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전여옥’이면 모를까, ‘장애인’은 일종의 금기어였다. 그 세 글자를 제목에 박으면 클릭 수는 거의 폭망했다. 기사를 퍼뜨리기 위해 ‘장애인’을 지울까, 정직(?)하게 제목에 새길까?
편집기자로 일하던 10여 년 전, 난 대개 전자를 택했다. 장애인 관련 기사가 아닌 것처럼 꾸며서, 클릭 수와 여론 이끌어내기. 그것이 편집기자의 센스, 능력, 본업이라 여겼다. 꺼림직한 감정은 없었다. ‘정직하게 가봤자 독자가 클릭하지 않는다’는 핑계 뒤로 숨으면 됐으니까.
그로부터 강산도 변할 법한 세월이 흘렀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5월 ‘왓슨 북클럽’ 주인공으로 이규식(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대표)을 초대했다. 중증 뇌병변 장애인 이규식은 책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후마니타스, 2023. 3.)를 최근 펴냈다. 부제 ‘나의 이동권 이야기’가 말해 주듯, 그는 ‘지하철 출근길투쟁’을 펼치는 핵심 인물 중 한 명이다.
셜록이 이규식을 강연자로 초대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싸울 정도면 하고 싶은 말이 많겠지. 비장애인만 강연하라는 법 있어? 언어장애가 있는 이규식에게도 마이크를 줘야지. 그의 말을 잘 들어보려 노력하면 좋은 소통이 되지 않을까? 그 자체로 좋은 경험이고.’
이규식은 셜록의 제안에 응답했다. 이전에는 해보지 않았거나, 굳이 할 필요도 없던 고민이 시작됐다.
‘그 강연장에는 이규식의 전동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나?’
‘마땅한 강연장을 구해도 지하철 역과 멀면 어쩌지?’
‘그나저나 해당 역에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을까?’ 등등…
무엇보다 ‘중증 뇌병변 장애인의 강연이 익숙하지 않을 텐데, 셜록의 친구 왓슨이 과연 얼마나 참여할까’가 큰 걱정이었다. 이미 섭외를 마친 상태였으니, 물리기도 어려웠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제서야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를 읽기 시작했다. 업무로 펼친 책이니 별 기대는 없었다. 그동안 수차례 들어온 장애인의 울분과 분노가 도돌이표처럼 반복되겠지…. 독자가 장애인 기사를 ‘패싱’하듯이, 나 역시 적당한 순간에 그의 패싱할 작정이었다.
그러다 이규식의 매력이 빠져들었다. 그럴 만한 이유는 그의 책 서문에 담겨 있다.
“평생 ‘병신’이라는 욕을 듣고 살아온 뇌병변 장애인이 직접 자기 이야기를 펼쳐 놓기는 거의 처음인 만큼 나름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규식의 말대로 중증 뇌병변 장애인의 생애사는 한국에서 출판된 적 없다. 그의 책에는 흥미롭고 재밌고, 이전엔 몰랐던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렇다고 딱딱한 의미만 있고 재미는 하나도 없는 그렇고 그런 책이 아니다.
언어장애를 동반한 중증 장애인의 내면과 성격은 늘 지레짐작의 대상이었다. 자기 표현의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은 탓에 이들의 캐릭터는 늘 단편적으로 그려졌다. 그것도 비장애인에 의해서 말이다.
책의 한 대목을 보자. 이규식이 10대 후반의 나이에 가족과 떨어져 외딴 종교시설에 들어갔을 때의 일을 추억하며 적은 글이다.
“내가 도착한 날은 마침 주일이어서 바로 예배를 드렸다. 가만히 앉아 있다 보니 나 혼자 이런 외진 곳에서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다가왔고,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한 시간 넘게 펑펑 울었다. 내가 목사님 설교를 듣고 감동받아 운다고 생각했는지 주변 사람들이 ‘새로 오신 성도님께서 감동을 많이 받으셨나 보다. 예수님이 좋아하실 거다. 여기 있으면 다 잘될 거다’ 같은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책 집필이라는 자기표현 도구를 움켜쥔 이규식은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처럼 자기 이야기를 풀어낸다.
한 재활원에 처음 찾아갔을 때 자기 아버지에게 “나 그냥 여기 버리고 가세요”라고 말하자, 아버지가 진짜 자기를 버리고 돌아섰을 때의 혼란스런 심정부터,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 기어서 한강대교를 건너는 투쟁을 하다 너무 힘들어 ‘경찰이 빨리 잡아가길’ 기도했던 일화, 혼자서는 거동하기 힘든 중증 장애인을 처음 수용한 구치소에서 벌어진 에피소드까지….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를 읽으면,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게 된다. 자기 입으로 스스로의 삶을 설명하니 ‘인간 이규식’의 삶과 캐릭터가 입체적 느껴지는 건 당연하다.
많은 사람이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를 봤으면 좋겠다. 장애인 출근길투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우리는 중증 장애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만난 적은 드물고, 얼굴 맞대고 대화 나눈 경험은 더더욱 적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말을 걸고 들어야 하는지 등 소통법 자체를 모른다.
이규식은 언어장애도 갖고 있다. 강연을 하는 그의 말이 청중에게 잘 전달이 안 되면 어쩌지? 이 걱정도 책을 읽고 많이 사라졌다. 그가 먼저 말했다.
“장애인과 이야기할 때 못 알아듣고도 알아들은 척하지 말고 두 번, 세 번 반복해 질문하라. 눈높이를 맞춰 대화하자. (…) 그렇게 대화하며 자꾸 듣다 보면 언어장애가 있는 사람의 이야기도 들리게 마련이다.”
중증 뇌병변 장애인 이규식이 강연하는 ‘왓슨 북클럽’. 많이 신청하고 참여하면 좋겠다. 낯설더라도 만나서 묻고 들으며 소통하다보면, 서로에 대한 이해의 지평이 넓어질 거다. 무엇보다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는 재밌고 유쾌한 책이다. 저자 자체가 그런 사람이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편집기자 시절 내가 손질하고 삭제했던 장애인 기사 중에는 이규식 관련 소식도 많았다. 온라인에선 지워지고, 현실에선 버스-지하철이 패싱하고. 그런 세상에서 이규식은 오랫동안 싸워왔다.
이규식 덕분에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생겼고, 우리 엄마는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편히 이용한다. 그는 마이크를 쥘 자격이 충분하다.
행사 :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 저자 이규식 북토크.
일시 : 2023년 5월 19일 금요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장소 : 창비서교빌딩 지하2층 50주년홀(B200) *서울지하철 6호선 망원역 1번출구에서 도보로 3분.
참가 자격 : 셜록의 친구(유료독자) ‘왓슨’이면 누구나. 동반 1인 가능.
방법 : 참여를 희망하는 이유를 다섯 문장 이내로 적어주세요. (선착순 선정 원칙이나, 왓슨 모임 첫 참가자를 우대합니다)
신청 : 2023년 5월 8일 월요일까지 아래 구글 폼으로 받습니다.
☞ https://forms.gle/MzThVqD7aot4hQ3A9
참가자 발표 : 2023년 5월 9일 문자로 개별 연락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