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경 산청지회장 집과 학교에 압수수색.”
경남교육청이 주관한 금강산 통일교육 담당자 연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동료 교사는 자신에게 온 문자 메시지를 보여줬다.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졌다.
금강산 남측 출입사무소에서 경남 진주까지는 버스로 8시간. 그는 진주에 도착하면 바로 경찰에 체포되는 걸까, 아니면 가는 길에 경찰이 차를 멈춰 세우고 자신을 체포해가진 않을까 온갖 생각을 하며 마음을 졸였다. 버스 안 텔레비전에서는, 이튿날 있을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준비를 알리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최보경(48)은 1999년부터 경남 산청군에 있는 간디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재직한 지 10년이 넘어가던 2008년 2월 24일.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집과 근무지를 압수수색 당한다. 파란색 상자와 캠코더를 든 경찰들은 이날 컴퓨터 하드디스크, CD, 플로피디스크, 업무수첩 등을 가져갔다.
최보경은 경남경찰청 보안수사대에 전화해 강력하게 항의했다. 혐의 내용을 묻기도 했으나 구체적인 답변은 들을 수 없었다.
“그때 그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너희가 압수수색까지 해서 나를 국가보안법으로 걸었으니까 최선을 다하라고. 나도 최선을 다할 거라고. 제가 사건 담당자한테 전화해서 진짜 대충 하지 말라고, 제대로 한번 해보자고 그런 말도 했었죠.”
당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소속 교사들은 잇달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았다. 서울과 부산, 전북 등 각지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는 교사가 등장했다. 경남에서 교육운동과 지역사회 활동을 해온 최보경이 그 다음 ‘타깃’이 됐다.
압수수색 소식이 알려지자 간디학교 졸업생들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보경 선생님을 위한 간디학교 졸업생 대책위원회’라는 이름으로 학교 홈페이지에 성명서를 쓰기 시작한다. 간디학교 재학생들도 최보경을 돕기 위해 나섰다. 당시 재학생 114명 전원은 ‘우리는 우리의 선생님을 잃기 싫다’는 성명서에 서명한다.
학생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하고 탄원서를 받거나 촛불문화제를 열었다. 2008년 9월부터 2010년 10월까지 17차에 걸쳐 촛불문화제를 개최하고, 그 과정에서 1만 장의 탄원서를 받았다. 교내에서는 최보경의 결백을 상징하는 ‘흰 옷 입기 운동’을 매주 목요일마다 이어갔다. 최보경이 경찰 조사를 받거나 공판에 출석할 때마다, 학생들도 흰 옷 차림으로 동행했다.
재판정을 채운 건 학생들뿐만이 아니었다. 간디학교 학부모들도 자리에 함께했다. 이들은 기자회견과 규탄집회를 진행하며, 최보경의 결백을 주장했다.
“사실 저한테 유·무죄 판결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어요. 대신 재판 과정에서 의연한 모습을 절대로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왜냐하면 제자들, 학부모, 동료 교사들이 방청하는데, 거기서 제가 주눅이 들어 있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러나 검찰은 최보경이 이적표현물을 만들어 유포하고 그것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며, 2008년 8월 법원에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을 구형했다.
2008년 9월 3일 동료교사들의 릴레이 단식이 시작됐다. 최보경의 첫 공판이 있고 바로 다음날이었다.
“비록 우리는 한 끼를 굶으며 잠시 잠깐 이 상황에 대해 생각해볼 뿐이지만, 이 마음들이 모이면 큰 힘이 될 것을 믿는다. 부당한 혐의뿐만 아니라 하루 바삐 없어져야 할 국가보안법,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 잘못된 구조악들을 고쳐낼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 이 릴레이 단식을 계기로 학생들 앞에 서는 간디학교 교사로서 부끄럽지 않으려 한다.”(2008. 9. 3. 릴레이 단식 비망록 중)
그의 진심은 다른 교사와 학생들에게도 전해진다. 무죄 판결을 위한 이들의 릴레이 단식은 382회에 걸쳐 3년간 이어졌다.
최보경은 재판 과정에서, 검찰이 제시한 증거들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조사 과정에서 나눈 대화를 직접 메모하고, 검찰이 제시한 증거자료들을 모았다. 이때 국가가 그를 오랜 시간 감시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학생들하고 같이 역사기행 간 모습이나 동료교사와 출퇴근하는 모습까지도 사진이 찍혀 있었어요.”
