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의 말투는 친절했지만 분위기는 위협적이었다.

“무슨 사진 찍었는지 좀 볼 수 있을까요?”

사진기를 쥔 손이 얼어붙었다. 순식간에 경찰 네 명에게 둘러싸인 상황. 취재원과 사진 촬영을 진행한 뒤 그를 먼저 보내고 나도 회사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경찰 중 한 명은 카메라를 건네받아 사진을 살펴봤고, 선글라스를 낀 다른 한 명은 신분증을 보여줄 수 있냐고 물었다. 마지막으로 기자의 전화번호까지 수첩에 적어 갔다.

문제가 된 건 사진을 찍은 장소였다. 우리가 서 있던 곳은 ‘문’ 앞이었다. 그 문 너머는 완전한 우리 땅이 아니다. 철조망이 둘러싼 담장 속에 있는 문 옆에는 이런 글씨가 있다. ’GATE 3-MARFOR(해병부대)’.

용산에 긴장이 흐르게 된 건 오래된 일이다. 1945년 광복 후 미 병력은 일본군 병영에 미군기지를 설립했다. 이후로 지금까지 쭉 용산 땅에는 미군이 주둔했다. 33년 전부터 논의된 기지 반환은 아직 진행 중이다. 

지난달 13일 용산 미군기지 앞에서 김은희 온전한생태평화공원조성을위한용산시민회의 대표를 만났다. 이 문 너머에는 주한 미 해군사령부와 한미연합군사령부가 있다 ⓒ셜록

용산을 찾은 이유는 국방부에 ‘용산기지를 원래 계획대로 이전하라’는 소송을 제기한 주민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용산 주민 33명은 동두천시 주민 2명과 함께 2015년 국방부 장관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걸었다. 결과는 패소였다. 올해 1월, 주민들의 집에는 청구서가 도착했다. 소송비용 총액 약 1000만 원을 원고들이 부담하라는 내용이었다.

35명의 원고 중 첫 번째로 이름을 올린 권오창(87) 옹은 당시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소송에 뛰어들었다. 주민소송단에 참여한 최명희(42) 씨는 “소송에서 이겨도 개인적으로 볼 이득은 없었다”고 했다. 주민소송단을 꾸린 김은희 온전한생태평화공원조성을위한용산시민회의 대표는 “승소 확률이 높지 않다는 걸 이미 알았다”고도 했다. 

그런데 이들은 왜 소송에 나섰을까. 패소 결과로 청구된 소송비용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지난달 세 사람을 만나 그 답을 들어봤다.

지난달 20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도서관 ‘고래이야기’에서 권오창 옹이 소송에 참여한 계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셜록

권오창 옹은 1950년대부터 용산에 거주했다. ‘고향이 어디였냐’는 기자의 질문에, 청력이 좋지 못한 권오창 옹은 여러 번 되물었다.

“아, 고향! 고향… 경북 문경 산북면에서 왔어. 일제가 망하고 물러간 뒤에 소나무 껍데기를 벗겨 가지고 먹을 만큼 가난했어. 먹고살 길 찾아서 용산으로 왔지. 매형이랑 고물상을 하면서 미군기지에서 나오는 철 고물들을 모았고, 동생은 부대 다니면서 거기서 나오는 빠다(버터), 햄 이런 거를 가져다 팔아서 살았지.

해방 후에 없는 사람들은 먹고살려고 군부대 주위에 많이 모였지. 젊은 여성들도 모였어. 미군들은 한국 여자를 우습게 알았지. 물건처럼, 일시 사용하는 물건처럼 생각했어.”

