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가 돌아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측근 24명과 함께 국립대전현충원을 찾았다. 사면 이후 첫 대외 행보. 이 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신년 특별사면으로 잔여 형기 14년 6개월과 벌금 82억 원을 면제받았다. 언론은 이 전 대통령의 현충원 참배를 두고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 활동에 나선 것 아니냐‘는 해석이 담긴 보도를 내놨다.
MB가 돌아오기 딱 일주일 전에, 김종익(69)을 만났다.
2008년 국무총리실 불법 민간인 사찰 피해자. 광우병 촛불집회 이후 신설된 공직윤리지원관실은 김종익을 ‘집회 배후세력‘으로 점찍고 그 삶을 샅샅이 뒤졌다. 이후 김종익은 직장을, 회사 지분을, 평화롭던 일상을, 건강을 잃었다.
김종익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걸었다. 결과는 ‘일부 승소’. 하지만 인정된 배상 액수는 너무 적었다. 법원은 김종익에게 소송비용 약 80%를 부담하라고 결정했다.
MB의 벌금 82억 원은 없던 일이 됐는데, 김종익에겐 국무총리실에 갚아야 할 2500만 원이 생겼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불법 민간인 사찰 피해자 김종익을 지난달 15일, 서울 동작구에 있는 그의 집에서 만났다.
김종익은 ‘미리‘가 몸에 밴 사람이다. 전화 통화로 인터뷰 약속을 잡은 날 그는 기자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질문지를 미리 보내주시면 좋은데….”
인터뷰 당일 그가 안내한 서재 책상 위에는 질문지에 대한 답변이 종이에 인쇄돼 있었다. 그 옆에는 기자를 위해 미리 준비한 떡과 과일이 접시에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김종익은 뭐든 미리 준비하는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다. 2008년 9월 전까지는 그랬다.
김종익은 25분짜리 동영상을 블로그에 공유했다. 이명박 정부의 국가 정책을 비판하고 촛불집회 과정에서 촉발된 문제를 다룬 영상이었다. 일명 ‘쥐코‘라 불렸던 영상은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가 미국의 의료 보험 정책을 비판한 다큐멘터리 <식코>(2008)를 패러디했다.
이미 백만 명 이상이 본 그 영상이 불행의 씨앗이 될 줄은 몰랐다. 김종익은 이 영상을 만들지도 않았고 제작에 돈을 댄 적도 없었다.
“하물며 그런 영상을 제작했다면 또 어때요? 그랬다고 국가가 국민을 사찰할 수 있는 건가요.”
미처 준비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김종익이 대표이사로 있던 KB한마음(현 뉴스타트한마음)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KB 국민은행 자회사였다. 같은 해 9월 17일, 직장 후배이자 당시 국민은행 노무팀장 임승현(가명)이 전화를 해왔다.
“선배, 블로그에 무슨 영상 올렸어요? 국무총리실에서 그 영상을 문제 삼고 있고 있어요. 선배 뒷조사도 하는 모양이에요.”
그날까지만 해도 심각한 사안인 줄 몰랐다. 후배 말을 듣고 집에 돌아가 바로 동영상을 삭제했다. 하지만 총리실에서 원하는 건, 그 동영상이 블로그에서 지워지는 게 아니라, 김종익이 지워지는 거였다.
임승현은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소속이자 민간인 사찰 주도자인 원충연과 같은 K대 대학원 출신이었다. 지원관실 점검1팀 소속이었던 원충연은 대학원 모임에서 만난 임승현에게 이런 취지로 말했다.
“김종익이 대표이사직 사임하고, 회사 지분도 포기해서 국민은행과 무관해져야 해가 되지 않을 거야. 안 그러면 국민은행장까지 위험해져.”
원충연이 김종익을 물러나게 하기 위해 남경우 당시 국민은행 부행장을 만난 날, 김종익은 직원들에게 사의를 표명했다. 이틀 후엔 일본으로 출국해 교토대학 인근 게스트하우스에서 3개월간 홀로 지냈다.
“출국 금지되기 전에 일단 빨리 나가야겠다, 한 거죠. 일본에 있는데도 불안했어요. 처음에는 1층에 있는 방에서 머무르다가 나중엔 층을 옮겨달라고 했을 정도였죠.”