압수수색이 이뤄진 것은 2008년. 하지만 경찰은 약 10년 전인 1999년부터 최보경의 일상을 ‘사찰’해왔다. 출퇴근하는 사진부터 학생들과 영화 상영회에 참여한 사진, 간디학교를 방문한 사람들의 차 번호까지 사진으로 찍혀 있었다. 경찰은 최보경이 어디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기록하고 있었다.
10년간 사찰한 기록과 압수한 물품 중, 검찰은 10가지를 증거로 제시했다. 최보경이 개인적으로 사용한 이메일이 증거자료로 채택되기도 했다. 그들은 최보경이 교육에 활용한 자료집과 그가 직접 만든 역사 교재를 문제 삼았다. ‘북한을 고무·찬양하고, 적화통일을 정당화’하는 내용이라는 판단이었다.
검찰은 이른바 ‘전문가’들에게 증거에 대한 감정을 맡겼다. 그들은 해당 자료집과 교재가 ‘이적표현물’이라고 감정했다. 최보경은 오히려 그 감정을 맡은 이들의 정당성을 지적했다. 당시 감정인은 정원영, 제성호, 유광호, 김광동 등 이른바 ‘뉴라이트’ 계열의 인사들이었고, 그중에는 총선에서 한나라당(지금의 국민의힘) 공천을 신청한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공판에서 검찰 측 증인으로 채택됐지만 다섯 차례나 출석에 불응했다. 증인이 법정에 출석하지 않아 재판은 연기되기 일쑤였고, 재판부가 이들에게 과태료를 부과하겠다고 하자 검찰이 증인 신청을 취하하는 일도 있었다.
“피고인이 이적행위를 할 목적으로 위 책자를 소지하고 있었다거나 피고인이 위 책자를 앞으로 제3자에게 열람시켜 외부로 전달하거나 반포하는 등 전파할 가능성이 있는 책자라고 인정하기에는 부족하고, 달리 피고인이 불특정 또는 다수인을 상대로 선전·선동을 위하여 위 책자를 소지하고 있었음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2008고단 705 창원지방법원 진주지원 판결문)
최보경은 불구속 상태로 진행된 재판에서 3년 만에 1심 무죄를 선고받는다. 창원지방법원 진주지원(박재철 형사2단독 판사)은 2011년 2월 1일 ‘범죄 증명이 없는 경우’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어진 법적 공방에서도 법원은 모두 무죄로 판단했다. 검찰이 문제 삼았던 증거들에 대해 모두 이적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최보경은 2015년 3월 26일 대법원으로부터 최종 무죄 선고를 받는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압수수색을 받은 지 7년 1개월 만이었다. 판사가 무죄 주문을 읽을 때, 재판정에 만세 소리가 울려퍼졌다.
“제가 참 복 많은 사람이라는 얘기를 그 당시에 참 많이 했어요.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고 살지 못했고, 다른 사람들이 힘들 때 그 사람의 편이 되지 못했던 것 같은데요. 제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이렇게 많은 분들이 저를 지지해주시고 함께해주셔서 감사했죠. 남은 세월 갚으며 살겠다고 말씀드리기도 했어요.”
최보경에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씌우는 데 일조한 인물 중에는 김광동 당시 나라정책연구원 원장이 있다. 김 원장은 경남진보연합 5차 대표자회의 자료집을 감정했다. 검찰이 제시한 10가지 이적표현물 중 하나였다.
그는 해당 자료집이 “동맹국인 미국을 부정하며, 평화협정 체결은 북한체제를 지키기 위한 것임에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며, “북한 김정일 수령 독재적 공산전체주의 유지와 옹호라는 목적에서 작성된 문건”이라고 감정했다.
그는 현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이다. 지난해 12월 김광동 위원장이 취임하면서, 그가 2013년 쓴 칼럼에서 5·16군사정변을 ‘혁명’이라고 표현하고, 2020년 발표한 논문에서 5·18 헬기 사격이 ‘허위사실’이라 쓴 사실이 다시금 논란이 되기도 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폭력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출범한 국가 조사기구. 김 위원장에게 ‘부적절한 자리’라는 비판이 일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장관급’ 위원장 자리에 앉아 권력과 명예를 쥐고 있다.
김 위원장은 승승장구했지만, 최보경의 삶은 사뭇 달랐다.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기 전으로 돌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제일 힘들었던 건 끊임없이 자기검열을 해야 한다는 거였어요. 특히 저는 교사잖아요. 예전에 수업 시간에 거리낌 없이 했던 이야기들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스스로도 저를 좀 검열한다는 느낌이 들 때 우울해지고 그랬어요. ‘내가 왜 이러는 거야? 나 이렇게 안 살았는데 왜 이래?’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그러고 있더라고요.”