권오창 옹의 기억 속 이야기는 1992년 ‘윤금이 살해사건’까지 이어졌다. 미군 병사 케네스 마클은 기지촌 ‘위안부’ 여성 윤금이 씨를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했다. 사건이 준 충격은 불평등한 한미관계에 대한 사회적 인식 확산으로 이어졌다. 케네스 마클은 1994년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15년형을 확정받았고, 2006년 8월 가석방된 바로 다음 날 미국으로 출국했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용산에 산 권오창 옹은 “이제는 미군기지 없는 용산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최명희 씨는 결혼을 하면서 2011년 광주에서 서울 용산으로 왔다. 명희 씨에게 용산은 이상한 도시였다.

“‘도심 한복판에 다른 나라 군사기지가 있다니 참 이상하다’ 생각했죠. 나중에 기지 이전이 이뤄지면 공원이 조성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런데 일부만 빠져나가고 한미연합사 등은 그대로 남으면, 공원이 만들어지긴 어렵잖아요. 온전한 생태공원이 만들어지길 바라서 소송에 참여했어요.”

GATE 3 너머에 있는 한미연합군사령부(이하 한미연합사)는 ‘한미동맹의 심장’으로 불린다. 한국군과 주한미군을 통합·지휘하는 수뇌부 역할을 한다. 미군기지 반환 논의가 시작된 건 1990년 노태우 대통령 때다. 노태우 정부는 미국과 ‘용산기지 이전에 관한 합의각서(MOA)’를 교환했다. 기지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하자는 얘기도 이때 처음 나왔다.

기지 반환 논의는 33년 전부터 시작됐지만 그 과정은 지지부진했다. 김은희 대표는 “아직도 해결이 멀었다”고 한숨을 쉬었다.

“지금도 기지 부지의 약 30%밖에 이전이 안 됐어요. 계획이 자꾸 수정되면서 반환 시기가 뒤로 밀려난 탓이죠. 올해도 윤석열 정부는 용산에 남은 기지 중 어디를 얼마큼 이전할 건지 발표하지 않았어요. 기지 오염 정도를 알 수 있는 문서는 정보공개 청구를 해도 내놓지 않고요.”

김은희 대표는 “미군기지가 온전히 반환돼서 철조망 없는 용산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셜록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던 2004년 한미 양국 정부는 용산기지이전협정(Yongsan Relocation Plan, 이하 YRP 협정)을 체결했다. 한미연합사를 포함한 기지 일부를 2008년까지 평택지역으로 이전하는 게 주요 골자였다. YRP 협정은 국회의 동의를 받아 2004년 12월에 발효됐다. 

10년 뒤, 약속은 원점으로 돌아간다.

“박근혜 정부가 2014년에 한미연합사를 용산에 두기로 미국 정부와 합의했어요. ‘북한의 핵 위협 등 역내 안보 환경이 변화했다’는 게 이유였는데, 사실상 당시 미국의 강력한 요청을 수용한 결과죠.”

그해 10월, 국방부가 미 국방부 장관과 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한미연합사 잔류가 결정됐다. 김 대표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이하 민변)과 함께 용산 미군기지 반환을 위한 활동 중이었다. 민변 측에선 박근혜 정부의 한미연합사 잔류 결정에 대한 대응으로 주민 소송을 제안했다.

“국가가 국민하고 한 약속을 어긴 거죠. 한미연합사를 이전하자는 결정은 국회 비준을 거쳐서 확정됐어요. 국회는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이잖아요. 국회가 다 결정한 걸 행정부가 미국 뜻대로 하라고 손바닥 뒤집듯 바꿔도 되는 건가요? 정부가 바뀔 때마다 기지 이전 및 반환에 대한 결정도 매번 바뀌는 걸 국민이 보고만 있어야 하나요? 저희는 그걸 소송을 통해 묻고 싶었어요.”

주민 소송인단은 박근혜 정부의 한미연합사 잔류 처분은 국민과 신뢰보호의 원칙을 어긴 일이라고 봤다. 최명희 씨는 소 제기 자체가 국민의 신뢰를 어긴 정부에 대한 항의라고 했다. 기자가 최명희 씨에게 “승소한다면 얻을 이익이 뭐였냐”고 묻자, 그는 웃음부터 터뜨렸다.