불안은 상상이 아니었다. 당시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에서는 일본 게스트하우스 주소와 연락처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출국 이후 총리실의 압박은 더 거세졌다. 원충연은 9월 29일, 다시 한번 남경우 부행장을 찾아가 국민은행이 김종익을 고의로 도피시켰으니 문제 삼겠다고 말했다. 또, KB한마음 사무실로 가서 당시 경리부장에게 김종익의 급여총괄표, 퇴직금 대장을 제출하게 했다. 이후엔 김종익의 업무추진비 및 법인카드 사용내역 등 역시 손에 넣었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은 2008년 9월경 직접 김종익을 서울지방경찰청에 명예훼손과 공금 횡령 혐의로 수사 의뢰했다. 10월경엔 다시 직원을 불러내 김종익의 회사 자금 횡령 여부를 집중 조사했다. 김종익은 결국 회사 지분 75%를 헐값에 팔아야 했다.
서울지방경찰청이 수사 의뢰를 받아들이지 않자 총리실은 동작경찰서로 방향을 틀었다. 동작경찰서는 처음엔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가, 담당 형사를 교체해 김종익을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넘겼다.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정말, 정말 모욕감을 많이 느꼈어요. 제가 10분 일찍 도착했더니 담당 검사가 막 화를 내더라고요. ‘왜 이렇게 일찍 왔냐‘고. 미리 간 것도 죄구나, 여기는 그런 곳이구나…”
검찰 조사는 모욕감을 견디는 시간이었다. 김종익은 이때 겪은 수모에 대해 말하면서 안경을 벗었다.
“인간에게는요, 누구에게나 숨기고 싶은 내면이 있잖아요. 인간이기에 가지고 있는. 검찰은 내가 살면서 지키고 싶은 가장 깊은 내면까지 내놓게 만들어요. 그냥 내놓게만 하는 게 아니라요, 비틀고, 짓밟고, 흔들고… 그래서 파멸하게 해요.”
이 말을 하면서 김종익의 문장은 여러 번 끊겼다. 사이 사이엔 숨을 고르느라 짧은 침묵이 생겼다.
검찰 조사실에서 김종익의 내면은 세탁기에 들어가기 전 빨랫거리처럼 거꾸로 뒤집혀 털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느낀 순간은 검찰의 화살이 직장 동료 등 주변 사람에게 향했을 때다.
“검찰이 직장 동료, 후배까지 불러서 조사했어요. 일단 부르면 하루 종일 기다리게 해요. 그러고 나서 제가 동료들 경조사비로 낸 돈 액수를 확인하는 질문을 하는 거예요. 또, 제 비리를 대라고 하기도 하고요. 조사받았던 한 후배가 저한테 전화해서 그러더라고요. ‘김 선배 때문에 나 인생 종 치게 생겼다‘고.”
국가가 개인의 삶을 사찰한다는 건 나뿐만 아니라 주변인의 삶마저 영향권에 놓이는 일이었다. 한 일간지는 그의 동생이 노동운동을 하다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사실까지 찾아내 보도했다. 각자의 위치에서 삶을 일구고 있는 가족들, 주변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사라져야 그들의 고통도 끊긴다고 생각했다.
검찰 조사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을 때 김종익은 조용히 죽음을 향해 걸어갔다. 집 주변 내과 다섯 군데를 돌면서 수면제를 처방받았다. 손바닥엔 수면제 수십 알이 모였다.
“검찰 조사가 그 다음주 수요일쯤에 잡혀 있었어요. 그때 저는 자연스럽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아, 나는 화요일까지만 살아야겠다.’
지금 생각해도 감사하고 신기한 게, 그런 결심을 했을 때 대학교수로 일하는 친한 동생이 집으로 왔어요. 저한테 약속 하나 하자고 하더군요. 내일 신사동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나자고. 그 약속만 지켜달라고. 약속 장소로 갔더니 책 <당신이 옳다>를 쓴 정신과 의사, 정혜신 박사가 있더라고요.”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는 김종익에게 물었다.
“선생님, 지금 뭐가 제일 하고 싶으세요.”
김종익은 대답했다.
“울고 싶어요. 실컷 울고 싶습니다.”
