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살 꼬마가 기억하는 전쟁은 어떤 모습일까. 전남 영암군 영암읍 용흥리 탑동마을에 살던 송영덕(1945년생)은 몇 가지 장면으로만 전쟁을 기억하고 있다. 제일 이상했던 건, 낮이면 마을로 나왔다가 밤이면 산으로 사라지는 어른들의 행동이었다.
“어려서 잘 모르지만 제가 기억나는 건, 동네 사람들이 낮에는 들에 나가서 일을 하시고 저녁에는 산으로 가서 잠을 자고, 아침에 해 뜨면 또 나와서 일을 하고 그런 기억이 있어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시작된 뒤, 약 한 달이 지난 7월 23일 영암군에도 인민군이 들어왔다. 하지만 9·28 서울수복 이후 전세가 역전되자, 빨치산들은 영암 월출산과 국사봉 등으로 들어가 저항을 계속했다. 마을에서도 낮에는 경찰이 들어오고, 밤에는 빨치산이 내려오는 경우가 많았다. 화를 피하려면 주민들 낮 다르고 밤 다르게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얼굴도 몰라요.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경찰들한테 끌려갔다 그러더라고요. 저보다 두 살 아래 동생도 있었고, 엄마 배 속에는 또 애가 하나 있었는데….”
1950년 10월 6일 영암경찰서를 수복한 경찰은 관내 수복작전에 나섰다. 12월까지 대부분의 지서를 수복했고, 산에서 활동하는 ‘공비’들을 토벌하기 위해 여러 차례 합동작전을 벌였다. 불행히도 군경은 이 과정에서, 미수복 지역 주민들을 ‘비무장 공비’또는 ‘공비 동조자’로 여겼다. 사실상 주민을 소탕대상으로 삼으면서,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낳았다.
“며칠 지나서 할머니가 아버지 시체 찾으러 간다고 가셨어요. 그런데 시체를 못 찾고 오셔서, 할머니가 정신이 반쯤 나가 있으시던 기억이 나요. 아버지가 음력 8월 그믐날(양력 10월 10일) 나가셨대요. 그날은 제 동생 생일이었어요. 그 뒤로 8월 그믐날에 제사를 지냈어요.”
송영덕의 아버지 송장현(당시 31세)에 대한 기록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의 <영암군 민간인 희생사건(1) 조사보고서>(2008년)에도 등장한다.
영암 지역을 수복한 경찰은, 인민군 점령기에 그들에게 협조한 ‘부역자’들을 찾아나섰다. 부역자로 의심되는 사람, 또는 그 가족들을 연행했다. 송장현도 그 대상이었다. 그는 첫날에는 경찰을 피해 피신했다가, 자기 때문에 이복동생이 연행된 사실을 전해 듣고 자수했다.
영암경찰서로 연행된 송장현 등 송씨 일가들은 1950년 10월 11일(음력 9월 1일) 경찰서에서 끌려 나가 살해됐다. 함께 연행됐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돌아온 사람이 가족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경찰이 죽은 장소를 알려주지 않아 가족들은 희생자의 시신을 수습하진 못했다.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는, 1950년 10월부터 1951년 3월 사이에 영암 주민들이 빨치산일지 모른다는 의심 때문에, 또는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군경에 의해 적법절차 없이 집단 살해된 사실을 규명했다.
당시 신원을 확인한 희생자는 234명. 그중 여성이 91명(39%)이며, 12세 이하 어린이가 43명(18%), 60세 이상 노인이 20명(9%)이었다. 또한 가족 단위 희생자가 144명으로 전체 희생자의 62%에 달했다. 여성과 어린이까지 포함된 가족 단위의 민간인을 무차별 살해했다는 증거다.
“거기가 다 송씨 집안 사람들이에요. 한 가족을 창으로 찔러서 다 죽이기도 했어요. (…) 할머니 밭 매러 가시는 데 따라가면 할머니가 막 울고 그랬어요. 비가 오는 날에는 갑자기 ‘우리 얼른 집에 가자, 혹시 니 애비가 왔을지 모르니까’ 그러셨던 기억이 나요.”
전남 영암군 군서면 마산리 낙안마을에 살던 김옥심(1950년생)의 아버지 역시 한국전쟁 도중 끌려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김옥심의 아버지는 목포형무소에 구금됐다가 ‘내화촌’에서 희생된 걸로 추정된다. 길게 판 구덩이 앞에 사람들을 세워두고 총살한 뒤 묻어버렸다.
“저희 어머니가 저를 업고 가가지고 아버지 시신을 찾았는데, 조끼, 집에서 나갈 때 입고 나간 조끼를 보고 ‘이게 내 남편이 입고 간 조끼다’ 이래가지고 시신을 수습했답니다.”
김옥심은 한 살 젖먹이. 엄마의 나이도 고작 스물한 살이었다. 젊디 젊은 엄마 혼자 어린 딸을 키우며 살기에 세상은 너무 무서웠다. 김옥심이 세 살 때부터는 엄마와 함께 외가로 들어가 살게 됐다. 하지만 다섯 살이 되던 해에는 엄마와도 헤어졌다. 그 뒤에는 큰집으로 가서 지냈다.
“그땐 몰랐어요. 내가 왜 남의 집에서, 남들처럼 아버지, 엄마 소리 한번 부르지도 못하고 지내야 하는지. 큰집에 살 때, 큰아버지가 당신의 외손녀를 안아주는데, 그때서야 제가 안 거예요. 그리움이란 걸. 아버지가 있었으면 나도 저렇게 무릎에 앉혀주셨겠구나….
그때는 빨갱이, 간첩, 이런 소리를 많이 했어요. 우리 아버지가 간첩이라도 좋으니까, 단 하루만이라도 엄마 아빠 손 잡고 유원지 놀러갔으면 원이 없겠다, 아버지하고 손 잡고 하루만 지냈으면 원이 없겠다, 그렇게 늘 마음에 담으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지금도 아버지라는 그 이름이, 그 나무가 그렇게 크다는 걸 절절하게 느낍니다.”
하루아침에 아버지를 잃고 난 뒤, 송영덕의 인생 또한 원통함의 연속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엄마 배 속에 있던 동생은, 태어난 지 1년 만에 홍역을 앓고 세상을 떠났다. 큰집 사랑채에서 살다가, 거기서도 지낼 수 없어서 엄마와 두 아이는 오막살이 생활을 시작했다.
“엄마 혼자 우리 둘 데리고 살다 보니까 너무 힘들었겠죠. 친정을 왔다 갔다 하시더니, 결국 거기서 재가를 해서 우리를 버리고 가셨어요. 그리니 우리가 어떻게 살았겠어요? 제일 한(限)이 된 건 남들 학교 다닐 때 못 다닌 거…. 부모가 계셨으면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살았을까? 그동안 살아온 게 너무 한스럽고, 너무 기가 막혀요….”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구자환 감독 documob@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