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셜록>과 팟캐스트 <이이제이>에서 소개한 양승태 대법원 재판거래 피해자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모두 열악한 주거 공간에서 산다는 점이다.
- 오재선 (양승태 제주지법 부장판사 오판으로 간첩 누명) – 제주양로원 2인실에서 생활.
- 정도곤–이외식 모자 (대구 10월사건 피해 유가족. 대법원이 국가배상 책임 부정) – 이외식은 충북 영동군의 요양원 2인실에서 생활.
- 중곡동 부녀자 강간살인사건 (1심, 2심 법원 국가배상 책임 부정) – 어린 남매와 남편, 할머니 총 네 명이 10평 미만 임대주택에 거주.
이들을 차례대로 소개하던 지난 7월 말, 전 중소기업 사장이 <셜록>에게 메일 한 통을 보냈다.
“저는 수원에 거주하는 1959년생 김종식입니다. ‘주식회사 스탈휀스개발’이란 회사의 대표를 지냈습니다. 팟캐스트 <이이제이>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농단 관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게도 억울한 판결이 있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던 2015년 대법원 판결에 대해 한 번 되짚어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연락을 합니다. 회사를 도산하게 만든 판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메일을 보냅니다.”
그의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오랜기간 어려운 사정에 처한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희 사례는 피해가 덜하다고 느끼실지 모르겠습니다. 저희 사건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정부에서 제정한 신기술 지원 법령을 오히려 담당 공공기관 및 공무원들이 지키지 않아 기업이 오히려 큰 피해를 입고 도산했습니다. 국가의 기술발전에 큰 해악을 끼친 중요한 일입니다.”
김종식 전 사장을 만나러 지난 8월 초 수원으로 향했다. 흰 셔츠에 검은색 양복바지 차림의 김 전 사장은 작은 갈색 가방 하나를 들고 약속 장소에 나왔다.
그가 가방을 열고 작은 금속 덩어리 하나를 꺼냈다. 그가 인생을 걸고 개발한 ‘고내식성 알루미늄피복철선 육각개비온’. 흔히 말하는 돌망태다.
“쉽게 표현하면 돌망태인데요. 이름 때문에 하찮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천 제방, 댐, 방파제 등 토목공사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재료입니다. 이 철망 안에 돌을 넣고 제방이나 방파제 등을 쌓습니다. 이게 없으면 하천 제방 공사 등을 할 수 없습니다.”
이어 그의 입에서는 익숙한 이름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 중소기업 정책에 저희는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노 대통령께서 중소기업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죠. 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의원님과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양승태 대법원’이 모든 걸 끝장냈지만요.”
김종식 전 사장, 말그대로 ‘사장’ 출신이니 이전에 만난 재판거래 피해자와 사정이 다를 거라 생각했다. 그의 단정하고 말끔한 외양도 그런 생각을 품게 했다.
“몇 번 죽을 생각을 했습니다. 회사 도산하고, 여기저기서 채권자들 몰려오고… 모든 재산을 다 날렸습니다. 살던 아파트도 경매로 넘어갔고요. 지금은 다 큰 아들 둘과 아내까지, 총 네 식구가 작은 오피스텔에서 삽니다.”
그는 왜 모든 걸 잃었을까.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그에게 어떤 치명적인 영향을 줬을까.
김종식 사장은 1959년에 태어났다. 영남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했다. 금속 관련 회사에서 30년 가까이 일했다. 성실하고 기술이 좋은 그는 회사에서 인정을 받았다.
그는 독자 연구를 시작해 2000년, 일루미늄 피복철선 육각개비온(돌망태)을 만들었다. 기존 철보다 부식이 안 되고 강도가 좋은 제품이었다. 신제품으로 가격이 다소 높지만, 효율이 좋기에 그의 제품을 쓰면 궁극적으로 40% 정도 비용절감이 예측되기도 했다. 대학 연구 결과는 물론이고 정부에서도 이를 인증했다.
돌망태는 주로 하천, 제방, 댐 공사 등에 쓰인다. 이런 공사는 국가의 기본 인프라와 연관이 깊다. 공사 주체도 대개 지방자치단체 등 공공기관이다. 결국 김종식이 개발한 제품은 국가 예산 절감에도 도움이 된다. 국가도 그의 뛰어난 기술을 인정했다.
김종식은 서재원 사장과 동업으로 ‘주식회사 스탈휀스개발’을 2002년 설립했다. 참여정부 시절이던 2006년, 산업자원부장관은 김종식이 만든 제품에 “산업발전법 제26조 및 동법시행령 제28조 규정에 의거하여 성능과 품질이 우수한 신기술 제품임을 인증한다”며 인증서를(NEP) 발부했다.
참여정부는 당시 자유무역협정(FTA)에 대비해 국내 중소기업 보호과 산업발전을 위해 ‘산업기술혁신촉진법’을 개정했다. 말 그대로, 기업의 기술 혁신을 촉진해 국가 경제를 강화하겠다는 취지다. 이 개정 법률은 2006년 11월 시행됐다.
핵심 내용에 이런 게 있다.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공공기관(이하 “공공기관”이라 한다)은 구매하려는 품목에 인증신제품이 있는 경우에는 해당 품목의 구매액 중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일정 비율 이상을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인증신제품으로 구매하여야 한다. 다만, 인증신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부당한 경우로서 산업통상자원부장관이 인정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 산업기술혁신촉진법 17조 2항
동법 시행령 23조에는 이렇게 규정돼 있다.
“해당 품목의 구매액 중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일정 비율이란 해당 품목의 구매액의 100분의 20을 말한다.”
