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예서(가명) 씨는 서울지하철 5호선 차량에 오를 때면 늘 전속력으로 돌진한다. 전동 휠체어를 타는 그가 남들처럼 전철을 이용하려면 그 방법뿐이다. 5호선에는 열차와 승강장 사이가 넓고, 높이 차이가 나는 역이 많다.
이 넓이와 높이 차를 극복하려면 플랫폼에서 전동 휠체어를 뒤로 후진해 전철을 향해 힘껏 속도를 높여야만 한다. 5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전철에 오르던 2017년 5월에도 그렇게 승차 시도를 했는데, 사고가 터졌다. 휠체어 앞바퀴가 열차와 승강장 사이 공간에 끼는 바람에 전 씨의 몸이 앞으로 튕겨 나갔다.
위험한 사고는 서울지하철 2호선 신촌역에서도 벌어졌다. 장혜선(가명) 씨는 전동 휠체어를 타고 전철에 오르려 했는데, 앞바퀴가 전철과 승강장 사이에 끼었다. 장 씨 몸은 앞으로 쏠렸는데, 안전벨트 덕분에 추락을 면했다. 2014년 4월에 그때 장 씨가 이용한 신촌역 3-2 탑승 구간의 전철–승강장 사이의 폭은 무려 17cm에 달했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에게 이런 폭은 거대한 절벽과도 같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마다 절벽 타기처럼 위험을 감수해야 하다니.
두 사람은 2019년 7월 서울교통공사를 상대로 차별구제 소송을 제기했다. 둘은 서울교통공사가 장애인 승객에게 정당한 편의를 제공하지 않는 등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장애인차별금지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신촌역, 충무로역 등 지하철역에 장애인 승객의 사고를 방지를 위한 안전발판 등을 설치하라고 요구했다.
자신의 피해구제를 넘어 장애인의 안전한 이동권을 위한 공익소송이었다. 결과는? 두 사람은 1000만 원을 물어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전철 이용하다 사고 피해를 겪었는데, 돈까지 내라니.
이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예서, 장혜선 씨는 소송을 제기하며 서울교통공사의 두 가지 규정 위반을 지적했다.
“차량과 승강장 연단 간격이 10㎝가 넘는 부분에는 안전발판 등 승객의 실족사고를 방지하는 설비를 설치해야 한다” – 도시철도건설규칙 제30조2 제3항
“승강장 높이는 승강장 바닥 면과 차량 바닥 면 간의 차가 ±15㎜ 이내가 되도록 한다” – 도시철도 정거장 및 환승 편의시설 보완 설계 지침, 국토교통부
1심의 쟁점은 두 가지. 첫째, 서울교통공사가 규정을 위반했는가. 둘째, 장애인에게 정당한 편의를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원고를 차별했는가.
서울동부지방법원 재판부는 원고 패소를 판결했다. 재판부는 우선, 원고 측이 문제 삼은 지하철역은 두 규정이 생기기 이전에 준공돼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봤다. 서울교통공사가 승강장 위치 안내 앱, 이동식 안전발판서비스 등 이미 충분한 편의를 제공했다는 판단도 내렸다.
전예서, 장혜선 씨는 곧바로 항소했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의 판단도 1심과 같았다. 다만, 판단의 근거는 1심과 달랐는데, 의미 있는 내용이 판결문에 담겼다.
“휠체어 사용자가 장애가 없는 사람과 동등하게 승하차하기 어려운 승강장의 경우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차별행위가 존재한다고 할 것이다” – 서울고등법원 판결문, 2020나2024708)
즉, 서울교통공사가 차별을 한 건 맞지만 그럴 만한 사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원고 측 법률 대리를 맡은 조미연 변호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는 이렇게 설명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에는 ‘정당한 사유‘가 있을 경우 장애인차별이 발생하더라도 차별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어요. 법원이 저희의 요청을 들어줄 수 없는 서울교통공사의 사정을 봐준 거죠. 차별은 인정되지만 법리상 ‘장애차별금지법을 위반한 차별‘로는 보지 않아서 시정명령까지는 안 내린 겁니다.”
두 번 패소했지만,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룬 셈이다. 대법원 판단까지 받아볼 법한 상황, 하지만 돈이 문제였다. 이미 1, 2심에서 진 두 사람은 서울교통공사에 상당한 금액을 줘야 할 수도 있는 처지였다. 대법원까지 갔다가 또 패소하면 이 비용은 더 늘어난다.
민사소송법 제98조에는 “소송비용은 패소한 당사자가 부담한다“고 명시돼 있다. 소송비용에는 상대방 변호사 보수도 포함된다. 법원이 재량으로 소송비용 전부 혹은 일부를 승소한 쪽에 부담하게 할 수 있으나(같은 법 제99조 및 제100조), 공익소송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전예서, 장혜선 씨는 결국 상고를 포기했다. 곧바로 두 사람에게 청구서가 날아왔다. 서울교통공사가 두 사람에게 소송비용 약 1000만 원을 청구했고, 법원이 이를 수용한 것이다.
2심 재판부가 인정한 대로, “차별행위가 존재” 했고 그 탓에 사고가 났는데 돈까지 내야 한다니. 두 사람은 즉시 항고했다.
“피신청인(전예서, 장혜선)이 소송을 한 건 사고와 그에 대한 배상을 위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중략) 전체 교통약자를 대표해 문제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차별구제청구소송을 제기했던 것입니다.” – 항고 이유서에서
법원은 항고를 기각했다. “피신청인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사건이 공익적 성격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소송비용을 내라는 결정이 공정이나 형평에 반한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였다.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소송에 관한 법률 시행령에는 국가가 소송에서 승소한 경우 패소자로부터 소송비용을 회수하는 과정이 설명돼 있다(같은 법 시행령 제12조 제3항). 하지만 환수 의무만 규정돼 있을 뿐, 소송비용을 회수하지 않는 경우에 대한 서술은 없다. 즉, 국가를 상대로 한 공익 소송이라고 하더라도 소송비용을 내야 하는 것.