서울중앙지검은 혐의 사실은 인정되지만 초범이라는 이유 등으로 김종익에게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정 박사를 만나는 동안 시간이 흘렀다. 2010년, 김종익이 겪은 모든 일이 총리실의 불법 행위였다는 의혹이 터져 나왔다. 언론을 통해 의혹이 확산되자 검찰은 2010년 7월 수사팀을 구성했다. 민간인 불법 사찰 사건에 대한 검찰의 1차 수사였다.
비슷한 시기, 민간인 사찰을 주도한 진경락 당시 기획총괄과장은 한 직원에게 이렇게 지시한다.
“(민간인 사찰 자료가 담긴)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부수든지 한강에 던져라.”
직원은 보안업체에 컴퓨터를 들고 가서 하드디스크를 손상시킨다. 2년 뒤, 그는 폭로자이자 고발자가 된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증거 인멸 지시 등 은폐 행위를 세상 밖으로 증언한 것. 이 사람이 바로 장진수 전 주무관이다. 2012년 장 전 주무관의 폭로로 검찰은 2차 수사를 시작했다.
불법 사찰에 관여한 이인규, 진경락, 김충곤, 원충연 등 핵심 직원들은 이른바 ‘영포라인‘으로 분류됐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고향인 경북 영일·포항 지역 출신 인사들. 특히 불법 사찰의 끈은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 이영호 전 고용노사비서관 등 이 전 대통령의 최측근과 이어져 있었다. 이 둘은 2013년 9월 대법원에서 징역형이 확정됐다.
같은 해 이인규 전 지원관은 대법원에서 민간인 불법 사찰 혐의(강요 등)가 인정돼 징역 10개월이 확정됐다. 원충연 전 조사관 역시 강요, 직권남용권리행사 방해 등으로 기소돼 대법원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 받았다. 장 전 주무관에게 증거 인멸을 지시한 진경락 전 과장에겐 2014년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이 선고됐다.
법원의 판결을 통해서 수사권이 없는 국무총리실 직원들이 김종익이란 무고한 개인을 불법 사찰한 사실이 인정됐다. 이명박 정부는 ‘국가 권력을 이용해 한 개인을 상대로 조직적 범죄 행위를 저지른 정부‘가 됐다.
검찰이 2010년 기소한 총리실 직원 명단엔 장진수 전 주무관도 포함됐다.
“장진수 전 주무관도 증거인멸 등의 혐의로 기소됐어요. 2013년에 장 전 주무관이 대법원 판결을 받던 날 저도 재판에 갔어요. 재판 끝나고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이렇게 말했죠. ‘분노 때문에 생을 망치지 말라‘고…. 공익제보자의 삶은 평탄하지 않잖아요. 그런 부분이 많이 걱정됐고 안타까웠어요.”
장진수 전 주무관은 2013년 대법원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 형을 확정받았다. 이 때문에 지난해 이명박 전 대통령이 사면됐을 때 장 전 주무관의 사법처리도 무효로 하는 등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분노 때문에 생을 망치지 말라‘. 이 말은 어쩌면 김종익이 2008년 9월 이후 스스로 끊임없이 말했던 문장일지 몰랐다.
“분노는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으니까요.”
분노가 아니면 무엇이 그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까. 국가가 빼앗은 그의 삶을 누가 보상해줄 수 있을까. 김종익은 사법적 해결 방식을 선택했다.
“그 사건(총리실 불법 사찰) 이후에 제 삶에 어떤 변화가 생겼냐고 묻는다면 단언컨대 이렇게 답할 겁니다. 저는 그 일로 대한민국에서 익명의 개인으로 살아갈 기회를 박탈당했습니다.
한 번은 친한 친구와 등산 후에 막걸리를 마시고 있을 때였어요. 모르는 분이 저에게 ‘힘내시라’며 술값을 계산했더군요. 저는 감사하기도 했지만, 두렵기도 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저를 안다는 게 공포로 다가왔거든요. 재판을 통해, 잃은 것을 되찾고 싶었어요.”
그렇게 소송은 시작됐다. 그리고 소송이 한창 진행 중이던 2012년, 김종익에겐 병이 생겼다. 암이었다.
(※ 다음 기사 <‘불법사찰’ 가해자가 김종익에게 청구서를 보냈다>로 이어집니다.)
주보배 기자 treasure@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