쉽게 말해, 공공기관에서 어떤 물품을 구매할 때 NEP인증(신제품인증) 제품이 있으면 의무적으로 20%이상 구매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부의 의무구매로 신기술 개발을 촉진하고 경제를 키우려는 조치다.
예컨대, 김종식이 개발한 돌망태에 위의 법령을 적용하면 이렇다. 서울시가 한강을 정비해야 하고, 여기에 100억 원어치의 돌망태가 필요하다고 치자. 그럼 서울시는 산업기술혁신촉진법에 따라 신제품인증을 받은 김종식의 돌망태를 최소 20억 원어치를 의무구매해야 한다.
평생 금속개발자로 살아온 김종식은 이 법을 믿었다. 무엇보다 참여정부의 중소기업 육성 정책을 믿었다. 노무현 정부 말기로 가면서, 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일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이 이 법을 지키지 않았다.
국가의 신제품 20% 의무구매를 믿고 경남 김해시에 공장을 차린 김종식 사장과 동업자 서재원(1958년생) 사장. 그리고 직원 10여 명은 큰 위기에 빠지기 시작했다.
김종식, 서재원 사장은 법이 정한 의무구매를 이행하지 않는 공공기관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시작했다. 김종식 사장은 참여정부 청와대 법무비서관을 지낸 박범계 변호사를 2010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박 변호사는 참여정부 시절의 중소기업정책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에 의문을 품고 두 사장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소송은 하나마나였다. 법이 정한 내용을 공공기관이 지키지 않았으니 재판부마저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느냐”며 의아해했다. 결국 재판부의 조정으로 공공기관과 김 사장 측은 이렇게 합의를 봤다.
“2006년 6월 12일 산업자원부장관으로부터 신제품인증을 받은 돌망태 제품에 대하여 국가는 2012년 4월 30일까지 7억 원 상당을 구입하라.”
이런 조정이 있은 후에도 국토개발을 담당하는 정부부처와 지방자치단체는 계속 법이 규정한 의무구매를 이행하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 때 김종식 사장은 산업기술혁신촉진법 관련 규정을 지키지 않은 지자체 경상북도, 봉화군, 구미시, 영주시, 의성군, 문경시, 포항시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걸었다. 공교롭게도 모두 TK지역인 이들은 의무구매를 이행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소송을 하나마나였다. 2011년 창원지방법원 재판부는 김 사장 측의 손을 들어줬다. 2심 부산고법도 2013년 김 사장의 손을 들었다. 손해배상액은 크게 줄었지만 어쨌든 김 사장의 요구와 주장이 타당하다고 1,2심 법원은 인정했다.
이 모든 결과를 대법원이 엎었다. 대법원은 2015년 5월 28일 이런 취지로 선고했다.
“산업기술혁신촉진법에 신제품인증 제품을 의무구매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지만, 이를 이행하지 아니하였을 때 손해배상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해석할 만한 근거 규정이 없다. 경상북도와 포항시 등은 손해배상을 할 이유가 없다.”
공공기관이 법을 지키지 않은 건 맞지만, 그렇다고 돈까지 물어줄 필요는 없다는 논리. 판결을 한 당시 대법원 제1부는 이인복(재판장)-김용덕-고영한(주심)-김소영 대법관으로 구성됐다. 대법원 재판거래 의혹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대법관들이다.
법을 굳게 믿은 김 사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지키지 않아도 문제가 없는 법을 왜 만들었답니까? 참여정부 때 20% 의무구매 규정을 만든 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공기관이 자기들끼리 ‘짬짜미’해서 물품을 구매할 우려가 있고, 이는 결국 기술혁신 저해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공공기관이 앞장서 기술 좋은 중소기업 제품을 사는 등 판로를 열어줘야 기업들이 의욕적으로 제품 개발에 투자를 할 거 아닙니까? 국가가 법을 지키지 않아 시민이 피해를 입었는데, 배상 책임은 없다니… 그럼 그 법을 누가 지킵니까?”
앞서 말한대로, 돌망태는 주로 공공기관에서 구매를 한다. 대법원이 ‘의무구매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취지로 판결하자 김 사장의 사업은 더욱 쪼그라들었다. 그는 끝내 도산하고 말았다.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김종식–서재원 두 사장 앞으로 각종 채권이 날아왔다. 두 사장의 집은 경매로 넘어갔다. 모든 살림에는 빨간 딱지가 붙었다. 김종식 전 사장은 파산했고, 회생 절차를 밟고 있다. 두 사장은 모든 재산을 처분했지만 여전히 각각 4억 원의 빚을 지고 있다. 갚을 길이 막막한 빚이다.
두 사장의 파산만큼 중요한 일이 있다. 대법원 판결로 참여정부가 정성을 들였던 법 ‘산업기술혁신촉진법’의 의무구매 조항은 있으나마나 한 규정이 됐다. 주식회사 스탈휀스개발 도산 이후 다른 중소기업도 줄줄이 무너졌다.
새로운 기술 개발로 ‘2009년 기술혁신경영대상’을 받은 회사는 사라졌고, 신제품인증까지 받은 돌망태는 지금 별 쓸모없는 제품이 됐다.
2010년 김종식–서재원 사장을 도왔던 박범계 의원은 8월 30일 전화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양승태 대법원의 판결은 신생산업을 막고 기존 기득권을 지켜주는 보수적인 판결입니다. 국가배상 책임을 배우 협소하게 해석한 것도 역시 그런 맥락으로 볼 수 있을 듯합니다.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좋은 기술을 보유했던 김종식 전 사장은 오피스텔에서 산다. 서재원 사장은 컨테이너에서 주로 생활한다. 역시 <셜록>이 만난 재판거래 피해자, 혹은 ‘재판거래 의혹 피해자’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양로원, 요양원, 임대주택, 오피스텔, 컨테이너에서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