정신적인 고통은 신체적인 증상으로도 나타났다. 최보경은 무죄 판결 이후 몸무게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두 달 만에 16㎏ 가까이 살이 빠졌다. ‘갑상선기능항진증’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1년 가까이 약을 복용하자 정상 체중으로 돌아왔다. 그는 회복되는 몸을 보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졌다.
최보경은 2020년 다리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고 병원을 찾았다. 이번에는 ‘척스트라우스증후군’이라는 희소병 진단을 받는다. 백혈구 혈액에 문제가 생겨 정상세포를 공격하는 이 병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고, 그래서 치료약도 없었다.
그는 2021년 투병을 위해 휴직에 들어갔다. 운동을 꾸준히 해야 오래 버틸 수 있다는 말에 자전거를 탄다. 답답한 투병생활에 탈출구를 찾은 순간이었다. 그 와중에도 지역사회에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무리하지 말라는 주변 사람들의 걱정도 그는 알고 있었다.
“걱정해줘서 하는 말인 건 알죠.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될 것 아닙니까. 이 작은 산청에서도 누군가는 싸우고 있다, 누군가는 아닌 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그걸 보여줘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최보경은 지난한 법적 공방에서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베푸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다. 여전히 누군가를 괴롭히는 ‘무기’로 활용되는 국가보안법. 최보경은 그해 6월 ‘국가보안법 폐지’를 내걸고 자전거 국토종단을 실행에 옮긴다.
“(자전거 종주는) 생물학적인 생명을 위한 운동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정치·사회적인 생명을 가지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다들 저를 말리는데, ‘나 괜찮아요’ 이런 걸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혼자서 하루에 100㎞씩 자전거로 내달렸다. 자전거에는 ‘국가보안법 폐지’가 적힌 깃발이 꽂혀 있었다. 숨 가쁘게 달린 도로 위에서 시민들의 응원을 받기도 했다.
최보경은 8일 만에 서울에 있는 헌법재판소에 도착했다. 헌법재판소에서는 국가보안법 위헌법률 심판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하루빨리 국가보안법에 대한 ‘위헌’ 판결이 나오기를 촉구하며 그 앞에서 1인시위를 했다.
국가보안법 7조 위헌재청을 속히 판결하라는 목소리. 국가보안법 7조는 1991년 이후 헌법재판소의 심판대에 7번이나 올랐고, 지난해 9월 처음으로 공개변론이 열리기도 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지금까지도 결정을 내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는 국가보안법의 끝을 좀 봐야겠다는 마음이었어요. 21대 국회가 아니면 국가보안법 폐지는 안 될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죠.”
국회의사당 앞에서도 시위를 이어갔다. 그가 든 피켓에는 ‘국가보안법 폐지 10만 입법청원을 속히 의결하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2021년 10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국가보안법 폐지 입법청원에 참여했다. 그에 따라 21대 국회에서는 국회의원 21명이 국가보안법 폐지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그래도 그는 희망을 안고 서울까지 달렸다.
“우리나라처럼 교육열이 과열돼 있는 곳에서는 ‘빨갱이 교사’만큼 이슈화하기 좋은 카드가 없어요. 권력층에서는 교육과 언론을 휘어잡고 싶어 하죠. 자신들의 부당한 권력을 합리화하고 유지시키려고 하니까요. 그래서 (교사들을) 더 탄압하고, 길들이고,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 같아요.”
최보경은 2022년 3월 간디학교로 복귀한다. 1년간 휴직하면서도 마음은 불편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이른바 ‘간첩단’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국가정보원” 점퍼를 입은 국정원 수사관들과 경찰은 노동조합, 농민단체 등을 압수수색했다. 하루아침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씌워진 이들은 15년 전 최보경과 다르지 않다. 여전히 국가보안법은 살아 있었고, 다음 ‘목표’을 찾고 있었다.
그는 오늘날까지도 “타깃을 잡아놓고 국가보안법 잣대를 들이미는” 것을 지적하며, 국가보안법을 “여론몰이를 통한 국면 위기 돌파구”로 여기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국가보안법이 사회적 문제로 조금 더 이슈가 돼서 그 문제의식을 느껴야 해요. 그래서 국가보안법이 존재할 근거가 없는 그런 세상이 됐으면 좋겠어요. 저 역시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할 겁니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