“이익이요? 없었죠.(웃음) 기지가 전부 이전 및 반환되고 공원이 조성되는 시기가 빨라지면 오히려 저희 같은 세입자는 용산에서 못 살지도 몰라요. 땅값이 오르면 나가야 하니까요. 원고로 참여했던 사람들은 다들 상황이 비슷할 거예요.”

지난달 23일 만난 최명희 씨는 국방부가 보낸 소송비용액 청구서를 들고 카메라 앞에 앉았다 ⓒ셜록

YRP 협정에 따르면, 한미연합사는 2008년까지 평택으로 옮겼어야 했다. YRP 협정과 같은 해에 체결된 또 하나의 협정이 있다. 바로 의정부, 동두천, 파주, 춘천, 부산 등 5개 도시에 있는 주한미군 기지를 2005년까지 조기 반환하는 내용의 ‘LPP 개정 협정’이다. 반환 대상엔 동두천시에 있는 ‘캠프 케이시’가 들어 있었다. LPP 개정 협정 역시 같은해 12월 국회 비준을 통해 발효됐다.

용산 주민소송단에 동두천 주민이 함께했다. 캠프 케이시 역시 약속대로 반환하라고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김은희 대표는 행정소송이 다른 지역의 기지 반환 역시 약속대로 이뤄지는 계기가 되길 바랐다.

“소송을 걸어서 ‘한미연합사뿐만 아니라 다른 기지들 역시 약속대로 반환하라’는 어떤 압박을 정부에 가하고 싶었어요. 소송을 통해 판례가 남으면 다른 지역에서도 이를 근거로 요구를 할 수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소송에는 한미 간 불평등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깔려 있었다.

“이번에 윤석열 정부가 발표한 강제징용에 대한 입장도 사실 미국 입김이 작용한 결과잖아요. 한국이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게 미국 입장에선 좋으니까요. 용산 미군기지는 한국 사회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과 영향력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환경이 변해서 미군이 수도 한가운데 주둔할 이유가 사라졌다면, 기지도 사라져야 해요. 그 결정이 계속 번복되고 있으니 소송에 나서게 된 거죠.”

소송은 기지 미군기지가 품고 있는 여러 문제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다. 권오창 옹은 미국이 기지 오염 문제를 책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근 일부 반환된 기지에서 토양 오염 문제가 심각하다는 사실이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환경부 조사에 따르면 반환된 기지에서는 유류, 중금속이 기준치를 훌쩍 넘어섰다.

“한미연합사가 물러가야 공원 조성도 하지 않겠어? 공원을 조성하려면 기지를 더럽힌 미군이 스스로 (오염 문제) 처리를 해야 하는데, 일언반구도 없는 게 말이 되냐고.

김은희 대표는 “소송비용 청구서는 더이상 국가가 하는 일에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사진은 김 대표가 횡단보도 앞에서 국방부 건물을 바라보는 뒷모습 ⓒ셜록

주민 소송인단은 패소했다. 서울행정법원은 특히 주민소송단이 주요한 논리로 삼은 ‘신뢰 보호 원칙 위반’을 인정하지 않았다. 2018년 2월 서울고등법원이 주민소송단의 항소를 기각했다.

패소자에게 남는 건 소송비용이다. 민법 제98조에 따라, 상대편 소송비용까지 부담해야 한다. 국방부는 2019년 1차로 주민소송단 35인에게 소송비용 약 600만 원을 청구했다. 주민소송단은 공익소송에 대한 악의적 청구라고 생각해서 납입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 시절은 더 이상의 납입 요구나 압류 없이 지나갔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고 올해 1월, 다시 한번 청구서가 날아왔다. 이번엔 액수가 약 1.5배 불어난 977만 원이었다. 주민들이 제기한 소송은 용산 한미연합사와 더불어 동두천 캠프 케이시까지 총 두 지역에 대한 행정처분을 다루는 소송이었다. 법원이 처음엔 하나의 행정처분을 다루는 소송으로 보고 소송비용을 산정했던 것. 이에 서울행정법원은 소송비용을 ‘경정(바르게 고침)’했고 그 결과 소송비용이 늘어났다.

