씨는 지난 13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눈물을 흘렸다.
“2000년에는 위세와 집단 갑질로 사람 짓밟더니, 이젠 법으로 사람을 말려 죽이네요.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내가 이 고통을 언제까지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싸움이 언제 끝날지 정말 막막합니다.”
정 교수는 지난 14일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술값 일부, 식사비를 양재훈 씨가 낸 건 인정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양재훈 씨가 정순신 사례를 보고 나 망신 주려는 거 같은데,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대부분 지어낸 말이고 거짓말입니다. 무릎 꿇린 적 없습니다. 우리가 피해자입니다.”
무슨 피해를 봤다는 걸까?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골프를 못 쳤잖아요. 그 때문에 비도 맞았고. 손해배상 차원에서 양재훈 씨가 술값, 밥값 낸 겁니다.”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는 쪽으로 기억을 복원한 정지천 교수. 혹시 그는 이것도 기억하고 있을까?
그해 12월 8일, 미스코리아단란주점에서 자기 앞에서 무릎 꿇은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 피해자는 최근 경찰에서 당시 기억을 진술했다. 양재훈 씨의 무혐의 처분 배경에는 그의 진술이 있다.
거짓말은 누가 하고 있는지, 정지천 교수가 누구보다 잘 알 듯하다. 그는 지금도 학생을 가르치며, 동국대일산한방병원에서 진료를 보고 있다.
박상규 기자 comune@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