대법원 규칙인 ‘변호사보수의 소송비용 산입에 관한 규칙‘은 현저히 부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법원이 상당한 정도까지 감액 산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나(같은 규칙 제6조 제1항), 감액 사유에는 역시 ‘공익성‘은 없다.
조미연 변호사는 현행법이 사회적 약자의 재판 청구권을 침해한다고 설명했다.
“소송비용을 부담할 여력이 없다면 재판으로는 권리 구제 절차를 밟을 수 없단 메시지죠. 내 권리를 재판을 통해 찾고 싶더라도 돈이 없으면 재판을 할 수 없잖아요.”
대한변호사협회에서 공익소송 패소자 부담 제도개선 TF 위원으로 활동했던 박호균 변호사(법무법인 히포크라테스)는 재판청구권이 헌법에 명시돼 있는 권리이니만큼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재판청구권은 헌법 제27조 1항에 명시돼 있습니다. 사법부의 존재 이유는 피해자가 정당하게 권리 구제를 받고 억울한 일이 있으면 그 억울함을 법원에서 해소할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재판청구권이 제약되지 않도록 제도를 손볼 필요가 있어요.”
미국에서는 공익소송 원고가 승소한 경우 패소자에게 변호사 보수를 청구할 수 있다. 반면 원고가 패소하면 상대방의 변호사 보수를 부담하지 않도록 한다. 일명 ‘편면적 패소자 부담주의‘다.
영국은 법원의 재량으로 원고가 패소한 경우 소송비용 지급 의무를 면제하거나, 원고가 내야 하는 소송비용의 상한을 설정할 수 있다.
참여연대 등 64개 시민사회 단체는 공익인권소송 패소시 과중한 소송비용 부담을 개선해달라는 공동의견서를 2018년 대법원에 냈다. 대한변호사협회 역시 공익소송에도 적용되는 패소자 부담주의에 해결책을 모색하는 심포지엄과 토론회를 2018년, 2020년에 개최했다. 국회에서는 관련 토론회가 2021년, 2022년 두 차례 열렸다.
법무–검찰개혁위원회는 2020년 2월 ‘공익소송 패소비용의 필요적 감면 구정 마련‘을 심의, 의결하고 권고했다. 민사소송법 개정안 등이 발의되기도 했다. 하지만 관련 법안은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잠들어 있다.
“신청인이 주장하는 이른바 ‘공익소송‘을 제기해 패소한 당사자에 대한 소송비용 부담액 경감 근거를 찾을 수 없다.” – 서울고등법원 판결문, 2021라21374
서울고등법원이 1000만 원대의 소송비용액확정 결정에 항고한 전예서, 장혜선 씨에게 한 대답이다. 소송비용을 면제하거나 혹은 감면하려고 해도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남은 길은 하나, 법을 문제 삼는 것이다. 전예서, 장혜선 씨는 법원의 소송비용액확정 결정에 재항고하면서 민사소송법 일부 조항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을 신청했다.
두 사람을 대리한 변호인단은 소송비용 패소자 부담주의를 명시한 민사소송법 제98조, 그 예외를 규정한 제109조 제1항이▲재판청구권을 제한하고 ▲힘의 우열이 명백한 사건에 예외를 두지 않으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고려가 없다는 점에서 위헌성이 짙다고 주장했다.
“공익성을 고려한 감면 기준이 없는 게 헌법 정신을 위반한다고 생각합니다. 공익소송의 특징은 원고-피고 간 힘의 불균형이 크다는 점입니다. 피고가 사회·경제적인 면에서 훨씬 힘이 셀 때가 많아요. 따라서 공익소송에 대한 감면 기준이 없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주장했습니다.”
재판부는 위헌심판제청을 기각했다. 대법원은 이 판결을 인용해 기각을 확정했다. 판결문에는 이런 내용이 담겼다.
“경제적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의 소송 자체를 봉쇄한다는 비판이 있을 순 있으나, 입법 정책적으로 판단할 문제다.” – 서울고등법원 판결문, 2022카기20007
입법부에서 법률 제정이나 개정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미연 변호사는 재판부를 비판했다.
“법원은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음에도 입법부 뒤로 숨은 겁니다. 또 대법원 규칙인 변호사보수의소송비용산입규칙에 보면 ‘현저히 부당한 경우‘에 한해 법원이 비용을 감액해 줄 수 있다고 나와 있거든요. 결국 공익소송이 이 ‘현저히 부당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지 않는 겁니다.”
이제 남은 건 헌법소원이다. 지난해 7월 전예서 씨와 장혜선 씨의 변호인단은 민사소송법 일부 조항에 대한 헌법소원을 신청했다.
“공익소송은 당사자 목소리를 직접 사회에 알리고 빠른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해요. 과거에는 지하철역 장애인 화장실은 성별 구분 없이 하나만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말이 안 되죠. 이런 사안들은 공익소송을 통해 변하기 시작했어요. 공익소송을 지원하는 일을 하면서 소송비용 때문에 소송 자체를 포기하는 사례를 봤어요. 이제 헌법재판소가 용기를 내 전향적인 판단을 내리면 좋겠습니다.”
법원은 “입법 영역“이라는 취지로 전향적 판단을 미루고, 국회는 개정 법률안을 처리하지 않는 상황. 헌법이 보장하는 재판받을 권리는 돈 앞에서 계속 무력해지고 있다.
주보배 기자 treasure@sherlockpress.com