두 번째로 도착한 청구서에는 ‘미납 시 강제집행 조치할 예정’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김은희 대표는 “정부가 4년 만에 다시 청구서를 보낸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두 번째 청구서가 도착했단 소식을 듣고 정말 황당했어요. 소송을 시작한 2015년으로부터 8년이나 지난 시점이라 주민소송단 대부분이 용산을 떠난 후였거든요. 그날은 민주노총 압수수색이 진행된 날이기도 했어요. 여러모로 착잡하고 윤석열 정부에 대한 분노가 치밀더군요. 집으로 청구서가 오게 해서 주민들에게 미안하기도 했어요.”

청구서가 날아온 건 1월 18일. 납부 기한은 31일까지였다. 중간에 설 연휴가 끼어 있어서 사실상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약 1000만 원을 마련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집집마다 압류가 들어올 수 있었다.

김은희 대표는 소송비용 모금을 시작했다. 연휴를 제외하고 약 6일 만에 모금액이 채워졌다. 용산에서 활동하는 여러 시민사회단체에서 십시일반 돈을 보내준 것.

“익명의 개인부터 시작해서 용산시민사회연대, 공무원노조, 용산역사문화협동조합 같은 여러 단체까지…. 정말 감사하죠. 성심수녀회에서도 큰돈을 보내주셨어요. 수녀님들도 경제적으로 힘드신 걸 제가 아는데… 제가 액수를 보고 놀라서 전화를 드렸어요. 이렇게 안 해주셔도 된다고. 그런데 한사코 받으라고 하시더라고요.”

이 말을 하는 김은희 대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시민들의 마음이 모였다. 장벽처럼 느껴졌던 1000만 원이라는 액수가 메워졌다. 

1월 30일 주민 소송단 일부는 국방부 앞에서 공익소송에도 소송비용을 청구한 국방부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김은희

공익소송에도 적용되는 패소자 부담주의는 어떤 문제가 있을까. 김은희 대표는 앞으로 국가를 상대로 공익소송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망설일 것 같다고 털어놨다.

“소송비용 폭탄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아, 이제 소송할 수 있겠나’ 이런 생각이 들었었어요. 또 소송이 1심에서 끝날지 2심에서 끝날지도 모르는 거고 그럴 때마다 비용이 추가되니까요. 이러면 어떤 시민이 쉽게 소송에 나서겠어요?”

한미연합사는 결국 반환됐다. 지난해 11월 평택에서 한미연합사 평택 이전 완료 기념식이 열렸다. 2004년 YRP 협정 체결로부터 18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에 이뤄진 일이다. 김은희 대표는 이 대목을 설명하면서 “결국 주민들 말대로 됐다, 소송은 졌지만 우리 주장은 틀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미연합사 이전은 결국 이뤄졌는데 주민들은 1000만 원이란 숙제를 해결해야 했다. 최명희 씨는 “패소자 부담주의가 시민의 입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용산 미군기지 오염 문제 등 아직도 국가에 요구하고 싸워야 할 일이 남아 있어요. 드래곤힐호텔 등 용산에도 반환되지 않은 부지가 있어요. 동두천에 있는 캠프 케이시는 아직도 반환되지 않았고요. 이런 문제에 목소리를 내기 위해 소송을 해야 할 수도 있어요. 돈 걱정이 안 될 수가 있을까요? 공익소송에도 패소자 부담 원칙을 적용하는 건 시민의 목소리를 위축시킬 수 있다고 봐요.

 

주보배 기자 treasure@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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